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호산업 측은 그동안 HDC현산에 계약금을 인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요청해왔다. 그러나 HDC현산은 지난 11월 초 답변 대신 “자사 동의 없이 금호리조트를 매각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냈다. 회사가 여전히 우선협상대상자 지위에 있고, 이 때문에 아시아나항공 인수 계약도 유효하니 마음대로 자산을 매각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금호리조트는 금호산업 자회사로, 부채를 줄이기 위한 자금 수혈책으로 당시 막 시장에 내놓은 상황이었다.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이 HDC현산을 상대로 계약금 몰취 소송을 제기하면서 2500억 원의 계약금을 둘러싼 소송전이 본격화됐다.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진=연합뉴스
이 답변에 금호산업과 아시아나항공이 꺼내든 카드가 몰취 소송이다. 이미 계약은 해지됐고, 그 책임은 모두 HDC현산에 있으니 계약금을 가져가겠다는 내용이다. 이 소송에서 HDC현산이 패소하면 계약금을 모두 떼인다. HDC현산은 공시를 통해 법적 절차를 진행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현재 법무법인 태평양 등 대형 로펌을 선임해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향후 계약금 반환 소송은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둘러싼 공방이 중심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HDC현산이 계약 파기를 인정하면 계약금 반환 소송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며 “금호리조트 매각에 제동을 걸었던 것은 재인수 의지가 있다기보다는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계약 해지에 동의한 적이 없고, 우협대상자 지위를 일방적으로 박탈당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결국 거래 무산의 책임이 산은 등 채권단과 금호산업 및 아시아나항공 측에 있으니 계약금을 전액 돌려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강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HDC현산은 “현재로선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것 외에 답변하기가 어렵다“며 “향후 진행 사항 등은 공시를 통해 알리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쟁점은 실사 문제다. 앞선 거래 과정에서 HDC현산과 산은·금호산업 갈등의 핵심이었다. 앞으로 진행될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더욱 관심이 쏠린다.
지난해 12월 계약 이후 7주간 아시아나항공 실사를 했던 HDC현산은 올해 코로나19 여파로 인수 환경이 달라졌다며 인수 무산 직전까지 12주간의 재실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산은 등 채권단과 금호산업은 인수 의지부터 보이라며 재실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HDC현산은 코로나19 사태에 아시아나항공의 부실이 새로 확인됐으며, 금호산업 계열사 간 부당한 지원까지 발견된 탓에 인수 후 동반 부실 우려까지 높아진 만큼 재실사는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산은과 금호산업은 시간 끌기에 불과한 주장이라며 거부하다가 결국 거래를 철회했다.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주도하는 산은은 HDC현산과의 거래 무산 직전부터 ‘플랜B’인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작업을 추진했다. 그리고 시기상 불과 두 달여 만에 인수가 공식화됐다. 현재 대한항공 측은 아시아나항공 실사를 준비하고 있다. 연내 거래 완료를 목표로 추진해왔던 만큼 실사 기간도 짧을 것으로 점쳐진다.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사진=임준선 기자
빠른 거래와 빠른 실사가 어떤 쪽에 유리할지를 두고 금융투자 업계 의견이 분분하다. 대한항공의 실사가 빠를수록 ‘HDC현산의 재실사 요구는 시간끌기에 불과하다’는 기존 산은과 금호산업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선 나온다. 다만 코로나19라는 특수성과 동종업계 사업자인 대한항공과 건설업이 핵심인 HDC현산은 실사 기간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도 있다. 대한항공과 산은이 실사와 인수 작업을 빠르게 마무리하더라도, HDC현산의 재실사 명분이 약해지진 않을 것이란 뜻이다.
HDC현산의 실사 이슈는 최근 다른 M&A(인수합병)와도 연결돼 주목받고 있다. 두산그룹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추진된 두산인프라코어 매각 과정에서도 실사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두산인프라코어는 산은이 추진하고 있는 또 다른 대형 M&A로 분류된다.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에 관심을 가졌던 GS건설은 지난 11월 25일 본입찰 불참을 선언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가 ‘요구한 만큼의 충분한 실사 자료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당초 산은과 대우조선해양 M&A를 진행하고, 두산인프라코어 인수전에선 산은의 100% 자회사 KDB인베스트먼트와 함께 컨소시엄을 구성한 현대중공업지주가 유력 인수자로 꼽혀왔지만 업계에선 일찌감치 높은 인수 의지를 보여온 GS건설도 거래에 끝까지 참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GS건설 역시 두산인프라코어의 주력 사업인 기계업을 영위하지 않는다. 여기에 최대 1조 원에 달할 것으로 관측되는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의 소송과 관련해 우발 부채가 나올 가능성이 높은 거래인 만큼 정밀한 실사가 필수다. 기술유출과 소송 탓에 일부 자료 제공이 쉽진 않았을 것이란 해석도 있다. 그러나 GS건설이 지난 10월 인수전 참여 선언을 했고, 다른 참여자들 역시 ‘실사가 부족했다’고 불만을 나타낸 것으로 전해지면서 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금융투자(IB)업계 관계자는 “대우조선해양, 아시아나항공, 두산인프라코어에서도 지속적으로 실사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며 “산은 주도의 M&A에서 반복적으로 실사와 관련한 뒷말이 나오는 점은 HDC현산이 소송에서 재실사 명분을 강화하기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아시아나항공 인수 가격도 계약금 반환 소송에서 비중있게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 HDC현산이 인수를 추진할 당시의 가격보다 큰 폭으로 낮아졌기 때문이다. HDC현산은 당초 아시아나항공 구주와 신주를 포함한 지분 61.5%를 2조 747억 원을 투입해 확보할 계획이었다. 반면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지분을 신주로만 63.9%를 가져가게 되는데, 지분 확보에 사용되는 자금은 총 1조 5000억 원이다.
서울 용산구 HDC현대산업개발 본사. 사진=이종현 기자
단순 계산으로도 HDC현산과 약 5000억 원 차이가 나는 데다, 1조 5000억 원 가운데 8000억 원은 대한항공 지주사 한진칼이 산은으로부터 지원받아 마련된다. HDC현산이 불리한 거래를 한 것처럼 비칠 수 있다. 다만 아시아나항공이 감자를 추진하고 있고, 구주가 빠진 점, HDC현산과의 거래 무산 직전 이동걸 산은 회장이 정몽규 HDC그룹 회장과의 마지막 회동에서 가격 조정 제안을 했었다는 점 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
그 밖에 금융권에선 최근 이동걸 회장이 언론 인터뷰 등에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가 불발될 경우 아시아나항공이 파산할 것이라고 밝힌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산은은 HDC현산과의 거래 과정에선 아시아나항공 정상화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다. ‘파산 가능성’이 언급될 정도로 아시아나항공 사정이 어려웠다면 줄곧 재실사를 요구해왔던 HDC현산에 힘이 실리게 된다. 이에 대해 산은 관계자는 “인수가 무산되면 뒤따를 문제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해질 것이란 취지”라고 설명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