녹십자의 52주 신고가 경신을 기점으로 총수 일가와 공익재단 등이 지분을 매각해 현금 확보에 나서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진=GC녹십자 제공
#지분 매각해 실탄 확보, 어디에 쓰일까
2009년 녹십자그룹의 창업자인 허영섭 회장이 타계한 이후 동생인 허일섭 회장이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고 허영섭 회장의 아들인 허은철·허용준 형제는 작은아버지인 허일섭 회장 아래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현재는 허은철·허용준 형제도 경영 전면에 나선 상황이다. 차남 허은철 씨는 2016년 3월부터 녹십자 단독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삼남 허용준 씨는 2017년 3월부터 녹십자홀딩스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녹십자는 코로나19 영향에도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하고 있다. 올 3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이 각각 4200억 원, 507억 원을 기록했다.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4.5%, 37.1% 증가했다. 특히 분기 영업이익이 지난해 영업이익 403억 원을 훌쩍 뛰어넘었다. 올해 코로나19와 독감이 함께 유행하는 ‘트윈데믹’ 우려로 인해 독감 백신 매출이 증가한 결과다.
증권가는 녹십자의 성장세가 내년까지 이어질 것이라며 일제히 목표주가를 상향했다. 주가는 상승세를 타며 최근 52주 최고가를 45만 4500원으로 경신했다. 올 초까지 12만 원대였던 주가는 30만 원 중·후반에서 40만 원 초반대까지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녹십자의 52주 신고가 경신을 기점으로 총수 일가와 공익재단 등이 지분을 매각해 눈길을 끈다. 허일섭 회장은 녹십자 주식 3만 주를 장내 매도하며 약 124억 5000만 원을 확보했다. 허 회장의 측근인 박 부회장은 1만 7000주를 장내 매도해 65억 8000만 원을 마련했다. 전도규 GC녹십자헬스케어 사장과 이인재 녹십자 전무도 각각 6억 2000만 원, 1억 1000만 원 규모로 녹십자 주식을 매각했다. 그러자 허용준 대표가 이사장으로 있는 미래나눔재단도 보유한 녹십자 주식 전량을 매각해 191억 원을 마련했다.
일각에서는 녹십자 지분 매각으로 실탄을 확보해 본격적인 지분 경쟁에 나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녹십자그룹의 지배구조는 ‘오너일가 및 공익재단→녹십자홀딩스→녹십자’로 구성된다. 문제는 지분 구조상 후계구도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녹십자홀딩스 주식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따라 그룹 경영권의 향배가 정해진다는 뜻이다.
실제 허일섭 회장은 녹십자홀딩스 지분율을 매년 확대해왔다. △2009년 3만 4282주 △2010년 3만 2000주 △2012년 25만 2380주 △2013년 14만 5000주 △2015년 5만 6주 △2016년 5만 주 △2017년 7만 3001주 △2018년 8만 2000주 △2019년 7만 주 △올해 3월 3만 주를 매수했다. 허 회장의 녹십자홀딩스 지분율은 12.16%로 1대 주주다. 아내 최영아, 딸 허진영, 아들 허진성·허진훈 등 허 회장의 가족들은 약 1.93%를 확보했다. 측근인 박용태 부회장의 지분 4.87%까지 합치면 허 회장의 우호 지분율이 약 18.96%다.
허은철·허용준 형제가 보유한 녹십자홀딩스 지분은 각각 2.6%, 2.91%에 불과하다. 다만 목암연구소(9.79%), 목암과학재단(2.1%)과 미래나눔재단(4.38%)이 보유한 녹십자홀딩스 지분율이 16.27%에 달한다. 고 허영섭 회장이 사재를 출연해 재단·연구소를 설립했다. 허 회장은 사망하기 1년 전 녹십자홀딩스와 녹십자 주식 각각 30만 주, 20만 주를 녹십자재단에 기부했다. 당시 허 회장이 보유한 주식의 60%에 달하는 규모였다. 고 허 회장의 아들인 허은철·허용준 형제의 우호 지분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왼쪽부터 허일섭 녹십자그룹 회장, 허용준 녹십자홀딩스 공동대표, 허은철 녹십자 대표. 사진=GC녹십자 제공
하지만 목암연구소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허은철·허용준 형제는 미래나눔재단과 목암과학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지만, 목암연구소는 허일섭 회장이 이사장을 맡아 장악하고 있다. 2010년 허 회장은 2대 이사장으로 올라선 이후 10년째 녹십자그룹의 연구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허 회장이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목암연구소의 연구개발비는 2010년 569억 원에서 2018년 1459억 원으로 크게 확대됐다. 형제의 우호 지분으로 분류되는 목암연구소가 허 회장 측으로 넘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국민연금공단의 행보도 심상치 않다. 지난 11월 16일 국민연금이 녹십자 지분을 167억 원어치 매입해 지분을 9.12%까지 늘렸다고 공시했다. 특히 투자 목적을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변경했다. 녹십자의 임원 선임·해임, 배당, 정관 변경 등에 개입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국민연금은 녹십자홀딩스 지분도 8.02%를 소유한 대주주다. 추후 경영권 분쟁이 일어난다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한편 2009년 고 허영섭 회장의 타계 이후 유산상속을 두고 가족 간 분쟁이 일어난 바 있다. 허 회장의 장남인 허성수 녹십자 전 부사장이 어머니를 상대로 유언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유언장에 허성수 부사장만 제외한 채 가족과 재단에 재산을 상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 부사장은 법원에서 패소했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