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할리우드 첩보물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져서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했다. ‘미모의 러시아 여간첩’이라 불리며 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안나 채프먼(28)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지난 6월 말, 미연방수사국(FBI)에 의해 뉴욕에서 체포된 채프먼은 현재 고국인 러시아로 추방된 상태다. 또한 그녀와 함께 체포된 9명의 다른 스파이들 역시 모두 미-러 간의 ‘스파이 맞교환’ 협상에 의해 러시아로 쫓겨났다. 냉전 시대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물밑에서는 첩보 작전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는 사람들도 있다.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스파이들의 21세기 현주소를 살펴봤다.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70년대 CIA 스파이로 활동했던 보리스 코르차크는 스파이들의 실제 모습은 제임스 본드처럼 화려하지도, 또 박진감이 넘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카지노도 없고, 돈도 풍족하지 않다. 미녀들도 주위에 없다”면서 “제임스 본드 같은 스파이는 현실에 없다”고 말한다.
스파이들의 일상은 되레 지루하고 평범하며, 때로는 자금이 부족해 궁핍하기까지 하다. 늘 도청을 당할까 전전긍긍하고, 툭하면 FBI에 감시를 받거나 수색을 당하는 일도 잦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코르차크는 이어 “아마도 현재 미국에는 1000여 명 정도의 스파이가 활동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60년부터 30년 동안 CIA 정보요원으로 일했던 유진 포티트 역시 “냉전 시대는 끝났지만 그때보다 더 많은 러시아 스파이가 존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올레그 고디에프스키 전 KGB 부국장의 말은 다르다. 1985년 영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현재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첩보요원은 대략 50쌍 정도일 것이다. 메드베데프 대통령 역시 각 나라에 얼마나 있는지 그 수를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러시아 스파이는 미국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 등에도 널리 퍼져 있다고 덧붙였다.
오늘날의 러시아 스파이들이 과거 냉전 시대의 스파이와 다른 점은 철저하게 ‘현지인화’ 되어 있다는 데 있다. 예전의 스파이들이 자신의 출신지와 본국에서 사용하던 직함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첩보 활동을 하거나 가능한 일반인들 사이에 섞여 들지 않으려 했다면 요즘 스파이들은 반대로 현지인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것이 특징이다. 첩보 대상 국가의 국적을 취득해 마치 그 나라 사람인 양 생활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번에 체포된 10명의 러시아 스파이들 역시 그랬다. 채프먼과 미카일 세멘코를 제외한 8명은 모두 부부로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웃들도 감쪽같이 속을 만큼 평범한 ‘미국인 중산층 부부’였다. 자녀들을 미국인 학교에 보내고, 정원을 가꾸거나 이웃집 사람들과 바비큐 파티를 여는 등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다. 가령 후안 라자로와 비키 펠리즈 부부의 이웃들은 “10년 넘게 한 동네에 살았는데 전혀 몰랐다. 아들은 피아노 신동으로 피아노를 아주 잘 쳤다”면서 매우 놀라워했다.
이들의 스파이 훈련을 담당하는 곳은 다름 아닌 KGB의 후신인 대외정보부(SVR)다. 스파이들 사이에서 ‘모스크바 센트럴’ 혹은 ‘C’라고 불리는 SVR은 스파이들을 훈련시키는 첩보 프로젝트인 ‘불법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보통 이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학교는 작은 도시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 학교에서 훈련을 받는 요원들은 철저하게 미국인처럼 생활한다. 세븐일레븐에서 장을 보고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미국 TV를 시청하고 할리우드 영화를 본다. 또한 미국 신문을 읽고 대화는 영어로만 한다.
이렇게 수년 동안 훈련을 받은 요원이 완벽하게 미국인화되면 핀란드나 네덜란드 등으로 보내진 후 그곳에서 다시 신분을 위장해 미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들이 수집하는 정보는 주로 미국의 대외 정책들과 산업 기술 등이다. 특히 자국인 러시아에 대한 정책을 비롯해 대 이란 및 대 이스라엘 정책에 관심이 많으며, 이밖에도 핵무기 정책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런 고급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 이들이 접촉하는 대상은 정책 입안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직업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교수, 금융계 종사자, 칼럼니스트 등이 그 예다.
하지만 이처럼 신분을 숨기고 불법적으로 활동하는 스파이들의 정보 수집력이나 정보의 질은 불행히도 공개된 신분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정보 요원들, 즉 외교관이나 대외 무역 관계자 혹은 기타 정부 부처 종사자들보다 못한 게 현실이다. 과거와 달리 합법적인 루트로도 충분히 고급 정보를 수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고디에프스키는 번거롭고 또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을 꺼리게 된 러시아 정부가 비밀 요원들의 수를 부쩍 줄일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한다. 또한 스파이들이 실제 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말하면서 이들이 하는 일이라곤 그저 직장에 나가 일을 하거나 가만히 집에 앉아 있는 것이 전부라고 비꼬았다. 이들이 러시아에 보고를 하는 경우는 1년에 한두 번 정도가 고작일 것이라고도 말했다.
