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4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바이든 행정부 1기 외교·안보 라인 내각을 지명했다. 사진=연합뉴스
11월 24일(미국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발표한 안보 라인 면면은 과거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떠올리게 한다. 먼저 토니 블링컨 전 미 국무부 부장관이 국무부 장관으로 내정됐다. 제이크 설리번 전 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자리에 둥지를 틀 예정이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국토안보부 이민국장이었던 알레한드로 마요르카스는 국토안보부 장관 내정자가 됐다.
과거 민주당 대선주자였던 존 케리는 대통령 기후특사로 활약할 예정이다. 애브릴 헤인스 전 중앙정보국(CIA) 부국장은 사상 첫 여성 국가정보국(DNI) 국장으로 낙점됐다. 유엔 주재대사로는 린다 토머스-그린필드 전 국무부 차관보를 지명했다. 토머스-그린필드 내정자는 바이든 정부 안보 라인업이 지니는 의미를 한 마디로 축약했다. 바이든 당선인의 단골 구호였다.
“미국이 돌아왔다.”
바이든 당선인은 새 행정부 안보 라인의 상징성을 강조했다. 바이든 당선인은 “미국은 동맹과 협력할 때 최강”이라면서 “이번 안보 라인 인사는 그런 내 핵심 신념을 상징한다”고 밝혔다. 바이든 당선인 안보 라인은 북핵문제에 대해 ‘바텀업(Bottom-up) 방식’을 적용할 수 있도록 최적화된 모양새다. 실무진 합의 없이는 정상 간 교류도 없다는 뜻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부장관 내정자. 사진=연합뉴스
특히 한반도 정세를 꿰뚫고 있는 두 핵심 인물이 향후 북핵문제를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주목된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 내정자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다. 둘은 오바마 행정부 때 북핵문제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로 대북 강경론자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하고 있다.
토니 블링컨 내정자는 바이든 당선인 안보 라인 발표 이후 “미국은 지구상 어떤 나라보다 도전(핵·테러 등)에 맞서려 다른 나라를 한데 모으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블링컨 내정자는 2017년 일본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북한이 언제든 붕괴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며 대표적인 대북 강경론자로 이름을 알렸다.
아사히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블링컨 내정자는 “북한 붕괴에 대비해 한·중·일 한반도 관계국들이 핵 시설 관리, 군 대응 방법, 김정은 붕괴 이후 북한 통치 방법 등에 대해 사전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당시 블링컨 내정자는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면 중국 측 협력을 이끌어 내야 한다”면서 “미국은 북한과 거래하는 중국 기업을 독자적으로 제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사히신문 인터뷰로부터 3년이 흐른 2020년에도 블링컨 내정자의 대북 강경론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블링컨 내정자는 9월 미국 CBS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이란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바탕으로 핵 개발 프로그램 포기 약속을 얻어냈다”면서 “북핵문제에도 이런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고 했다. 블링컨 내정자는 “한국, 일본 등 동맹국과 긴밀히 협력해 북한을 경제적으로 압박해야 한다”면서 “중국도 압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오바마 행정부 당시 미국은 이란에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하면서 핵 포기를 압박했다. 경제 제재는 이란뿐 아니라 주변국까지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란은 백기 투항했다. 2015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은 미국 등 6개국과 ‘핵 개발 프로그램 제한-각종 제재 조치 해제’를 조건으로 하는 스왑딜에 합의했다. 블링컨 내정자의 그간 발언을 살펴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설 경우 북한에도 ‘이란식 핵 합의 도출’ 기조를 적용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 대북 소식통은 “블링컨 내정자 행보를 봤을 때 향후 미 국무부는 북한 돈줄을 차단하면서 핵폐기 행동에 맞춰 제재를 완화하는 강경한 방식을 취할 것”이라고 봤다. 소식통은 “블링컨 내정자는 한반도 정세를 논함에 있어 손에 꼽히는 ‘강성’”이라면서 “‘북한이 핵 폐기에 동의하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기조로 북한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당시 북핵문제 관련 또 다른 실무자였던 제이크 설리번 내정자의 존재 역시 이런 합리적 추측을 가능케 한다”고 덧붙였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 사진=연합뉴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내정자는 1976년생으로 나이는 43세다. 바이든 당선인 취임이 확정된다면, 1950년대 아이젠하워 행정부 이후 가장 젊은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리더가 될 전망이다. 바이든 당선인 인수위원회는 설리번 내정자를 ‘이란 핵 합의 토대를 마련한 수석 협상가’라고 소개했다. 인수위원회는 “설리번 내정자가 국무부와 백악관에서 ‘태평양 재균형 전략’ 수립에도 큰 기여를 했다”고 덧붙였다. 태평양 재균형 전략은 오바마 행정부가 수립한 대표적 대중국 견제 전략으로 알려져 있다.
