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등법원 행정3부는 울산 지역 항만 하역 작업 인력을 공급하는 기존 울산항운노조(울산항노)가 독점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생 온산항운노조(온산항노) 영업을 방해했다는 공정위의 판단을 뒤엎는 판결을 냈다. 2019년 1월 16일 신생 온산항운노조가 울산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존 울산항운노조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려고 하자 울산항운노조 조합원이 이를 제지하며 승강이가 일어나고 있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공정위는 2019년 5월 23일 울산항노에 공정거래법 23조(불공정거래행위의 금지)를 위반했다며 과징금 1000만 원을 부과했다. 당시 이 사안은 노조가 공정위 제재를 받은 첫 사례로 주목받았다.
신생 온산항노는 2016년 7월 8일 글로벌과 하역 작업 근로자 공급 계약을 맺고 7월 11일부터 울산 세진중공업 내 하역 부두에 들어오는 선박의 화물 하역 작업을 하기로 했다. 이에 울산항노 조합원들은 2016년 7월 12·13·17·18·20일 등 5일간 온산항노 조합원들이 하역 작업을 못 하도록 막았다. 울산항노 조합원들은 영업방해로 벌금형을 받았다.
당시 울산항노 조합원들은 온산항노가 글로벌과 계약을 맺은 사실을 몰랐고 기존에 자신들이 하던 일이라 온산항노 조합원들의 작업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울산항노 또한 당시 글로벌과 근로자 공급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계약은 보통 1년 단위로 이뤄지는데, 울산항노는 글로벌과 2015년 10월 1일부터 2016년 9월 30일까지 계약을 맺고 있었다.
항만 하역 작업은 선박의 화물을 부두에 내리거나 부두의 화물을 선박에 싣는 작업이다. 항만 하역 사업은 다른 사업과 다르게 특이한 점이 있다. 노조가 일용직 인력 공급권을 독점으로 갖는다. 이는 직업안정법 33조에 근거한 권리로 글로벌과 같은 선박운항업자는 노조와 계약을 맺고 인력을 공급받아야 한다. 일용직 근로자 또한 노조에 가입해야 하역 작업 일을 맡을 수 있다. 항운노조는 사실상 인력 공급을 담당하는 사업자로서 역할을 하는 셈이다.
공정위는 온산항노의 계약 사실을 몰랐다는 울산항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생 노조가 계약을 따냈다는 사실이 이미 언론에 보도됐고, 울산항노가 온산항노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울산항노가 온산항노의 계약 사실을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서울고법 재판부는 공정위와 완전히 결을 달리하는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일단 울산항노 조합원들이 온산항노 조합원들의 작업을 방해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미래 사업 활동을 심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사업 활동 방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 이어 재판부는 선박운항업자 글로벌이 높은 가격 협상력을 얻고자 양 노조와 계약함으로써 노조 사이의 갈등을 유발했다고 판단했다.
23일 부산 감천항에 정박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 화물선인 A호. 이 배 선장 등 16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으며 하역 작업을 위해 배에 올랐던 부산항운노조 조합원 등이 격리되기도 했다. 사진은 기사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사건 발생 3주 전인 2016년 6월 24일 글로벌은 울산항노와 다음 해 계약을 두고 협상하는 과정에서 톤당 금액 산정 방법을 정액제 방식으로 전환해달라고 요구했다. 기존 거래는 대부분 화물 무게에 따라 금액을 정했다. 선박운항업자는 항운노조에 작업량만큼 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컸다. 이를 일정 기간 동안 일정 금액을 내는 정액제로 바꿔 달라는 말이었다. 작업량과 관계없이 지불하는 금액이 같기 때문에 선박운항업자에게 유리한 거래 방식이다.
울산항노는 글로벌의 제안을 거절했고, 글로벌은 이에 2016년 7월 8일 온산항노와 정액제 방식으로 계약했다. 글로벌은 온산항노 조합원들이 울산항노 조합원들에 가로막혀 일을 하지 못하자 7월 20일 온산항노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음 날인 7월 21일 울산항노와 정액제 방식을 관철해 근로자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결국 글로벌이 애초 원하던 대로 된 셈이다.
여기서 재판부가 주목한 점은 글로벌 직원이 울산항노 조합원들과 온산항노 조합원들이 대치하던 현장에 있었음에도 울산항노 조합원들에게 글로벌이 온산항노와 계약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재판부는 이 점을 근거로 글로벌이 고의로 양 노조의 갈등을 부추겼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글로벌이 양화장치(하역기기) 기사를 보유하지 않은 온산항노와 계약한 사실도 수상히 여겼다. 양화장치 기사의 능력에 따라 인적·물적 손실이 발생할 정도로 양화장치 기사는 하역 작업에 필수 인력으로 꼽힌다. 하지만 글로벌이 양화장치 기사가 없는 온산항노와 계약한 것을 미뤄 재판부는 글로벌이 온산항노와 계약을 장기간 유지하고자 생각하기 어렵다고 봤다.
해상크레인으로 하역 작업을 하는 모습. 대우조선해양에서 새로 건조한 2만 4000TEU급 컨테이너선 알헤시라스 호가 부산 신항 4부두에서 해상크레인 이용 하역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사진=연합뉴스
재판부는 공정위의 과징금 처분이 위법하기 때문에 취소하라고 명령했다. 물론 이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기까지는 아직 두고 봐야 한다. 두 노조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공정위가 상고를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당시의 온산항노 관계자는 “글로벌이 당시 현장에서 교통정리를 해주지 않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1차적 책임은 여전히 울산항노에 있다.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조합원을 막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울산항노 관계자는 “당시 현장에 있던 조합원들은 온산항노와 글로벌이 계약한 사실을 몰랐다. 우리가 하던 일을 온산항노 조합원들이 하려고 하기에 막은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상고를 하기 위해선 고검의 수사 지휘를 받아야 한다. 고검에 수사 지휘를 요청해둔 상태다. 상고를 할 계획”이라며 공정위의 판단과 완전히 다른 판결이 나온 것에 대해선 “대법원의 판단을 지켜보겠다”고 답했다. 글로벌은 여러 차례 연락에도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