정부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스파이들의 생활도 곤궁해졌다. 이번에 발표한 FBI의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스파이들이 사용하는 정보 수집 기술은 생각보다 훨씬 더 구식이었다. 007 영화 속의 첨단 기술이나 장비는 거의 없었다. 컴퓨터가 구식이어서 애를 먹거나 러시아 정부가 제공하는 소프트웨어의 기술적인 문제로 접선을 실패하는 스파이들도 많았다.
또한 SVR은 스파이들의 지출 및 경비 내역을 꼼꼼하게 점검했으며, 스파이들은 집세나 전화요금, 자동차 대여비 등을 일일이 상부에 보고해야 했다. 컴퓨터나 휴대전화를 구입할 때도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했다.
때문에 이들에게는 활동 자금을 전달 받는 것이 늘 번거롭고 힘든 일이었다. 은행 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은 직접 만나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 ‘브러시 패스’라고 불리는 비밀 접선 방식이 그것으로 지하철역, 레스토랑, 공원 등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스쳐 지나가면서 잽싸게 물건을 주고받는 것이다.
자금 전달 업무를 맡았던 크리스토퍼 멧소스가 주로 이런 방식을 사용했는데, 2004년에는 FBI에 의해 포레스트힐 지하철역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마주 오는 한 러시아 관리와 같은 모양의 오렌지색 가방을 슬쩍 교환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이 오렌지색 가방 안에는 현금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009년에는 노스화이트 플레인스역에서 한 러시아 관리가 스쳐 지나가는 리처드 머피의 배낭에 몰래 쇼핑백을 집어넣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에는 브루클린의 포트그린 공원에서 머피가 동료 스파이인 마이클 조톨리에게 은밀히 돈가방을 건네는 모습이 포착됐으며, 한번은 이들이 브루클린의 공중전화부스에서 만난 후 함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겨 돈다발과 새로 구입한 접선용 노트북을 주고받는 모습이 목격됐다.
이들이 접선할 때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는 방법으로는 특별한 암호 문장이 사용됐다. 가령 머피는 위조된 아일랜드 여권을 건네 받기 위해 한 요원에게 접근하면서 “실례지만 1999년 몰타섬에서 만난 적 있지 않나요?”라고 물으면, 상대는 “네, 라발레타에 있긴 했지만 2000년이었는데요”라고 응답하도록 약속돼 있었다. 이때 만일 상대가 <타임> 잡지를 왼손에 들고 있을 경우에는 위험하므로 접근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이들의 정보 교환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을까. 이들은 주로 무선 네트워크를 사용해서 정보를 교환하곤 했다. 가령 채프먼이 그랬던 것처럼 서점이나 커피숍에 노트북을 켜고 앉아 와이파이로 바깥에 주차한 밴 안에 있는 러시아 관리의 노트북으로 전송하는 식이었다. 채프먼은 매주 수요일마다 반즈앤노블 서점이나 스타벅스 커피숍에 앉아 맥북으로 길 건너에 있는 러시아 관리에게 무선으로 정보를 전달했다.
또한 러시아 스파이들은 그림이나 사진 속에 암호를 숨겨 놓는 방법으로 정보를 교환했다. ‘스테가노그래피’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지극히 평범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린 후 그 안에 암호를 숨겨놓는 것으로, 이 암호를 해독하면 읽을 수 있는 텍스트가 나타난다.
또한 단파 라디오를 이용해서 정보를 전송하기도 했으며, 서로 간의 전달 사항은 투명 잉크를 사용해서 종이에 적은 후 건네곤 했다. 투명 잉크는 평소에는 보이지 않다가 자외선에 비추면 나타나는 스파이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다.
신분증을 위조하거나 가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주로 가짜 여권을 만들어 입국하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의 신분을 도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번에 체포된 도널드 헤서필드는 2005년 사망한 캐나다인의 신분증을 위조해서 캐나다인으로 행세했다.
또한 마이클 조톨리와 파트리샤 밀스 부부는 각각 미국인과 캐나다인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은 미칼리 쿠치크와 나탈리아 페레베르체바라는 이름의 러시아인이었다. 이번에 체포된 10명 중 3명만 실명을 사용했으며, 나머지는 모두 가명을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키프로스섬에서 체포된 후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하루 만에 도주해 행방이 묘연한 멧소스를 제외한 10명은 현재 러시아로 돌아간 상태다.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시대 이후 최대 규모의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하면서 불과 10일 만에 속전속결로 이루어진 결과다.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이고르 수티아긴, 세르게이 스크리팔, 제나디 바실렌코, 알렉산더 차포로츠스키 등 4명의 정보요원들을 넘겨받았다.
미국인들은 이번 간첩 스캔들이 비교적 싱겁게(?) 끝난 데 대해 안도하면서도 혹시 자신들의 이웃에 여전히 스파이가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내심 불안한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미모의 스파이 아이큐는 162
▲ 안나 채프먼. 그의 전 남편은 그녀의 누드사진을 유출시키기도 했다. |
빼어난 외모와 28세의 젊은 미혼 여성이라는 점 때문에 가장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러시아 볼고그라드 출생으로 본명은 아냐 쿠셴코다. 모스크바 인민친선대학에서 경제학과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아버지는 전 KGB 요원을 거쳐 현재 러시아 외교관으로 재직 중이다.
