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랑은 평민이라도 당상관들이 입던 관복인 사모관대를 하며 신부는 원래 왕비 복장인 원삼을 입고 족두리 또는 화관을 쓰며 연지곤지를 찍었다. 사진은 한국민속촌에서 시연되고 있는 전통혼례. 한국민속촌=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혼례를 인륜지대사로 보는 우리 선조들이 만든 전통 혼례는 그 의미와 형식미에 있어 매우 경건하고 장엄하며 화려했다.
전통혼례의 절차는 크게 지금의 결혼식에 해당하는 친영(親迎) 말고도 그에 앞서 행하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와 친영 후의 우귀(于歸·또는 신행), 폐백(幣帛·또는 見舅姑禮) 등으로 이루어져 매우 복잡하다.
의혼이란 서로의 혼례의사를 타진하는 절차이며 혼약이 이루어지면 사주를 보내고 결혼날 즉 연길을 청하는 납채, 신부용 혼수와 혼서 및 물목을 넣은 혼수함을 보내는 납폐가 차례로 행해진다.
친영은 보통 신부집에서 치러지며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의 순으로 이어진다.
신랑이 기럭아범과 함께 신부집에 도착해 신부의 어머니에게 기러기를 주는 것이 전안례다. 기러기는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 연분을 지킨다고 해 신랑이 백년해로의 서약으로 주는 것이다.
이어서 신랑 신부가 대청이나 마당에 마련된 초례상(醮禮床)을 두고 마주 선다. 초례상에는 밤·대추·쌀·청홍실·소나무나 대나무 등을 올려놓으며 지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다. 이때 소나무와 대나무를 올리는 것은 굳은 절개를, 밤과 대추는 장수와 다산을 뜻하는 의미에서 올리는 것이다. 또 청색과 홍색의 촛대 한 쌍을 양쪽으로 올리고 특히 청색과 홍색 보자기에 싼 한 쌍의 닭을 남북으로 갈라놓는데 이는 수탉의 울음소리에서 신선한 출발과 악귀를 쫓는 의미를 취한 것이며 암탉이 달걀을 많이 낳듯이 신부도 아이를 많이 낳으라는 희망의 표현이다.
교배례는 먼저 신부가 두 번 절한 후 신랑이 답으로 한 번 절하는 순서로 두 번 반복하게 된다. 이는 여자는 음이기 때문에 최소음수인 2회를 절의 기본횟수로 하고, 남자는 양이기 때문에 최소양수인 1회를 절의 기본 횟수로 하는 것이다.
합근례는 근배례라고도 한다. 근배란 표주박 잔이란 뜻으로 박이 원래 하나였으나 둘로 나뉘었다가 다시 합친다는 상징을 갖고 있다. 이 절차는 지역에 따라 조금 달라 신랑 신부가 같은 잔으로 마시는 곳이 있는가 하면 신랑 신부가 각각 표주박의 반쪽으로 마시는 곳도 있다. 우선 신랑이 술을 마시고 신부에게 주면 입술만 축이거나 마시는 척하는 것을 두 차례 하는 것은 공통이다.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부모와 조상, 하객에게 한 번씩 절을 한다.
대개 첫날밤을 신부 집에서 지낸다. 이는 옛날 모계사회의 유풍인 듯하다.
결혼한 신부가 시댁에 들어가는 것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 한다. 신행은 보통 3일 신행이라 하여 3일째 되는 날 하지만 신부 집이 넉넉한 경우는 수개월, 심지어는 첫아이를 낳을 때까지 묵다가 신행을 하기도 하였다. 신행은 길일을 택하여 하며 신부의 뒤에는 상객(上客)·가마꾼·하님·짐꾼 등 많은 사람이 따른다.
신부가 시가에 와서 방에 들어가 있으면 큰상이 들어온다. 신부는 큰상을 물린 다음 시가댁 어른들에게 첫인사를 올리는데 이를 폐백이라고 한다. 신부는 시집온 지 3일 만에 부엌 출입을 하여 신랑과 시부모에게 밥을 지어 올리면서 본격적인 결혼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 집의 전통혼례는 구체적인 절차에 있어 이보다 훨씬 복잡했으며 지방이나 가문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일제 이후 신식 결혼이 유행하기 시작하며 전통혼례는 급격히 쇠퇴했으며 최근 일부에서 전통혼례가 다시 부활되기는 했지만 그것도 상당 부분 간소화되거나 옛것과 판이하게 다른 부분도 많다.
그러나 신식 결혼이든 간소화된 전통혼례든 사주나 혼수함, 폐백, 신행 등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행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아마도 이러한 의식은 혼례가 불교식 유교식 신식 등으로 변하면서도 고대로부터 면면히 전해 내려온 우리 민족 고유의 의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