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한 영어와 수려한 외모로 친분 쌓은 뒤 투자 유도
왕 씨가 A 씨에게 소개한 사이트. A 씨는 설치 30분 만에 수익을 올렸다고 했다. 사진=A 씨 제공
“매일 일상을 공유하고 통화도 이틀에 한 번꼴로 했어요. 종종 영상통화도 했고요. 오프라인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은 몰랐어요. 사실 지금도 이게 사기인지 아니면 정말 돈을 벌게 해주려고 했던 건지 잘 모르겠어요.”
취업준비생 A 씨(26)는 아직도 어안이 벙벙하다. A 씨는 한 달 전 만남 앱인 ‘틴더‘를 통해 한 중국 남성을 알게 됐다. 친구가 되고 싶다며 다가온 남성은 훤칠하고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소통에 문제도 없었다. 남성은 자신의 이름을 왕 아무개라고 소개했다.
A 씨는 왕 씨의 연락처를 받아 카카오톡을 통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일상을 공유하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왕 씨는 자신을 중국에서 규모가 큰 음식점을 여러 개 운영하는 CEO라고 했다. 오후가 되면 자신이 운영하는 음식점의 사진을 찍어 보내줬고 출근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찍어 보내기도 했다. A 씨 역시 운동하는 모습 등 일상 모습을 공유했다.
두 사람은 한 달 가까이 연락하며 지냈다. 하루에도 수십 통의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서로의 얼굴을 찍은 사진도 오고 갔다. 밤이 되면 하루 일상을 묻는 영상통화도 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다. 당시 A 씨의 고민은 주식 투자로 인한 손실이었는데 반면 왕 씨는 투자의 귀재로 항상 높은 수익을 올리는 편이었다.
어느 날, 왕 씨는 A 씨에게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며 주식을 정리하고 자신이 투자하는 곳에 같이 투자를 해보자는 제안을 해왔다. 왕 씨가 소개한 것은 암호화폐를 매개로 한 투자 사이트로 구글플레이나 애플스토어 등 정식마켓에서 취급하지 않는 이른바 블랙마켓을 통해 다운받을 수 있는 앱이었다.
A 씨는 암호화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다. 왕 씨는 “어렵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가 천천히 알려 주겠다”며 설득했다. 왕 씨는 앱 설치 방법부터 암호화폐 구매법, 계좌 개설법을 하나하나 캡처해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A 씨가 망설이자 직접 초기 자본금 500달러를 더해주며 “못 믿겠으면 직접 해보라. 10분 만에 수익이 날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A 씨는 왕 씨가 지시한 곳에 돈을 넣고 빼고를 반복했다. 30분도 되지 않아 20%의 수익금이 생겼다. 이후 왕 씨는 특정 온라인 주소를 보내주며 A 씨의 지갑 주소이니 이곳으로 돈을 넣으라고 했다.
그런데 해당 사이트는 수상한 구석이 너무 많았다. A 씨는 “갑자기 수익이 생기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사이트가 매우 수상했다. 중국어로 쓰여 있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big’ ‘small’ ‘bet’ 등의 단어가 전부였다. 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본인 인증을 해야만 돈을 인출할 수 있다는 점도 이상했다”고 말했다. 수익금을 받기 위해서는 휴대전화 인증과 여권사진 등록은 물론 업체에서 시키는 문구를 자필로 받아 적은 후 이를 들고 얼굴이 나오도록 사진을 찍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왕 씨는 자신을 믿고 돈을 넣으라며 계속해서 A 씨를 재촉했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던 A 씨는 우연히 한 포털사이트에 자신과 유사한 일을 겪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야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후 왕 씨에게 “더 이상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 번 돈과 투자금은 모두 포기하겠다”고 하자 왕 씨의 태도가 돌변했다. 왕 씨는 A 씨에게 “네가 그러니 돈을 못 버는 것이다. 한국에 네 명의의 모바일 통장은 있냐”며 윽박지른 뒤 연락을 끊었다.
#지갑 주소 받으면 소유주 확인해야…“가급적 국내거래소 이용하는 것이 안전”
한 포털사이트에 올라온 고민글. 올 10월에 집중적으로 관련 글이 많이 올라왔다. 사진=네이버 지식인 캡처
확인 결과, A 씨가 이용한 사이트는 일종의 온라인 도박장이었다. 권단 블록체인 전문 변호사는 ”A 씨가 소개받은 사이트의 주소는 일반적인 주소가 아니다. 또, ‘bet’ 등의 문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행성 도박 사이트인 것으로 보이는데 암호화폐는 베팅 수단으로 쓰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요신문은 한 포털사이트에 A 씨와 유사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고민글이 여러 개 올라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피해를 호소하는 글이 올라온 시기는 대부분 올 8~10월로 비교적 최근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조인들은 이를 두고 전형적인 로맨스 스캠이라고 분석했다. 로맨스 스캠은 SNS를 통해 피해자에 대한 이성적 관심을 가장해 호의를 산 뒤 이를 악용하는 신용 사기의 일종이다. 과거에는 직접적으로 돈을 요구하거나 빌리는 방식이었다면 최근에는 A 씨의 사례처럼 암호화폐 투자를 종용하는 사기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의 권 변호사는 “친분을 쌓은 뒤 재력을 과시하고 피해자에게 금전적인 요구를 하는 것은 로맨스 스캠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수단이 화폐에서 암호화폐로 바뀌었다는 점”이라며 “상대방이 지갑 주소를 보내며 돈을 넣으라고 했다면 해당 지갑의 소유주는 상대방일 가능성이 높다. 만약 A 씨가 수익금을 지갑에 넣었다면 상대방은 언제든지 그 돈을 꺼내어 쓸 수도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되도록이면 믿을 만한 국내 거래소를 통해 거래를 할 것을 조언했다. 권 변호사는 “국내 거래소 지갑이라면 거래소 측에서 모니터링을 통해 사전에 출금을 차단하는 등 조치를 취할 수도 있지만 해외 거래소 지갑이라면 국제 공조가 필요하다. 만약 거래소 지갑이 아닌 개인 지갑으로 송금됐을 경우엔 지갑 소유주를 특정하기도 힘들다. 경찰 수사가 진행된다고 해도 신원 확인을 할 수 없어 범인을 잡기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피해를 인지한 즉시 경찰에 신고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암호화폐 거래소도 로맨스 스캠을 비롯한 보이스피싱과 금융사기에 대한 주의를 요하고 있다. 암호화폐 거래소 빗썸은 “최근 보이스피싱, 대포통장, URL 피싱 등 금융사기로 인한 고객 피해 사례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며 “비록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더라도 회원의 계정을 통해 범죄가 이뤄질 경우 형사상 사기방조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을 수도 있으니 각별히 유의해 달라”는 내용의 공지를 올렸다.
한편 고팍스 자금세탁방지팀은 직접 로맨스 스캠 피해를 적발했다. 관계자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이전에는 보고되지 않았던 수법이 며칠 사이 급증했다”며 “지난 10월 20일부터 최초 피해를 인지한 이후 11월 21일까지 로맨스 스캠과 유사한 피해사례 5건을 직접 적발했고 거래소 차원 사전 인출을 차단해 금전 피해를 막았다”고 밝혔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