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진서 9단(왼쪽)과 박정환 9단의 남해 7번기 3차전. 심판을 맡은 백성호 9단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이런 극한대결은 과거에도 드물게 있었다. 1940년대 유행하던 우칭위안(오청원)의 10번기와 1985년 한 해를 들쑤셨던 ‘위험대결’이 그랬다. 과거 오청원의 10번기 때는 진 쪽은 성적이 급락하거나 최악의 경우 은퇴한 기사까지 있었다.
월간바둑이 주최했던 위험대결은 당시 ‘절대 강자’ 조훈현에게 정예기사 다섯 명이 돌아가며 대결하는 치수고치기 10번기였다. 매달 한 판씩 벌어지고, 2연승 하면 치수가 고쳐지는 방식. 도전자 다섯 명은 장수영·서능욱·김수장·백성호·강훈이었고, 치수는 정선으로 시작했다. “같은 프로끼리 정선으로 시작하는 건 말이 안 된다”라고 매우 분개한 기사도 있었지만, 4월 대결이 끝나고 도전 5강 성적표는 1승 3패에 불과했다. 강훈은 이겼지만, 다른 기사들이 내리 3연패 해 치수는 고쳐졌고, 두 점으로도 이미 한판 진 상황, 제5국에서 나선 기사가 백성호였다.
1985년 ‘위험대결’에서 백성호(왼쪽)와 조훈현이 맞붙었다. 사진=월간바둑 제공
1985년 백성호는 지금 박정환 나이보다 두 살이 많았다. 조훈현에게 두 점을 깔아야 하는 위험대결을 앞두고 “이 바둑을 두고 싶어 두는 것도 아닌데 세상은 이상한 눈초리로 봐요. 신문에서도 지면 망신이고, 이기면 당연하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아무리 쓰는 사람 자유라지만, 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도 생각해야죠. 어떻게 소문이 다 나서 제 장인어른이나 친구들이 걱정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해요”라며 불만을 토로했었다.
5국에선 두 점으로 9집을 남겨 도전 5강의 체면을 세웠다. 이 대국 승리를 기반으로 도전 5강은 최후엔 5승 5패 균형을 맞춰 원점 치수 정선으로 돌아갔다. 10번기 최종국에선 조훈현이 정선으로 백성호를 꺾었다. 7번기를 마친 신진서에게 “지금 어린 프로 5명과 이렇게 대결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라고 묻자 “두 점은 커녕 정선도 만만치 않아요”라고 말한다.
남해 7번기 3차전 심판을 맡은 백성호 9단. 35년 전 조훈현과의 위험대결을 회고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언제나 일인자가 존재하면 그 이상의 기사가 안 나올 것처럼 느껴집니다. 1980년대는 조훈현이 60세까지 일인자를 유지할 줄 알았어요. 이창호가 종횡무진하던 시절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박정환 다음에 신진서가 나오는 건 순리죠. 이번에 연전연패했지만, 박정환은 ‘내가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시 박정환은 고수입니다. 제가 바둑을 48년 두면서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에요. 고수는 모든 게 내 탓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래야 무오(無吾)의 경지에서 무심(無心)으로 둘 수 있어요.”
백성호는 1956년생으로 1972년에 입단했다. 중학교 시절에 처음 바둑을 접했다. 공부도 꽤 잘해서 반에서 1, 2등을 다퉜다고 한다. 배문중학교 이사장이 한국기원 부이사장이라 바둑부와 지도선생님이 있었다. 여기서 단수와 축을 배웠고 1년 만에 1급이 되었다. 약 3년의 수련 끝에 고2 말에 프로 입단까지 성공했다.
“당시는 스무 살이 넘어 입단하는 게 보통이었고, 보통 절에 들어가서 공부했죠. 전 원효로에 있는 기원에 나가서 두세 점 상수를 스승 삼아 배웠습니다. 볼 책도 별로 없던 시절이에요. 바둑책은 사카다의 묘, 오청원의 호선포석법·중반전술, 조남철 선생의 실전정석정해까지 네 권 정도 봤어요.” 당시 서울 최고수는 김학수, 강원도 허장회, 부산 일인자로 김일환이 이름을 날렸던 때다. 입단 동기는 만 14세 서능욱이었다.
“프로가 되면서 세상을 다 가진 줄 알았지만, 현실은 달랐어요. 프로기사가 되어도 암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돈이 떨어져 종로1가 음악다방 ‘보리수’에서 DJ 생활도 했어요. 아르바이트로 돈이 모이면 쌀과 양초를 사서 양상국 등 동료기사와 함께 춘천 청평사에 들어가서 공부했죠. 그러다 조훈현 9단 후임으로 공군으로 갈 기회가 생겨 입대했습니다.”