설리번 내정자의 전략적 감각 역시 오바마 행정부 실무진 활동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설리번 내정자는 9월 비영리기관 월드 어페어스 카운슬(World Affairs Council) 화상 세미나에서 한반도 정세를 둘러싼 자신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설리번 내정자는 “동맹국과 협의를 통한 비핵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설리번 내정자는 “장기적으론 북한의 완전 비핵화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면서 “단기적으로는 북한 핵 능력 억제에 외교적 역량을 쏟아 부어야 한다”고 했다.
중국 거주 대북 소식통은 “설리번 역시 블링컨 내정자와 마찬가지로 이란 핵 합의에 적지 않은 공을 세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면서 “설리번 내정자 또한 북한에 이란식 핵 합의를 대입할 적임자로 보인다”고 했다. 소식통은 “북한이 정상 간 소통을 바탕으로 제재를 완화하는 트럼프 행정부 ‘톱다운(Top-down)’ 기조에서 어느 정도 외교 성과를 낸 바 있는데 바이든 행정부에선 기존 방식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라고 했다.
또 다른 북한 소식통은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보다는) 이란 핵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고 이를 먼저 해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북한밖에 없는 상황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것”이라며 “트럼프 행정부 4년은 북한이 경제 제재 압박을 해결할 수 있는 골든타임이었는데, 시기를 놓친 모양새가 됐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설 경우 안보라인 투톱으로부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강력한 압박을 받을 수 있다”면서 “북한 내부에서도 미국 새 행정부와 외교전에 나서는 데 있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뚜렷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트럼프 행정부 ‘톱다운’ 외교방식의 대표적 결과물인 판문점 정상회담. 사진=청와대 제공
문재인 정부 입장에서도 임기 막판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완성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에 있어 ‘종전선언’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다. 복수 북한 소식통은 바이든 행정부가 이란식 협의 모델을 바탕으로 북한을 압박할 경우 문재인 정부가 그간 이어왔던 남북협력 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이인영 통일부 장관은 경제·보건 분야에서 남북협력 필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2021년 정부 예산안에도 남북협력 예산에 대폭 증액돼 심사를 거치는 중이다. 6월 남북연락사무소 폭파 사건과 9월 공무원 피격사건이 불거졌음에도 적극적인 대북 평화 제스처를 취하던 문재인 정부는 한미동맹과 남북관계 중 우선순위를 따져야만 하는 입장에 놓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바이든 당선에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11월 27일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 국가정보원 보고 내용에 따르면 북한이 “해외 공관에 미국을 자극하는 대응을 하지 말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대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며 단속을 예고했다는 후문이다. 국회 정보위 여당 간사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북한에서) 극도로 발언에 신중하라는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고 했다.
미국 대선 결과와 관련해 관망세를 보이며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사진=일요신문DB
국정원은 “오바마 행정부 시대 ‘전략적 인내’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과 동시에 바이든과 김정은의 정상회담 성사에 대한 기대감이 공존한다”고 보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정원은 2021년 초 북한이 8차 당대회에서 열병식을 개최할 예정이라면서 이런 계획이 미국 신 행정부에 군사적 과시를 하려는 의도라고 분석했다.
북한 소식통은 “북한 관영매체가 여전히 미 대선 결과에 대해 보도하지 않고 있다”면서 “북한 지도부가 이번 미 대선 결과와 관련해 얼마나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소식통은 “통상적으로 보름 이내에 미 대선 결과가 북한 관영매체를 통해 알려졌던 것과 비교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라면서 “북한 지도부에서도 향후 대미 외교 정책 수립에 있어서 장고를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고 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