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소속이 아닌 현직 검찰총장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높은 지지율을 보이며 야권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윤석열 현상’이 제1야당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대로 가다가는 보수정당의 ‘10년 설움’을 또 겪을 것이란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11월 1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주호영 원내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감독의 작전 문제?
국민의힘 한 현역 의원은 “우리 당에 대선 전략이 과연 있느냐”고 되물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는 이래서 안 되고, △△는 저래서 안 된다”며 기존 잠룡들에게 모두 퇴짜를 놓은 바 있다. 그 말을 믿고 여름 가을을 보냈는데, 겨울 문턱에 오니 “기존 주자들도 알고 보니 사람 괜찮네”라고 말이 바뀌더라는 것이다.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최근 나타난 ‘윤석열 현상’이 김종인 비대위원장의 작전 판단 미스가 불러낸 실책이라고 지적한다. “뭔가 보여주겠다”더니 공갈포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제 탄로 났고, 결국 보수지지 세력이 새로운 대안을 찾아 윤석열 검찰총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당내에서는 ‘윤석열 현상’에 우려를 나타낸다. 국민의힘을 향해 적폐 수사의 칼날을 겨눴던 윤 총장은 도저히 국민의힘과 한식구가 되기 어려운데, 윤 총장이 야권 유력주자로 거론되면서 국민의힘 잠룡들에 대한 관심을 모두 싹쓸이해가고 있다는 이유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대안 인물을 내세우지 못하는 야권의 무기력함을 적나라하게 보여드려 제1야당 의원으로서 송구하다”고 말했다. 김종인 위원장에 대해 연일 날을 세우는 장제원 의원도 “윤석열 대망론을 키워준 쪽은 문재인 정권이고, 날개를 달아준 쪽은 지리멸렬한 야권이다. 여든 야든 빨리 정신 차리지 않으면 윤석열의 마법이 차기 대선 정국을 완전히 휩쓸어 버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대에 대한 김 위원장 오판 역시 연거푸 작전 실패를 하는 원인으로 지목된다. 국민의힘 텃밭인 TK(대구·경북) 한 의원의 토로다.
“정치는 상대를 두고 하는 것이다. 상대가 지리멸렬 상태라면 경제학자인 김종인 위원장이 ‘경제민주화를 해야 한다,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등 툭툭 던져대는 말이 국민들에게 먹힌다. 그런데 지금 국민의힘이 상대하고 있는 민주당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다. 깔보면 큰일 난다. 우리의 맞상대는 전 국민에게 재난지원금을 나눠 주고 1년에 몇 차례씩 추경을 하면서 국민들 주머니에 직접 돈을 주고 있다. 돈 주는데 안 좋아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나. 그런데 김 위원장 작전 방향은 상대 작전과 비슷한데 강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낮다. 저쪽 투수를 보면서 우리가 뛰어야 하는데 투수는 보지 않고 ‘내가 잘 달리니까 괜찮아’하면서 무작정 뛰는 식이다.”
홍준표 무소속 의원도 11월 14일 자신의 SNS에 “선거 기본은 아군 강화와 상대 진영 공략인데, 아군은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고 상대 진영만 힐끗힐끗 넘보는 방책은 자멸의 길”이라며 김 위원장을 향해 공격의 화살을 날렸다. 민주당과 유사한 정책만 앞세우는 김 위원장의 작전이 제1야당의 득점력만 떨어뜨리고 있고 지적한 것이다.
강약을 구분하지 못하는 교수·관료 출신의 한계가 투쟁적 야당의 대담한 작전 지시를 못 이끌어낸다는 의견도 많다. 최근 펀드 사태는 특검을 이끌어내야 했지만, 국민의힘이 결기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스스로 공격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2년여 전 김성태 당시 원내대표가 단식 투쟁 끝에 드루킹 특검을 받아내,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인 김경수 경남도지사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입힌 것과 대조적인 장면이다.
#투톱 손발도 안 맞아
일심동체가 돼도 ‘공룡 여당’을 이길까 말까인데 국민의힘은 최근 자중지란을 보이고 있다. 특히 당을 이끌고 있는 투톱, 김종인 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의 의견 차이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중이다.
‘김해신공항 백지화’ 결정에 대해서도 두 사람의 입장은 극명하게 나뉘었다. 김종인 위원장은 ‘김해공항 확장 백지화’ 결론이 도출된 11월 17일 동남권 신공항 입지선정과 관련해 기자들과 만나 PK(부산·울산·경남)이 주장하고 있는 가덕도를 적극 검토할 수 있다는 상황인식을 보였다.