1972년 한중일 바둑선수권 학생대표. 아랫줄 왼쪽부터 백성호 김동면 김일환. 사진=월간바둑 제공
바둑 팬들에겐 글쓰기와 방송출연으로 이미 친숙한 얼굴이다. 제한기전에선 우승도 한두 번 했지만, 승부보단 영업(?)에 더 재능을 발휘했다. 김우중 총재 시절 초기 한국기원은 대부분 프로기사를 대기업에 취업시켜주었다. 일주일에 한 번 나와 기우회원을 지도하는 자리였는데 보통 3~5년이면 그만두었다. LG에 들어간 백성호는 무려 15년 동안 그 직을 이어갔다. 그 인연으로 LG배 세계기왕전 창설 당시도 크게 역할을 했다. 독일에서 10년 넘게 열리고 있는 기도컵, 매년 합천에서 벌어지는 영재정상대결, 러시아 국제대회 등 크고 작은 대회를 만들 때 교량 역할을 했다.
백성호(왼쪽)와 하찬석의 1992년 대국 모습. 사진=월간바둑 제공
‘합천거사’ 하찬석과 인연도 빼놓을 수가 없다. 하찬석이 국수, 왕위를 쥐고 바둑계를 호령하던 시절, KBS 바둑왕전 준결승에서 백성호와 마주 앉았다. 공배를 메우고 서로 지긋이 반상을 바라보다 백성호가 먼저 “반집이죠?”라고 물었다. 하 국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아. 내가 반집 졌네”라고 말한다. 백성호는 당황해서 “아니요, 제가 졌는데요?”라고 설전이 시작되었다. 서로 자기가 졌다고 논쟁하다 결국 계가를 했다. 백성호가 정확했다.
이겨서 기분이 좋았던 하 국수는 “너는 내 밑에서 6개월만 공부하면 일인자가 될 수 있겠다. 따라 와라” 해서 합천 해인사에서 총 9개월 정도 함께 있었다. 백성호는 “여덟 살 많은 형님이라 믿고 갔는데 공부는커녕 술만 하도 먹여서 ‘이러다 죽겠다’하고 나중엔 도망치듯 올라왔다”면서 웃었다.
“2010년 하 국수가 타계하고 합천에선 그를 추모하는 대회들이 생겼습니다. 8년 전 영재정상대회가 생길 때 합천을 찾아간 이유였어요. 1회 대회에 갓 입단한 신진서가 나와서 정선으로 이창호를 꺾고 이름을 날렸죠”라고 회상했다. “최근엔 프로바둑은 보는 재미가 덜하죠. 인공지능(AI)이 나와서 바둑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건 사실이지만, 젊은 기사들에게서 스타일, 즉 기풍이 사라졌어요. 그냥 이기는 수가 스타일이 되었습니다. 원래 바둑은 천천히 두면서 즐기고 사색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초를 다투는 최근 세태에 이런 정신적 여백이 없어진 듯해 조금 섭섭합니다”라고 말한다.
인터뷰 마지막엔 18세부터 평생을 외워온 백락천의 시 구절 일부를 들려주었다. ‘부싯돌 불꽃처럼 찰나를 사는 몸, 달팽이 뿔처럼 좁은 세상에서 무엇을 다투랴.’
[승부처 돋보기] 초반에 살짝 꼬인 스텝 슈퍼매치 남해7번기 최종국 ●박정환 9단 ○신진서 9단 2020.12.02. 장면도 한국 1, 2위 기사 신진서와 박정환이 대결한 남해 7번기 3차전에서 남은 두 판도 모두 신진서가 이겼다. 7전 전승이다. 신진서는 올해 65승 7패로 꿈의 승률 90.28%를 기록하며 무적행진 중. 특히 박정환을 상대로 최근 12연승했다. 7번기 마지막 대국은 백을 든 신진서의 완승국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환이 딱히 잘못 둔 수를 찾을 수 없다. 그냥 초반에 스텝이 살짝 꼬였을 뿐이다. 장면도 백1이 온 후도 정형화된 진행이다. 흑4로 민 수는 백9, 11을 예상하고 둔 수다. 흑12가 약간 완착이다. 백15는 그 미세한 빈틈을 정확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이후 변화는 외길 수순에 가까웠는데 AI 흑승률이 30% 대로 주저앉았다. 7번기는 대부분 중반 이후 박정환에게 역전 기회가 한 번씩은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최종국에선 AI 흑승률이 처음부터 끝까지 완만한 하향곡선을 그렸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