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통일부 장관. 사진=박은숙 기자
규모만 살펴봤을 때 2021년 통일부 소관 예산안은 줄었다. 2021년 통일부 일반회계 세출 예산은 3174억 1100만 원이다. 2020년 3685억 6900만 원 대비 13.9% 줄어들었다. 남북협력기금 운용계획 예산도 마찬가지다. 2021년 남북협력기금으로 지출되는 예산 규모는 1조 6733억 4500만 원이다. 2020년보다 2294억 원(12.1%) 감액됐다.
규모는 줄었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사정이 다르다. 2021년 통일부 소관 예산안 항목별 증·감액 여부를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 기존 대북정책 기조가 그대로 이어질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부 일반회계 세출 예산안에서 증액된 항목은 통일정책(31.8%), 개성공단 등 남북경제협력(40.8%), 남북회담(3.5%), 통일교육(2.8%) 등이었다. 북한정세분석, 탈북민 정착지원, 인도적 문제해결, 통일행정지원 예산은 감액 항목이었다.
안보단체 관계자는 “통일부 예산안을 살펴보면 문재인 정부가 대화와 경제협력을 바탕으로 북한과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관계자는 “탈북민이나 인도적 문제해결 등 국제적인 관심을 받는 분야에 대해서 예산안이 감액된 것은 국제 여론과 다소 동떨어진 양상”이라고 덧붙였다.
통일부 남북협력기금 운용계획 중 주요 사업비 증액 현황. 사진=정부 예산안 갈무리
남북협력기금 전체 예산은 감액됐지만 사업비 자체는 늘어났다. 2021년 남북협력기금으로 추진하는 사업비는 1조 2408억 1400만 원으로 2020년 1조 2029억 9100만 원보다 3.1% 증액된 규모다.
그중 민생협력지원 예산은 5130억 9200만 원 규모로 2020년 대비 13.7% 늘었다. 민생협력지원 예산에서 눈에 띄는 증액 항목은 보건의료협력 분야와 농·축산 산림환경 협력 분야다. 정부는 2020년 584억 5900만 원이던 보건의료협력 사업비를 954억 5900만 원으로 370억 원 증액했다. 농·축산 산림환경 협력 사업비는 3044억 9400만 원에서 3294억 9400만 원으로 250억 원 늘었다. 두 항목 모두 2020년 예산안 대비 집행액이 1%도 안 되는 예산이다. 야권에선 두 항목을 두고 ‘집행 여부도 불투명한 항목에 대한 대규모 증액을 추진하는 소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협기반(무상) 항목 예산으론 2471억 6700만 원이 편성됐다. 2020년 대비 4.3% 늘었다. 남북공유하천 공동이용 예산이 58억 5000만 원(48%) 증액된 180억 2600만 원으로 편성됐다. 경원선 철도 복원사업에도 2020년보다 41억 400만 원(9.5%)이 추가 투입된다. 경원선 철도 복원사업 관련 예산은 475억 1400만 원으로 짜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인영 통일부 장관. 사진=청와대 제공
국민의힘은 통일부 소관 예산안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는 11월 10일 ‘북한 관련 황당예산 10선’을 제시했다. 이어 총 8276억 7550만 원 삭감을 요구했다. 국민의힘이 황당예산으로 지목한 항목은 민생협력지원 예산(3484억 원), 남북공유하천 공동조사 등 경협기금(1857억 5000만 원), 남북협력기금(1260억 원), 대북 쌀 지원(1007억 6000만 원) 등이 대표적이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대북 민생협력 예산의 경우 정부가 사업에 참여하는 민간단체를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이 갖춰지지도 않았다”면서 “황강댐을 방류한 북한과 하천 공동조사, 받겠다는 북한에 쌀 지원 예산을 포함한 것은 어떤 의도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관계자는 “이번 통일 예산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이행하기 위한 조치 일환”이라면서 “평화라는 대의 아래 야당 협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최용훈 전문위원은 예산 검토 보고서를 통해 “최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서해안 해양수산부 공무원 피격 사건 등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있지만 대북 쌀 지원, 긴급 구호 물품 지원 등은 인도적 차원에서 정치적 상황과 무관히 지속적인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업 예산 집행실적이 연례적으로 매우 저조하다”면서 “통일부가 과거 편성 내역에 근거해 관행적으로 차년도 예산안 규모를 편성하고 있어 적정 사업규모 산출 노력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지금은 폭파된 개성공단 내부 남북공동연락사무소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탈북민 단체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탈북민 