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이미 약속 장소에 와 있었던 허 감독은 부인 최미나 씨, 사위 등 가족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고 뒤늦게 도착한 기자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며 예약된 자리로 안내를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인터뷰하기가 겁나네요. 워낙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입을 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라는 말로 지난 밤부터 겪은 마음고생을 에둘러 표현했다. 허 감독과 같이 식사를 하고 반주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기자 또한 이번 인터뷰를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최미나 씨 또한 “밤새 한숨도 못 잤어요. 남편은 신경쓰지 말라고 하지만 너무 엄청난 일이 벌어진 터라 저도 그렇고 딸 아이도 그렇고 정말 눈물만 나더라고요. 오늘도 이 인터뷰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약속을 한 거라 거절할 수 없다며 나가시더라고요”라고 힘든 심경을 토로했다.
다음은 허정무 감독과 편하게 나눈 얘기들을 나름 ‘여과’해서 정리해본 내용이다.
―오늘 이 자리가 그리 편하진 않을 것 같다. 솔직히 못 나오시겠다고 연락올까봐 걱정했다.
▲이런 일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괜찮다. 그러나 정말 속상하더라. 내가 말 실수한 부분은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말조심하지 않는 편이다. 왜냐하면 기자를 믿고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 세련된 편이 아니라 말투가 투박한 면도 있다. 축구 기자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기사 쓸 때 나름 정리해서 쓴다. 그런데 그 월간지에선 내가 말한 내용을 너무 편하게 다 써버렸더라.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인데 누굴 원망하고 탓해봐야 뭐하겠나. 하지만 자꾸 이런 일이 생기면 인터뷰하는 사람 입장에선 속에 있는 얘길 꺼낼 수가 없다. 자극적인 표현에 의해 본질이 매도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그럼 한번 물어보자. 허 감독이 정말 그 인터뷰에서 하고 싶었던 ‘본질’은 무엇이었나.
▲대표팀 감독 인선을 앞두고 항상 나오는 얘기가 외국인 감독에 대한 부분이었다. 히딩크 감독 이후 내가 맡기 전까지 대표팀은 ‘감히’ 국내 감독은 쳐다볼 수도 없었다. 물론 능력 있는 외국인 감독을 모셔와서 한국 축구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발전적인 방향으로 간다면 나 또한 환영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조건 국내 감독은 안 되고 외국 감독이 한국대표팀을 이끌어가야 한다고 믿는 축구관계자들이나 여론에 대해 나름 하고 싶은 얘길 꺼냈던 것이다. 외국 감독이라고 하면 뭐든지 높게 평가받고, 국내 감독은 뭔가 부족한 듯한 이미지를 갖고 있고…, 그런 선입견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정말 외국 감독이 필요하다면, 이름을 거론하자고 말했다. 무리뉴면 무리뉴, 둥가 감독이면 둥가 감독…, ‘외국인 감독’이란 단어를 써서 모든 외국인 감독이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고 했다. 내 어휘력 부족으로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묻히고, 본질이 다른 얘기가 더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점에 대해선 굉장히 안타깝다.
―오늘 대표팀 차기 사령탑으로 조광래 경남 FC 감독이 선임됐다. 그동안 후임 감독 인선이 지지부진하면서 여러 명의 후보군이 하마평에 오르내렸고 말도 많았고 설도 많았다. 지켜보는 심정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이것도 솔직히 말하기가 어렵다. 논란이 될 것 같아서. 축구 지도자의 최종 목표는 대표팀 지도다. 그걸 위해 한길을 달려간다. 그런데 이건 무슨 유행처럼 서로 못하겠다며, 모두 대표팀 감독을 사양하는 모습이 썩 보기 좋진 않았다. 저마다 사정도 있고 선수들, 팬들과 한 약속도 있을 것이고,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대표팀 감독 자리는 쉽게 주어지지도 않지만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해성 코치한테도 얘길했었다. 내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사석에서 ‘만약 축구협회에서 연락이 온다면 한번 (대표팀을) 맡아보는 게 어떻겠느냐’라고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개인 사정을 이유로 어려울 것 같다고 하더라.