반면 대구가 지역구인 주호영 원내대표 생각은 달랐다. 그는 “주요 국책사업의 일관성과 절차준수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월성 원전 1호기(조기 폐쇄) 문제와 판박이로 감사원 감사를 통해 사업 변경이 적절했는지 반드시 따져보는 과정을 거치도록 하겠다”며 반대 기류를 분명히 했다.
또한 “이낙연 전 국무총리(현 민주당 대표)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은 일관되게 김해공항 확장에 문제가 없고 (추진)하겠다고 했는데, 내년 4월 부산시장 선거를 앞두고 어떻게든 득을 보려고 무리하게 변경을 추진한 것 같다”고 받아쳤다.
김 위원장이 PK 편을 들고 나선 것은 내년 4월 보궐선거에 전력을 다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만 반영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여당의 국민의힘 ‘내부 갈라치기’ 시도가 이미 예고된 것이었는데 김 위원장이 사전에 이에 대한 대비를 게을리 했고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고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재선 의원은 “김 위원장은 자신이 지금 이 당의 주인인지, 손님인지를 잘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당의 핵심 지지 세력인 TK와 PK의 갈등이 일어나면 당이 공중 분해되는 것인데도 심각성을 인식 못한다. 이런 사안은 김 위원장이 직접 나서 당 내부의견 조율을 하고 사전에 방어책을 마련했어야 하는데 아무런 대비도 안하고 있다가 올 것이 온 격”이라고 한탄했다.
이어 김 위원장과 주 원내대표는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 당이 사과를 해야 하느냐 신중해야 하느냐’를 두고도 다른 의견을 노출했다. 김 위원장은 11월 17일 의원총회 후 기자들에게 “비대위원장으로 올 때부터 누누이 (대국민 사과) 얘기를 해왔는데 이제는 시기적으로 판단해야 할 시점이다. 시기와 방법은 내가 알아서 정할 것”이라고 의중을 밝혔다.
하지만 주 원내대표는 “상대방이 집요하게 공격하는 마당에 이제 와서 사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오히려 ‘상대방의 낙인찍기에 빌미만 제공하는 것 아니냐’고 반대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고 신중론을 폈다.
장제원 의원도 주 원내대표 의견에 힘을 실으며 또다시 김 위원장을 겨냥했다. 그는 11월 18일 자신의 SNS를 통해 “지금 우리가 집중할 일은 사과보다는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이다. 국민들은 말로 하는 사과보다 제대로 된 야당의 역할을 바라고 있다”고 꼬집었다.
서울 국회 앞 태흥빌딩 ‘희망 22’ 사무실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유승민 전 의원. 사진=국회사진취재단
#희생번트는 도대체 누가?
11월 들어 국민의힘 초선 의원 중심으로 “내년 서울시장 선거는 대선 승리의 디딤돌인 만큼 디딤돌부터 확실히 놓고 가보자”는 목소리가 나왔다. 내후년 대선을 볼 것이 아니라 내년 서울시장 선거부터 반드시 잡고가자는 것이다.
때문에 초선 의원들은 대선주자로 언급되는 유승민 전 의원과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대권이 아닌 서울시장으로 체급을 낮춰 필승 주자로 출전해야한다는 의견을 내놨다. 초선인 박수영 의원은 11월 16일 SNS를 통해 “소위 우리 당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분 중 그간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았던 분들은 서울시장 출마부터 하시길 바란다”고 공개 요구하기도 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도 11월 17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보궐선거 후보와 관련해 “선거라는 것이 금방 하늘에서 인물이 뚝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 후보군으로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 사람이 다크호스로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언급, 기존에 지명도가 있는 정치인이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야 이길 수 있다는 뜻을 드러냈다.
하지만 초선 의원들이 지목한 ‘희생타 후보들’은 모두 손사래를 치고 나섰다. 대권이 꿈이지 서울시장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11월 18일 사실상 차기 대권 도전을 선언한 유승민 전 의원은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차출론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다”고 일축했다. 그는 이날 시종일관 서울시장 출마에 대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럴 가능성이 없다”며 여러 차례 불출마를 강조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도 마찬가지. 그는 11월 15일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 인터뷰에서 ‘당에서 서울시장 출마를 부탁할 경우 직접 나설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에 “농부가 내년 봄에 파종해야 1년 뒤에 큰 수확을 하는데 겨울에 배가 조금 고프다고 해서 종자 씨를 먹어버리면 1년 농사를 어떻게 짓겠느냐”며 서울시장에 다시 나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국민의힘 한 초선 의원은 “모두가 4번 타자로 나서 홈런만 치겠다고 하면 희생번트, 희생플라이는 누가 치면서 득점권에 주자를 내보내느냐. 우리 당 내부 리더십이 무너져있다 보니 정당 내부 분업 구조가 없는 것 같다. 민주당이 파죽지세로 들어오는데 우리는 내부에서 스스로 둑을 무너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