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석에 앉아 있던 두 검사는 자리에 일어나 억울하게 20년 옥살이한 윤성여 씨에게 고개를 숙였다. 검찰이 11월 19일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결심 공판에서 과거 검찰의 잘못을 인정하며 윤 씨에게 무죄를 구형했다. 윤 씨는 재판이 끝난 뒤 “검찰의 사과에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춘재 8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한 윤성여 씨가 11월 19일 결심 공판이 끝난 뒤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윤 씨는 검찰의 사과에 “기쁘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사진=박현광 기자
이날 결심 공판은 8차 사건 피고인이자 재심 신청인 윤성여 씨가 증인석에 앉아 변호인의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1시간 30분여 동안 진행됐다. 변호인의 증인신문이 끝난 뒤 검찰과 재판부는 윤 씨에게 추가 질문을 하진 않았다.
증인신문 과정에서 윤 씨의 기구한 삶이 공개됐다. 윤 씨는 3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윤 씨의 어머니는 3살배기 윤 씨를 강하게 키워야 한다며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고 한다. 윤 씨의 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가정에 소홀했다. 윤 씨와 그의 누이들은 어머니 손에 컸다.
시장에서 채소를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어머니는 윤 씨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이후 윤 씨는 누이와 소식이 끊기며 혼자서 삶을 지탱해야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윤 씨는 중국집에서 두 달, 튀김집에서 한 달 일했지만 몸이 성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마저도 지속할 수 없었다. 윤 씨는 1년 정도 길에서 거지 행색으로 보냈다. 먹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오토바이와 농기구 수리를 배웠다.
몽키나 쇠파이프로 맞아가면서도 악착같이 기술을 배웠던 윤 씨는 1989년 7월 당시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 윤 씨는 경찰 조사를 받던 당시를 회상하며 “다리가 아픈 나에게 경찰이 쪼그려 뛰기를 시켰는데 못 하면 맞았다. 모욕감이 들었다”며 “3일 정도 잠을 못 잤는데, 그러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게 된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평생 한 번도 겪지 않아도 될 일을 인생에 걸쳐 여러 번 겪었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억울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느냐?’는 물음에 “억울한 생각도 한다. 하지만 그 당시 시대가 나를 그렇게 만든 거 같다. 경찰 조사 당시 내가 안 했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죽었으면 나는 이 자리에 서 있지도 오늘 이 재심이 열리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답했다.
이어 윤 씨는 당시 자신을 검거해 특진한 경찰을 용서한다고 말했다. 윤 씨는 “성경 구절에 용서라는 말이 항상 나온다. 만 번이고 백만 번이고 용서하라고 나온다. 그때 그 경찰들을 용서한다”고 전했다. 윤 씨는 청주교도소에서 20년 복역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됐다.
윤 씨는 또 교도소 안팎에서 자신을 믿어줬던 교도관과 수녀님, 형사 등에 고마움을 전했다. 윤 씨는 “나의 억울함을 믿어준 사람에게 의지했고, 힘이 됐다. 평소에 잘 표현하지 않지만 항상 감사하다”고 말했다.
윤 씨는 30여 년 전 경찰과 검찰 조사, 1심 재판에서 자신이 범인이라고 자백한 점과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자신의 체모가 일치한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정 결과를 근거로 범인으로 지목됐다. 하지만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공판이 10차례 진행되는 동안 윤 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는 증언과 증거가 이어졌다.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형사 가운데 심 아무개 형사는 증인으로 나와 윤 씨의 자필진술서를 조작한 점을 인정하고, 윤 씨의 피해자 박 아무개 양의 집 담을 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춘재 또한 법정에서 자신이 8차 사건의 진범이라고 증언하며 윤 씨에게 사죄했다. 당시 윤 씨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체모 감정 결과도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춘재 8차 사건은 1988년 9월 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집에서 자고 있던 중학교 2학년 박 아무개 양이 강간·살해당했다. 윤 씨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09년 8월 20년 만에 가석방됐다. 윤 씨는 이춘재가 8차 사건을 자신이 했다고 자백한 뒤 2019년 11월 13일 수원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이춘재 8차 사건 재심 선고는 오는 12월 17일이다.
수원=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