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맨의 역할이 기업의 ‘홍위병’ 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때가 있었다. 기업과 오너의 방패역할에 그쳤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2000년 이후 삼성, LG, 현대자동차 등 대재벌 기업에서 홍보맨들이 줄줄이 최고 경영자의 위치에 오른 것도 홍보맨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한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런 점에서 90년대 초반 등장한 현대그룹 문화실은 홍보맨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한 케이스일 것이다. 기업문화를 보다 적극적으로 외부에 알리는 역할을 해낸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문화실이 존속했던 기간은 90년 9월부터 세칭 왕자의 난이 터진 2000년 초반까지 10년 정도였다. 2000년 초반 현대그룹이 왕자의 난으로 해체되면서 문화실은 이름을 PR사업본부로 바꿨다.
어쨌든 이 기간동안 실장을 지낸 사람은 두 명이었다. 초대 실장은 이병규 현 문화일보 사장이었고, 2대는 이영일 현 KCC 홍보고문이었다. 이들은 현대그룹 역사에서 가장 큰 격동기를 몸소 겪은 주인공들이기도 했다.
초대 문화실장인 이병규 사장은 문화실이 출범한 90년 9월부터 91년까지 실장을 맡았다. 그는 91년 말 정주영 명예회장이 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계에 투신하자 곧바로 그를 따라 정계로 진출했다. 당시 국민당에서 그가 맡은 것은 대표최고위원 비서실장 겸 대표 특별보좌역이었다.
서울고를 졸업한 이 사장은 77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온 뒤 곧바로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부터 정주영 명예회장의 비서로 일한 이 사장은 정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으면서 초고속 승진했다. 현대그룹 내에서는 이 사장을 이명박 서울시장 이후 가장 정주영 명예회장의 총애를 받은 경영인으로 꼽고 있다.
온화한 성격의 이 사장은 정 명예회장의 그림자 비서답게 입이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정 명예회장과 현대그룹의 비밀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92년 대선을 앞두고 정계에 진출, 국민당 창당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정치인 정주영을 옆에서 지켰다. 그러나 그는 92년 선거에서 패배한 뒤 한동안 잠적하기도 했다. 당시 대선자금 조성과 관련해 개입한 의혹을 받았던 때문이었다.
다른 얘기지만 이 사장이 곤욕을 치를 무렵, 현대그룹의 핵심 경영인이었던 박세용 전 현대상선 사장 등 상당수 그룹의 핵심 경영인들이 비자금 문제로 검찰에 구속되거나 수사를 받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선 이후 무려 2년 넘게 잠적해 있던 그는 94년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발탁되면서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당시 그의 문화일보 부사장 발탁을 두고 재계에서는 이 사장과 절친했던 정몽준 의원의 배려가 작용했다는 분석이 오갔다. 실제로 이 사장은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발탁된 이듬해인 95년 현대중공업이 대주주인 서울중앙병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겨 이같은 분석을 뒷받침하기도 했다.
이 사장은 98년 현대백화점으로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당시 그가 현대백화점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재계에서는 정 명예회장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얘기가 오갔다. 계열분리를 앞둔 현대백화점의 과도기 경영을 그에게 맡긴 것이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그는 현대백화점에 근무하면서 케이블방송인 현대홈쇼핑을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곧 물러나야 했다. 오너 일가와 뜻이 맞지 않은 것이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병규 사장에 이어 2대 문화실장을 맡은 이영일 KCC 고문은 약 8년동안 현대그룹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서울대를 나온 이 고문은 언론인 출신. 그는 80년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그룹통합홍보실 시절부터 그룹홍보를 맡았던 이 고문은 91년 이병규 실장이 떠난 뒤 문화실 실장을 맡게 됐다.
문화실장 재직 시절 이 고문은 하루에 평균 50명 이상의 내외신 기자들을 만나는 것으로 유명했다. 현대그룹의 규모에 비춰 하루에 찾아오는 손님이야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지만 이를 마다 않고 접대할 수 있는 정력도 대단한 것이다.
이 고문은 98년 재계에서는 홍보맨으로는 드물게 부사장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물론 이 고문에 앞서 SK그룹에서는 최시호 부사장이 홍보맨으로 부사장급에 기용되긴 했으나 최 부사장은 건강상의 문제로 홍보실을 떠난 뒤에 진급한 것이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선에 패배하고 직후 YS정부 시절 현대그룹은 1천1백억원대에 이르는 사상 최대 규모의 세금추징을 받았다. 이 문제로 당시 현대그룹은 휘청거렸다. 이 때 문화실의 역할은 매우 컸다. 현대그룹에 대해 쏟아지던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는데 문화실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렇다고 문화실이 아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말 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할 때 문화실은 감격을 누렸다. 문화실 출신 인사들은 지금도 그 때의 감격을 잊지 못한다.
이 고문이 가장 큰 아픔을 겪은 때는 2000년 초반이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MK)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MH)간에 벌어진 세칭 왕자의 난은 현대그룹 홍보사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겼다.
왕자의 난이 끝나면서 문화실도 사실상 해체됐다. 이 고문을 비롯한 문화실의 핵심 멤버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 고문도 2000년 6월 문화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화실의 이름은 PR사업본부로 바뀌었고, 본부장은 김상욱 현 현대카드 전무가 맡았다.
PR사업본부는 나중에 사실상 해체되면서 2003년 현대엘리베이터와 KCC간 경영권 분쟁이 발발할 즈음에 정몽헌 회장 계열인 현대상선 소속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 조직에는 문화실 멤버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다.
2000년 중반 이후 문화실을 떠난 현대그룹 홍보맨들은 한동안 야인으로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그후 왕자의 난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현업에 복귀하기 시작했다.
이영일 고문은 KCC 홍보고문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상욱 전무는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인 현대카드로 이동했다. 김봉경 상무는 기아자동차의 홍보실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이광석 상무는 현대산업개발 상무로 재직중이다.
문화실 출신 인사들 중 일부는 다른 기업으로 스카우트돼 간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B건설사로 갔던 A씨는 최근 B건설이 정치자금 문제로 검찰 수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퇴직했다.
어쨌든 90년에 탄생한 현대그룹 문화실은 10년 만에 사라졌다. 현대그룹사에서 가장 격동기로 평가되는 90년대를 목격한 문화실. 현대그룹의 흥망을 현장에서 지켜본 문화실은 재계의 또다른 전설로 남아 있다.
정선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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