단체에 대해선 고삐를 죄면서, 남북 협력에 대한 의지를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면서 “이런 기조가 2021년 통일부 예산안에도 반영이 된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협력이나 대북 인도적 지원 예산이 북으로 넘어가면, 결국 이런 재원들은 북한 지도부 주머니에 들어간다”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이나 공무원 피격 사건 책임 소재를 따짐과 동시에 비핵화를 약속받아야 할 정부가 너무 친화 정책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6월 폭파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건축엔 한국 정부 예산 176억 원가량이 투입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한 소식통들도 통일부 소관 예산안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한 소식통은 “한국 정부가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따지지 않은 채 대북협력 사업 예산을 증액하는 상황에 의구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소식통은 “공무원 피격 사건도 어느새 이슈 중심에서 빗겨가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남북관계가 경색된 국면에서 협력 사업 비용을 추가 장전한 것은 뭔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중간 단계를 건너뛴 느낌”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이후에도 사무소 운영비용 3억 1000만 원을 예산안에 남겨뒀다. 이 예산은 앞서 언급한 경협기반(무상) 항목에 포함돼 있다. 2020년 64억 600만 원이 편성돼 있던 해당 예산은 북한이 사무소를 폭파한 뒤 95.1% 감액됐지만 그 명맥을 유지했다. 통일부 측은 사무소는 없어졌지만 추후 남북관계가 좋은 흐름으로 이어질 때를 대비해 사무소 담당 조직을 없애지 않는다는 방침이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2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남북연락·협의 기구의 발전적 재개 방안’ 토론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11월 23일 연락사무소 재설치를 언급했다. 이 장관은 ‘남북연락·협의기구 발전적 재개 방안 모색’ 토론회 개회사를 통해 “새로운 남북관계 변화는 연락사무소 통신 재개로부터 시작할 것”이라면서 “남북 간 상시 연락선 복구는 ‘평화의 시간’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 장관은 “무너진 연락사무소를 적대 역사로 남겨두지 않고 더 큰 평화로 다시 세워나가야 한다”며 연락사무소 재설치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이 장관은 추가적인 대북 친화 제스처를 취하는 데도 적극적이다. 이 장관은 23일 4개 대기업(삼성전자·현대자동차·LG·SK) 주요 인사 간담회 자리에서 “앞으로 코로나 치료제가 개발되고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남북관계) 유연성이 만들어지는 기회가 생긴다”면서 “남북 경제협력 문제는 예상보다 좀 더 빠르게 시작될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고 했다. 11월 18일 이 장관은 KBS 인터뷰에서도 “(코로나19 백신이) 부족할 때 함께 나누는 게 진짜로 나누는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남북 간 코로나19 백신 공유 필요성을 제기했다.
북한 관련 단체 관계자는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남북 공유 필요성을 제기한 이 장관 발언엔 논란 여지가 있다”고 했다. 관계자는 “식량 공유와 백신 공유 사이엔 본질적 차이가 있다”면서 “식량은 나눌 수 있지만 백신 공유는 국민 생명을 담보로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든 국민에게 백신을 보급한 뒤 잉여분을 나누는 것은 괜찮을 수 있어도, 양이 부족한 가운데 백신을 북한과 공유한다면 백신을 맞지 못하는 우리 국민이 생겨날 수 있다”면서 “남북 간 백신 공유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정부 고위 관계자로서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
이 장관 발언에 대해 미국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에반스 리비어 전 미 국무부 수석부차관보는 자유아시아방송(RFA) 인터뷰에서 “조 바이든 미 대통령 당선인은 북한과 원칙에 입각한 대화에 대해선 열려있지만, 무력 도발과 핵실험을 용납하지 않을 거란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면서 “이 장관이 그린 미래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