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신혜는 지난 6월 개봉한 ‘#살아있다’와 11월 27일 공개되는 ‘콜’에서 모두 주어진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여전사 캐릭터로 분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박신혜는 ‘콜’에서의 캐릭터 변신에 무엇보다 큰 자부심을 드러냈다. 극중 박신혜는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한 무선전화기를 통해 20년 전 자신의 집에 살았던 동갑내기 여성이자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 영숙(전종서 분)과 접촉하게 되고, 그로 인해 모든 일상이 무너져 내린 서연 역을 맡았다.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와 엄마와의 냉랭한 관계, 자신을 둘러싼 모든 상황 탓에 다소 움츠러들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던 서연은 정체를 드러낸 영숙이 과거를 바꾸면서 현재에까지 영향을 끼치자 남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에게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모습을 보인다.
짧지 않은 러닝타임 동안 서연이 점진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과 억눌렀던 감정을 갑자기, 그리고 한꺼번에 폭발하는 신이 어색하지 않게 이어지는 것은 박신혜가 그만큼 캐릭터를 깊이 연구한 덕으로 보인다. 박신혜가 ‘서연’이 되기 위해 가장 고민한 지점은 감정의 변화가 그대로 캐릭터의 외면에도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배경에 따라 바뀌는 서연의 의상과 머리 모양, 그리고 영숙의 정체를 자각하게 되면서 서연 역시 말투의 높낮이와 행동 방식이 변하는 모습 등이 그 고민의 결과였다.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서연의 감정을 따라갈 수 있게 배우는 물론 영화 속 모든 장치들이 손을 빌려주고 있는 셈이다.
‘콜’은 지난 3월 개봉이 예정돼 있었으나 같은 시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일정이 연기됐고 결국 넷플릭스 공개를 결정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그런 박신혜가 꼽은 서연의 최고의 명장면은 영숙과의 갈등이 최고조로 치달아 처음으로 분노를 폭발시키는 신이었다. 전화로만 연결된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욕설과 악다구니를 내뱉는 이 신에서 서연은 영숙에게 무릎을 꿇고 빌다가, 눈물을 터뜨리며 호소하다가, 끝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면서도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야생마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광기로 질주하던 영숙과 달리 평생 동안 마음 속 깊은 곳에만 감정을 담아뒀던 서연이 처음으로 그와 흡사한 광기를 드러내는, 영화의 변곡점 같은 신인 셈이다. 박신혜는 이 신의 촬영을 마치고 눈물을 쏟았다고 회상했다.
“서연이 또한 영숙처럼 분노에 차올라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 치닫는 모습이 나오죠. 그 신에서 제 애드리브인 부분이 있었는데, 원래는 영숙에게 서연이가 그저 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제발 하지마’ 하면서 전화기 붙잡고 비는 신이었어요. 그런데 첫 촬영 후에 모니터를 하다 보니까 이대로 가면 우리가 우려했던 수동적인 모습, 쉽게 가려는 모습이 되는 건 아닐까 싶은 거예요. 그래서 배경 상황에 대한 지시만 주어진 상태로 (애드리브로) 촬영하게 된 거죠. 촬영 끝나고 울었는데 한편으론 다 찍고 나니까 너무 기뻤어요(웃음). 바로 이런 경험 때문에, 이런 기억들이 너무 좋아서 제게 계속해서 작품을 하고 싶어지는 욕심이 생기는 게 아닐까 싶어요. ‘콜’이라는 작품이 저한테 그런 욕심을 더 극대화시켜주는 작품인 것 같아요.”
‘콜’은 박신혜-전종서 두 주연에 이어 이엘, 김성령 등 모든 이야기의 축이 여성배우로만 채워진다는 점에서 여성 영화팬들의 많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더 개봉을 늦추는 것보다는 3월부터 기다려주신 관객분들께 보여드리는 게 답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저희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된 건 영광이죠. 해외 팬 분들도 한국 드라마는 쉽게 보실 수 있지만 한국 영화는 접하기 어렵다고 하시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들었어요. 그게 넷플릭스로 이뤄진 느낌이 들어요. 아무래도 실제 영화관과 화면의 크기나 화질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 혼자 집중해서, 내가 원할 때 원하는 곳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잖아요. 저도 이번에 친구들하고 개인위생 철저히 하면서 같이 보기로 했어요(웃음).”
개봉이 예정됐던 3월부터 ‘콜’은 많은 여성 영화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모으기도 했다. 박신혜와 전종서 두 주연에 이어 이엘, 김성령까지 쟁쟁한 여성 배우들이 이야기의 모든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여배우들이 한 목소리로 “여성들을 위한 시나리오가 많지 않다”고 지적해 온 한국 영화계가 지난해부터 다양한 여성 주연 작품들을 선보이며 여배우와 여성 팬 모두를 위한 선택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여배우’로서 박신혜에게 있어서도 이 같은 변화는 고무적이라고 했다.
“영화에 대한 다양성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점점 사회가 자극적인 것을 원하고 그런 것에만 흥미를 느껴가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있었는데, 그러다 보니 영화의 장르 다양성이 어느 한 순간 정체되고 줄어들지 않았나 싶었죠. 우리가 다뤄야 할 문제들이나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은 어마무시하게 많은데 그동안은 사람의 입맛에만 따르거나 잘될 것에만 집중해서 너무 치우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속상함이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이 기회를 통해 다양성을 약간이나마 존중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선택하고 이렇게 선보이게 된 걸 너무나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앞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오락적이지 않더라도 뭔가 메시지가 담긴 영화들이 많은 빛을 받을 수 있길 바라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