―후보군에 오른 지도자들이 왜 대표팀 감독직을 맡지 않으려고 했겠나.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소문들이 많지 않았나. 이번 감독은 임시 감독이라든가 이미 다음 월드컵 감독이 정해졌다든가, 아시안컵 이후에 물러날 수도 있다든가…. 그래도 난 용기 있게 그런 소문들에 맞설 수 있는 감독이 나오기 바랐다. 결국 조광래 감독이 용기를 냈다고 볼 수 있다.
▲ 남아공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된 후 허정무 감독이 선수들과 감격을 나누는 모습. |
▲어떤 사람은 내가 전술도 없고 모든 걸 지성이한테 의존했다는 얘기도 하더라(웃음). 지성이가 부각되는 건 내가 원하는 바였다. 이번 월드컵을 치르며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즐기면서 축구하는 것’이었다. 국제대회 나갈 때마다 잔뜩 위축되고 긴장돼서 제대로 된 플레이도 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던 경험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젊은 선수들이라면 충분히 그런 ‘끼’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장의 역할은 굉장히 커진다. 고민 끝에 주장을 박지성으로 정하고 코치들한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은 (이)영표를 추천했다. 그런데 난 영표가 분명히 고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선수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루는 이운재 이정수 염기훈 김정우 이영표 박지성을 불러놓고 얘기를 나누다 주장을 뽑아야 한다고 말해놓고 내가 먼저 “영표야, 네가 한번 해보지 않을래?”하고 슬쩍 운을 띄웠다. 그랬더니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 전 저보다 지성이가 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원하는 대답을 해주는 게 아닌가. 지성이만 빼놓고 모든 선수들이 “지성이가 하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라. 그래서 지성이가 주장으로 선출된 것이다. 주장이란 직책을 부담스러워하는 선수를 세워 놓고 꼭두각시로만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주장한테 일임했고 주장과 상의하고 대화 나누면서 지성이 스스로 자신의 자리에 대한 책임감과 중요성을 깨닫게 했다. 그로 인해 나에 대한 평가가 조금 묻혔다고 해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난 내가 추구한 대로 대표팀이 만들어진 데 대해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전 남아공에서 있었던 대표팀 단체 인터뷰 때 김남일 선수가 “나중에 월드컵 끝나면 허정무 감독님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의미는 ‘허정무 감독이 이전 프로팀 때와는 달리 대표팀을 맡고 나서 너무 많이 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내 별명이 ‘진돗개’ ‘독종’ 뭐 이런 것이다. 그 별명에 내 성격이 묻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선수들한테 뭔가를 전달하려 할 때 그 방법이 틀린 것 같다는 충고를 들은 적이 있었다. 즉 상대를 너무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어느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를 비롯해서 우리 가족들도 날 어려워하는데 선수들은 어떠할까 하고. 뜻이 옳다고 해도 방법이 잘못됐다면 틀린 것이다. 잘못된 걸 알고도 못 고치면 더 나쁜 것이다. 난 내 문제점을 인지했고 고치려고 노력했고 조금씩 변화되어가는 내 자신을 보면서 이전의 내 모습에 대해 반성도 했다. 아마 그런 점이 이번 월드컵대표팀을 이끌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젊은 선수들한테 무조건적인 강요와 복종을 바라선 안된다. 그들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끔 충분히 설명하고 설득하고, 그리고 기다려줘야 한다. 나도 배웠고 많은 걸 깨달았다. 이번 대표팀을 맡아서 말이다.
―최종 선발 명단에서 이근호를 제외했을 때, 어떤 심정이었나.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만든 일등공신이라고 평가받았던 선수를 탈락시키는 게 쉽지 않았을 것 같다.
