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금융권에선 “역대 금융단체장 인선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받은 적이 있었나”라는 말이 나온다. 수년간 가라앉아 있던 관피아 논란이 다시 고개를 들면서 주목을 받고 있어서다. 국내 3대 금융협회인 은행연합회, 손해보험협회, 생명보험협회가 입길에 올랐다. 이 단체들은 11월과 오는 12월 현직 회장들의 임기 만료를 앞두고 차기 회장 인선을 진행했는데, 일제히 관료 출신 인사들이 유력 후보자로 거론됐다.
은행연합회는 최근 차기 은행연합회장으로 김광수 NH농협금융 회장을 내정했다. 사진=임준선 기자
최근 새 수장을 결정한 은행연합회는 후보자들의 하마평이 나온 직후부터 금융권 이목을 끌었다. 국내외 은행들과 금융회사 등 총 22개 회원사가 함께 설립한 은행연합회는 금융권 최대 유관기관으로, 금융관련 협회 맏형 격이다. 협회장은 주요 금융협회장 중 최고 수준인 7억 원의 연봉을 받는다. 10개 은행장과 현 은행연합회장으로 구성된 이사회가 의견을 모아 회장을 추대한다. 이번엔 총 7명이 후보군에 올랐는데, 이 가운데 민간 출신이 두루 섞였음에도 관료 출신과 정치인이 유력 후보로 경합을 벌이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커졌다.
거론된 인사는 이정환 주택금융공사 사장, 민병두 전 국회 정무위원장, 김광수 NH농협금융 회장 등이다. 이정환 사장은 이번 정부 들어 주목받는 ‘부금회(부산출신 금융인 모임)’와 ‘성균관대 라인’에 모두 속한다. 3선 의원 민병두 전 위원장은 2016년부터 국회 정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2018년부터 정무위원장을 맡았다.
이들을 제치고 이번 은행연합회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 김광수 NH농협금융 회장은 호남 출신에 현직 금융지주 수장이다. 앞서 거론된 인사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은행업에 대한 전문성을 확보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 역시 정통 엘리트 경제 관료 출신이다. 행정고시 27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은성수 금융위원장, 윤종원 기업은행장 등과 동기로, 재정경제부와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 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등을 역임했다. 김 회장은 2018년 4월부터 NH농협금융 회장을 맡아오고 있지만 ‘농협맨’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관료 출신으로 분류하는 시각이 우세하다.
김광수 회장의 은행연합회 회장 확정으로 공석이 될 NH농협금융 회장 자리에도 관료 출신이 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실제 NH농협금융 회장은 신충식 전 회장을 제외하면 모두 관출신이었다. 최근 연말께 정부부처 개각 전망이 나오고 있어, 금융권 안팎에선 이번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경제 관료가 NH농협금융 회장 후보군에 오를 것이라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손해보험협회는 은행연합회보다 먼저 차기 회장을 선임했지만 ‘뒷말’이 아직도 끊이지 않는다. 일단 후보에 오른 인사 전원이 관료 출신이었고, 하마평에도 오르지 않았던 정지원 전 한국거래소 이사장이 손해보험협회장에 갑작스럽게 당선됐다. 정지원 전 이사장 역시 관료 출신이다. 행정고시 27회로 재무부에서 공직을 시작해 금감원 은행감독 과장, 금융위 금융서비스국장, 금융위 상임위원 등을 거쳤고, 부산 대동고 출신이라 부금회에도 속해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81학번으로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김용범 기획재정부 제1차관, 고승범 금융통화위원 등과 동기다.
정지원 전 이사장이 자리를 옮기면서 진행되고 있는 후임 한국거래소 이사장 인선 과정에서도 논란이 일고 있다. 정 전 이사장이 손해보험협회장에 내정된 것은 지난 11월 2일이고, 전날인 11월 1일 금융위원회 손병두 부위원장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현재 손 전 부위원장은 후임 거래소 이사장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지난 11월 23일 거래소 이사후보추천위원회는 이사장들의 서류심사를 진행해 최종 면접 대상자 3명을 추렸는데, 대상자는 공식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손 전 부위원장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손해보험협회장과 한국거래소 이사장 인선이 맞물려 진행되면서 논란이 커지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업계에선 손보협회장과 이어지는 한국거래소 이사장 인선을 두고 일찌감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교통정리’가 끝난 결과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국거래소 노조는 최근 “금융위원회 출신 또는 퇴물 정치인의 내정을 철회하고 거래소 이사장 선임 절차를 공정‧투명하게 다시 시작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향후 인선 과정에 진통이 예상된다.
2대째 민간 출신이 회장을 맡아온 생명보험협회도 차기 수장 인선이 한창 진행 중이다. 최종구 전 금융위원장, 진동수 전 금융위원장, 진웅섭 전 금융감독원장 등 관료 출신 후보들이 유력하게 거론됐으나 최근 이들이 일제히 고사했다. 현재 거론되는 후보는 정희수 보험연수원장과 이병찬 전 신한생명 사장, 차남규 전 한화생명 부회장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병찬 전 사장은 삼성생명과 신한생명 등에서 임원으로 재직했고, 차남규 전 부회장은 2010년부터 한화생명을 이끌어왔다. 정희수 보험연수원장은 순수 민간 출신은 아니다. 한나라당, 새누리당 소속으로 3선 의원을 지내면서 한때 친박계 의원으로 꼽혔다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고, 이후 보험연수원장을 맡았다. 손해보험협회와 은행연합회 회장 인선 과정에서 관료 출신 인사들에 대한 논란이 진행 중인 만큼 이번 생명보험협회 회장 인선 결과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밖에 SGI서울보증보험도 유광열 전 금융감독원 수석부원장을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유 전 수석부원장은 은성수 금융위원장과 고교·대학 동문이다. 1964년생으로 군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행시 29회로 공직에 입문했다. 기획재정부 국제금융협력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금융위 증권선물위원회 상임위원을 거쳐 2017년 11월부터 지난 6월까지 금감원 수석부원장을 지냈다. 금감원을 떠난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에 서울보증 차기 대표로 선임되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범위를 더 넓히면 지난해 저축은행중앙회와 여신금융협회장도 관료 출신이 새롭게 선임됐다. 금융협회 가운데 유일하게 관료 출신 인사가 허용되지 않는 곳은 금융투자협회다. 금투협은 300여 개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1사 1표 비밀투표제로 회장을 선출한다. 민간 출신과 표대결을 벌여야 하는 만큼 관료 출신이 낙하산을 펼치기 어려운 구조다.
금융단체들은 앞서 세월호 참사로 ‘관피아’에 대한 비판이 커지면서 일제히 민간 출신 회장을 선임해왔다. 그러나 최근 관출신 인사들이 다시 나타나자 금융권에선 강도 높은 비판이 나온다. 이번 정부 들어 은행 보험, 카드 등 금융업계 전반에 대한 정책 변화와 라임, 옵티머스 사태로 인한 금융당국과의 갈등의 골이 깊어진 만큼 ‘힘센 방패’를 모셔왔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금융 소비자 이익에 반하는 ‘관피아’의 부작용을 여러 차례 겪어왔던 만큼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대형 금융사 임원은 “관료, 정치인 출신 단체장은 양날의 검과 같다”며 “금융 전문성을 갖춘 인물보다 정부와 업계 사이에서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회장에 적합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잠시 깨졌던 관행이 다시 부활한 것과 다름없어 엄격한 사후 감시가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