졸업 후 떠난 영국 여행에서 영국인 알렉스 채프먼을 만나 5개월 만에 결혼에 성공해 영국으로 이주했다. 하지만 결혼 5년 만에 이혼을 했으며, 그 후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첩보 활동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편은 그녀에 대해 “아이큐가 162일 정도로 매우 똑똑한 여자였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아내가 수상한 러시아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결국 헤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전남편은 언론에 채프먼의 누드 사진을 공개해서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 누드 사진 스캔들로 채프먼은 더욱 유명세를 탔으며, 현재 전남편을 고소할지 여부를 고민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채프먼은 뉴욕에서 연매출 200만 달러(약 24억 원)인 온라인 부동산회사를 운영하는 CEO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며, 명품 옷과 구두로 치장하고는 상류층이 드나드는 클럽과 레스토랑을 골라 다녔다. ‘파티의 여왕’이라고 불릴만큼 화려한 생활을 했던 그녀는 남자를 유혹하는 방법도 뛰어났다. 갑부이거나 유명인이라면 나이와 상관없이 만났으며, 한번은 뉴저지의 백만장자인 마이클 비튼(60)과도 교제를 하기도 했다.
커피숍이나 서점에 앉아 노트북의 와이파이를 이용해 러시아 관리에게 정보를 전달했으며, FBI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던 것은 지난 1월부터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녀가 체포된 것은 러시아 영사관 직원으로 위장한 FBI 요원과의 접선 때문이었다. FBI 요원이 그녀에게 다가가 위조 여권을 또 다른 여성 스파이에게 전달해줄 것을 명령했던 것. FBI 요원은 상대 여성 스파이가 채프먼에게 “혹시 작년 여름 캘리포니아에서 만난 적 있나요?”라고 물어오면 “아니요. 햄프턴 아니었나요”라고 응답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상대가 채프먼을 알아볼 수 있도록 잡지를 팔 아래에 끼고 있을 것도 지시했다. 하지만 이 임무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를 눈치 채고 겁에 질린 채프먼이 러시아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했고, 아버지가 “당장 위조 여권을 경찰서에 넘기고 서둘러 그곳을 떠나라”라고 말했던 것. 이 전화를 도청한 FBI는 채프먼이 모스크바로 도주할 것을 염려해 서둘러 체포 작전을 벌였으며, 결국 지난 6월 말 채프먼을 비롯한 10명의 스파이가 모두 검거됐다.
현재 러시아로 돌아간 그녀는 그곳에서 영웅 대접을 받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과 영화로 만들 생각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포르노영화업계와 성인잡지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하고 있는가 하면, 러시아 정계에 진출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뉴저지주 몽클레어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각각 필라델피아와 뉴욕에서 태어난 것처럼 행세했다.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신시아는 맨해튼의 회계사무소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리처드는 전업주부였다. 신시아는 저명한 뉴욕의 경제전문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전직 각료이자 거물급 정치자금 모금가와도 친한 사이였다.
딸 둘을 둔 평범한 미국 부부로 살았던 이들의 정체가 알려지자 이웃 사람들은 무척 충격을 받은 상태다. 한 이웃은 “그들은 절대 스파이일 리가 없다”면서 도무지 못 믿겠다고 했다.
▲ 도널드 헤서필드&트레이시 폴리
미국 시민으로 위장한 이들은 둘 다 캐나다 출생이라고 주변 사람들을 속였다. 특히 2005년 사망한 캐나다인의 신분증을 위조해서 사용했던 헤서필드는 하버드대 행정대학원을 졸업했으며, 그곳에서 쌓은 막강한 인맥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곤 했다.
헤서필드의 친구들은 그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으며, 이들 부부는 집에서 단파 라디오를 통해 러시아에 정보를 전달하곤 했다.
▲ 크리스토퍼 멧소스
키프로스 공항에서 체포됐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지 하루 만에 행방이 묘연해진 상태. 자금 담당 업무와 첩보요원들과 러시아 관리를 연결하는 중개인 역할을 했다.
▲ 마이클 조톨리&파트리샤 밀스
각각 미국인과 캐나다인이라고 속였으며, 본명은 미칼리 쿠치크와 나탈리아 페레베르체바였다.
▲ 비키 펠리즈&후안 라자로
둘 다 페루 출신으로 펠리즈는 뉴욕에서 발행되는 스페인어 신문인 <엘 디아리오>에서 20년 넘게 칼럼니스트로 활동해온 언론인이었다. 남편인 라자로는 은퇴한 정치학교수였다. 펠리즈는 법정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면서 “투명 잉크로 쓴 편지를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다”, “페루에 가서 활동 자금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온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20대 후반의 미혼남으로 화려한 생활을 했다. 스타일이 좋고 벤츠 승용차를 몰고 다녀 ‘남자 채프먼’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