▲가장 가슴이 아픈 선수가 이근호다. 근호가 월드컵 예선전에선 굉장히 좋은 활약을 펼쳤지만 그 후 1년 넘게 슬럼프에 빠져 힘든 시간을 보냈고, 우린 근호를 기다려주기에 시간이 모자랐다. 마지막까지 고민이 깊었다. 이동국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던 게 그 고민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러나 결정하는 순간에는 과거보다는 현재만 생각했다. 여러 차례 코칭스태프 미팅을 통해 근호보다는 동국이를 뽑는 게 낫다는 결정이 내려졌고 근호한테 최종 통보를 하는데 정말 너무 미안하고 마음 아파서 쉽게 말이 안 나오더라. 그래도 고마운 건 월드컵 끝나고 귀국했을 때 제일 먼저 근호가 전화를 걸어와선,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라고 말해준 부분이다. 자신의 아픔을 내세우기보단 그래도 날 원망하는 대신 인사차 전화를 해준 데 대해 내가 오히려 너무 고마워서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이동국 선수에 대한 회한이 있을 것 같다. 이동국 선수의 선발 여부에 따라 비난도 받고 옹호도 받는 그런 분위기가 감독으로선 힘들 수밖에 없었을 텐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내가 대표팀 선수들 중에서 가장 쓴소리를 많이 한 선수가 이동국이었다. 왜 그랬을 거라고 보나? 그 선수를 뽑기 위해서였다. 관심이 없었다면 그런 말조차 꺼내지도 않는다. 자꾸 선수의 마음을 자극하면서 올라오길 간절히 바랐다. 동국이한테 월드컵 동안 더 많은 시간을 주지 못한 게 미안하지만,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안정환, 이동국의 몸 상태가 100%였다면 조커나 교체카드로 내가 구상했던 전술을 펼쳐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보다 선수 자신이 더 답답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 보자. 대표팀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가장 강력한 ‘설’이 K리그 지도자로 복귀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팀에서 오퍼를 받았다는 얘기도 들린다.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다.
▲포항과 전남 시절, 열심히 노력은 했지만 우승 문턱까지 갔다가 번번이 좌절을 맛봤던 경험이 있다. 솔직히 K리그로 돌아가게 된다면 이전에 못 이룬 우승의 꿈을 이루고 싶은 욕심도 있다. 언젠가는 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시기를 못박을 수가 없다. 급하게 서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K리그로부터의 오퍼를 받았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받았을 수도 있고 안 받았을 수도 있고, 그런데 안 받았다고 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알아서 판단하시길 바란다.
▲좀 전에 말하지 않았나. 급하게 서둘고 싶지 않다고. 이 얘긴 이 정도에서 멈췄으면 좋겠다(웃음).
―재미난 질문이다. 만약 주례 요청이 온다면? 그리고 결혼 문제로 이슈가 되는 박지성 선수가 주례를 부탁해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큰 웃음을 터트리며) 7년 전인가? 지금 용인시청 감독인 정광석의 주례를 처음으로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주례 경험을 하고 나서 앞으로 절대로 주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이유는 갑자기 내가 너무 나이 많은 할아버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성이가 주례를 부탁한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허정무 감독은 대표팀 감독 자리를 ‘독이 든 성배’라고 표현한 게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고 말했다. 독이 든 술은 유혹이 강하지만 그만큼 부담도 크고 책임을 필요로 하는 부분이 많기에 대표팀 감독 자리는 명예도 책임도 함께 지고 가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던지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다.
“전 요즘 바둑 두고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해요. 그리고 반바지 차림으로 내가 사는 동네 다니면서 막걸리도 마시고 소주도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즐거워요. 일부 사람들은 기사 제목에 열을 내고 욕을 하고 그러지만 언젠가는 그들도 허정무가 무슨 얘길 하고 싶어했는지 아실 때가 올 거라고 믿어요.”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