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의 문인 이옥(李鈺·1760~1812)이 지은 글 가운데 한 구절이다. 오늘날은 담배가 국민 건강을 해치는 주범의 하나로 낙인 찍혀있지만 애연가들의 마음은 지금도 이옥의 마음과 같을지도 모른다.
담배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인 1600년 초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을 통해 들어온 담배는 빠른 속도로 보급돼 장유(張維·1587~1638)의 <계곡만필>에 보면 ‘위로는 공경부터 아래로는 하인, 종, 나무꾼에 이르기까지 아니 피우는 자가 없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 남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여자들도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옛날 양반가의 마님이 나들이를 할 때는 반드시 담뱃대를 든 담배 전담 여종이 뒤를 따랐다고 한다.
잘게 썬 담배 잎을 종이에 만 지금의 궐련이 나오기 전까지 담배는 담뱃대에 넣어 피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나오는 모습처럼 30~40년 전 만해도 시골에 가면 흰 두루마기를 입은 할아버지들이 안방에서 화로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아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며 놋쇠 재떨이에 땅땅 담뱃재를 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연죽(煙竹) 연관(煙管)이라 불렸던 담뱃대는 대통(안수·雁首), 설대(연도·煙道), 물부리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부러진 끝에 담배를 담는 쇠로 만든 작은 통이 붙어 있는 것이 대통으로 연기가 통하도록 바닥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설대에 이어져 있으며, 연기를 빠는 부분인 물부리는 입에 물기 편리하도록 끝으로 갈수록 가늘다.
담뱃대는 크게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50㎝ 남짓한 길이의 곰방대와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긴 담뱃대, 즉 장죽(長竹)으로 나뉘기도 한다. 특히 양반들이 사용하던 긴 담뱃대는 멋을 더해가면서 그 길이가 길어지며 흡사 신분의 상징처럼도 여겨져 일부 양반들은 하인이 불을 붙여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긴 담뱃대를 쓰기도 했다.
▲ 담뱃대는 크게 일반인들이 사용하던 50cm 남짓한 길이의 곰방대(사진)와 양반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긴 담뱃대인 장죽으로 나뉜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지금 남아 있는 것들 중에는 담뱃대 길이가 작고 깜찍한 기생용 담뱃대, 상감을 넣어 만든 정교한 양반용 담뱃대, 여성의 유두처럼 생긴 안방마님의 옻칠재떨이 등도 있어 당시 담배에 얼마나 멋을 부렸는지 알 수 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러한 양반들의 사치풍조를 쇄신하기 위해 장죽의 길이를 반으로 줄이라고 명한 일도 있을 정도였다.
담뱃대 가운데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백동연죽(白銅煙竹)이다. 조선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임원경제지>에 ‘사치를 다투는 자들이 백동과 오동으로 담뱃대를 만들어 금과 은으로 치장하니 담뱃대 한 개에 200~300전에 이르렀다’라고 쓰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백동연죽은 당시 부의 상징이었던 듯하다.
백동은 구리합금의 일종인데 여기에는 니켈이 들어가 흰빛을 띤다. 오동 역시 구리합금으로써 금을 넣어 검은 빛을 띠는 것을 진오동(眞烏銅)이라 하고, 은을 넣어 합금한 것은 그것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여 가오동(假烏銅)이라 일컫는다.
담뱃대에 아무런 무늬가 없이 만든 것을 민죽이라 하며 모양을 내기 위해 글자를 넣은 것은 그 내용에 따라 희문죽(禧文竹), 수문죽(壽文竹) 등으로 부르고 무늬를 넣은 것은 그 무늬에 따라 태극죽(太極竹), 송학죽(松鶴竹) 등으로 불렸다.
현재 백동연죽을 만드는 장인은 1980년 중요무형문화재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