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연극영화계 ‘미투’ 논란 이후 칩거에 들어갔던 배우 오달수가 11월 25일 개봉하는 영화 ‘이웃사촌’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선다.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제공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달수의 앞에는 펜과 노트가 놓여 있었다. 기자가 질문을 하면 곧바로 노트에 받아 적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을 하는 식이었다. 말을 골라내려 애쓰는 듯한 모습이 이따금 비치기도 했다.
“사실 지금도 많이 떨립니다. 과거에는 인터뷰를 좀 즐기는 편이었어요. 기자들과 만나서 작품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인생 이야기도 하고 이것저것 말도 나누고 그러니까.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았는데 이번에는 떨리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아요.”
오달수는 2018년 2월, 연극계 여성 후배라고 밝힌 한 네티즌의 “1990년대에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는 폭로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오달수는 첫 번째 입장문을 통해 “제기된 주장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라며 부정했으나 이후 또 다른 여성 후배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공개하고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자 두 번째 공식입장을 냈다. ‘사과문’이었다. 다만 모든 폭로 내용을 인정한다는 게 아니라 선명하지 않은 과거 기억 속 서로간의 오해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뉘앙스가 대중의 더 큰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이 사과문을 마지막으로 오달수는 2018년 3월부터 칩거에 들어갔다. 부산 자택에 기자들의 방문이 이어지자 거제도로 몸을 옮겼다. 그곳에서 오달수는 가족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살던 중 이듬해인 2019년 초 경찰로부터 ‘혐의없음’으로 내사 종결됐다는 처분 결과를 받았다. 이미 공소시효가 끝난 사안이며, 피해자들이 폭로 이후에도 피해 사실을 소명한 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오달수로 인해 개봉이 미뤄졌던 작품들이 서둘러 일정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11월 25일 개봉하는 영화 ‘이웃사촌’이 그 시작이다.
영화 ‘이웃사촌’에서 오달수는 야당 대권인사 이의식 역을 맡았다. 암울했던 1980년대를 실제로 경험한 기억이 연기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사진=씨제스엔터테인먼트 제공
1980년대 암울했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이웃사촌’ 속 오달수는 야당의 대권주자 이의식 역을 맡았다. 정부와 보수 여당의 견제로 가족까지 전원 자택연금을 당한 상태에서도 그나마 이웃사촌이면서 그를 감시하고 있는 도청팀장 유대권(정우 분)과 이웃의 정을 나누려 하는, 유명 정치계 인사이면서도 동네 아저씨 같은 푸근함을 겸비한 인물이다. 타의에 의해 갇혀 있어야 하는 의식과 본의 아니게 사회를 등져야 했던 오달수의 상황이 다소 맞물려 보인다는 점이 아이러니하지만, 오달수는 그런 지점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일축했다.
“저는 그냥 영화는 영화로 봤어요. 영화 속 상황은 사실 저와는 전혀 다른 거니까, 그런 상황 속에 빠져 들어서 영화를 보는 거지 굳이 자기 연민에 빠져서 ‘나라면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은 해 보지 않았어요. 영화 속 의식을 보면 엄청나게 외로웠을 것 같아요. 가족들과 같이 지내고 있지만 그가 해야 할 일, 그가 항상 꿈꾸고 있는 것들, 꿈꾸는 사회 그런 것들을 다 접어야 하고, 누군가 화장실까지 도청하고 있는 것마저 참아내야 하는 상황에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만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극명한 믿음이 있어서 버틴 게 아니었을까 싶죠.”
영화 ‘이웃사촌’ 스틸 컷.
극 중 의식은 암울한 나라를 구원할 ‘백마 탄 초인’처럼 여겨지는 인물이다. 1980년대 당시 상황을 실제로 겪었던 오달수에겐 이의식이라는 캐릭터와 이 작품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 역시 초인을 간절히 바랐던 경험이 있어서다.
“옛날엔 참 어이없는 일들이 많았죠. 제가 87학번인데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거리로 나갔다가 한 번 잡혀서 한 3일 정도 구류된 적이 있어요. 그땐 진짜 막 잡아가던 때인데 제가 경찰서에 가 보니까 너무 많이 잡혀 와서 앉을 데도 없더라고요. 폭력을 쓰고 그런 사람들을 잡은 게 아니라 장애인도 있고 정말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사람도 있고…. 참 이게 나란가 싶더라고요. 너무 암울했던 시기였지만 저는 그때도 꼭 지금 같은 세상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어요. 꼭 올 거다, 이런 시대는 막을 내려야 한다는 게 우리 생각이었거든요. 그랬기 때문에 그때 다 길거리로 나왔던 거예요. 그 해엔 안 나온 사람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게 의식의 역할을 연기한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게 됐죠.”
문득 그때나 지금이나 오달수를 밖으로 향하게 하는 용기의 원천이 궁금해졌다. 질문을 받고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조심스럽게 노모의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가 올해 여든여섯이세요. 제가 매일 한 번씩 전화를 드리는데, 안 드리는 날에는 어머니가 저한테 전화를 하시죠. 오늘처럼 인터뷰 하는 날이면 ‘이런 이야기는 하고, 이런 이야기는 하지 마’ 하세요. 그러면 저는 내가 알아서 할 게 하고 짜증을 내다가도 어머니는 건강이나 조심해! 이러고 말죠(웃음). 어머니도 그저 여긴 비 많이 오는데 거기도 많이 오냐 이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하실 수 있으시겠지만 그것보단 자식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그런 것에 짜증을 냈다가도 참 죄스럽다는 생각, 후회를 하게 돼요. 사실 그게 저를 지탱하게 만드는 힘인데…. 가족들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이 일종의 기도처럼 제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그걸 기적처럼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