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에서 바라본 서울 강북의 빌딩숲. 사진=최준필 기자
최종적으로 무산되긴 했지만 지난해 6월 진행된 게임회사 넥슨의 지주회사 NXC 매각은 이 같은 트렌드를 여실히 보여줬다. NXC 매각 딜에는 MBK파트너스와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 베인캐피탈 등 다수의 사모펀드가 뛰어들었는데 전략적 투자자(SI), 즉 실제로 게임업을 계속할 생각이었던 인수 후보자는 카카오와 넷마블 등 소수에 그쳤다. 카카오와 넷마블마저 자금이 충분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만약 우선협상대상자에 선정되면 추가로 사모펀드와 손을 잡을 계획이었다. 한 관료는 당시 “사모펀드가 세상을 완전히 장악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모펀드의 독식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4년만 해도 경영참여형 사모펀드인 PEF가 투자한 기업은 93개사였으나 지난해 말엔 500곳으로 증가했다. 투자금액 역시 4조 9000억 원에서 16조 원으로 늘었다. 운용자산이 20조 원이 넘는 MBK파트너스와 한앤컴퍼니는 ‘유사 재벌’로 불리고 있고, IMM인베스트먼트의 경우 실제 지난 5월 사모펀드 운용사 중에서는 최초로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포함됐다.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포함되면 내부 거래를 신고해야 하고, 총수일가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게 된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다른 사모펀드들도 펀드의 지배자가 소수에 그치면 마찬가지로 공시대상기업집단에 포함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올해는 대기업과 콜라보가 대세
그런데 올해 들어서는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사모펀드 홀로 인수전에 뛰어들기보다는 기존 재벌의 손을 잡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두산솔루스는 진대제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이끄는 스카이레이크가 인수하는 것 같았으나, 주력 출자자는 롯데였다. 두산솔루스 인수대금은 6900억 원인데, 이 가운데 3000억 원을 롯데그룹이 부담했다. 롯데그룹은 직접 인수전에 나설 경우 몸값이 더 뛰어 오르는 등 부작용이 나타날까봐 스카이레이크의 뒤에 숨은 것으로 추정된다.
두산솔루스 본사 전경. 사진=최준필 기자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선 사모펀드를 손잡은 재벌가들이 유력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현대중공업지주는 KDB인베스트먼트와 함께 뛰어들었고, GS건설은 도미누스인베스트먼트와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이 외에도 한진칼의 아시아나항공 인수전에 KDB인베스트먼트가 함께 출격할 것으로 예상된다. 좌초되긴 했으나 앞서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추진하던 HDC현대산업개발도 미래에셋금융그룹이 조성하는 사모펀드와 함께 아시아나를 인수할 계획이었다.
M&A 전문가들은 지난해 5월 롯데카드 인수전 때부터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당시 롯데그룹은 금융계열사를 팔아야만 했던 상황이라 롯데카드를 매물로 내놨다. 당초 우선협상대상자는 한상원 대표가 이끄는 한앤컴퍼니로 정해졌다. 한앤컴퍼니는 인수가격을 1조 8000억 원가량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 대표가 다른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자 금융위원회는 한앤컴퍼니의 롯데카드 인수 승인을 차일피일 미뤘다. 금융회사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기 때문에 금융위 승인을 거쳐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우선협상대상자는 1조 6000억 원가량을 제안한 MBK-우리은행 컨소시엄으로 바뀌었다. MBK 컨소시엄은 기존 금융회사인 우리은행이 주도한 것이 긍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M&A업계 관계자는 “사모펀드 단독보다는 컨소시엄 형태가 유리하다는 것이 이때부터 확연해졌다”고 설명했다.
#체질 개선하고, 재매각 우려 줄이고
재벌과 사모펀드의 제휴는 양측 모두 뚜렷한 장점이 있다. 일단 재벌가는 돈이 부족하다. 그룹 체질을 개선하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니 사모펀드와 손을 잡고 추진하는 것이다. 특히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 나란히 뛰어든 현대중공업과 GS는 현 오너 2세인 정기선 현대중공업지주 부사장과 허윤홍 GS건설 사장이 주도하고 있어 눈길을 끌고 있다. 아버지 세대의 회사를 뿌리부터 뜯어고치고 싶은 2세들은 그만큼 대형 M&A를 위해 계속해서 사모펀드와 손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사모펀드는 대기업과 손을 잡음으로써 태생적 약점을 상쇄할 수 있다. 일단 사모펀드는 언젠가는 또 다시 파는 존재다. 인수 후보로서 큰 매력이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정부는 매각 작업을 진행할 때 사모펀드 단독으로 신청한 후보자는 가장 높은 가격을 써내도 탈락시킨다. 아시아나항공 매각 때는 아예 사모펀드 단독 응찰은 거부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기업과 손을 잡으면 안정적인 운영을 할 것이라는 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 대기업과 사모펀드 컨소시엄은 추후 단계적으로 대기업이 펀드의 지분을 인수해가는 구조일 때가 많다는 점도 정부 입장에서는 긍정적이다. 다시 M&A 시장에 등장하기보다는 한 주인이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정부는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한 고위 공무원은 대기업과 사모펀드 컨소시엄이 상당히 좋은 모델이라고 설명한다. 정부는 각종 경제 정책을 추진할 때 기업의 배려를 요청할 때가 많다. 하지만 기업 주인이 사모펀드라면 손을 내밀기 쉽지는 않다. 사모펀드는 다수의 투자자가 있어 손실 가능성이 명백한 결정을 내릴 때는 ‘배임 가능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올해 정부가 사회적 거리두기와 관련해 식음료 및 유통업체들에 양해를 구할 때 요식업체를 다수 거느린 일부 사모펀드가 거세게 저항했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반대로 대기업 소속의 유통업체들은 정부와 각을 세워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순순히 따르는 때가 많다.
#“땅 짚고 헤엄친다” 비판 목소리도
사모펀드에 대해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모펀드들이 대기업 뒤로 숨는 이유 중 하나다. 사모펀드는 대기업과 달리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을 받지 않아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사업한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앤컴퍼니가 대표적인 사례다. 한앤컴퍼니는 2014년 한진해운의 벌크선 사업부 인수, 2017년 SK엔카직영 인수, 2018년 SKD&D 지분 인수와 CJ그룹의 조이렌터카 인수, 2020년 대한항공 기내식 사업부 인수 등 대기업이 각종 규제나 재무위기 때문에 급히 사업부를 팔아야 할 때 기다렸다는 듯 등장하며 몸집을 불렸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이 아니다 보니 매각 기업과 지속적으로 거래하면서 앉아서 돈을 버는 구조다. 장인이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인 한상원 대표는 특히 재벌가와 두터운 인맥을 바탕으로 설립 10년 만에 한앤컴퍼니를 글로벌 주요 사모펀드로 키워냈다.
재계 관계자는 “대형 사모펀드의 초고속 성장에 대기업들이 긴장할 정도”라며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모펀드들이 점점 더 콜라보하는 전략을 취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