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립선언서-일본발 서드 임팩트에 맞닥뜨린 우리의 현재 기록’(서찬휘 저, 생각비행)
일본 정부가 외교적 결례를 반복하고 있는 와중에 터진,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이 같은 반응은 ‘신세기 에반게리온’이 지니는 상징성과 더불어 이 작품에서 사다모토가 지니고 있는 위치가 결부되면서 말 그대로 태풍의 눈이 되었다.
2019년 8월 23일, 한국의 래퍼 데프콘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인 데프콘TV에 영상 한 편을 올린다. 3분 58초짜리 짧은 영상에서 데프콘은 작업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아스카 랑그레이(‘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의 대형 화보를 찢었다.
한 사람의 덕후로서 온갖 방송 활동을 하며 아스카에 대한 사랑을 한껏 드러냈던 데프콘의 탈덕 선언은, 일본과의 연결점에 얽매일 필요가 없이 꾸준히 성장해온 우리네 덕후 문화의 자긍심이 낳은 상징적인 ‘덕립선언’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본 최대 국제 예술제, 아이치 트리엔날레 2019 행사의 주제전이었던 ‘표현의 부자유전-그 후’에서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조각 작품인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시작 사흘 만인 8월 3일 중단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전시회의 주제였던 ‘표현의 부자유’가 말 그대로 일본 사회 안에 횡행하는 표현의 부자유를 나타내는 형태로 완성된 것.
일요신문에 ‘서찬휘의 만화살롱’을 연재한 만화 칼럼니스트 서찬휘 씨가 2020년 현재 한국의 오덕 문화를 진단하고 정리하는 책을 펴냈다.
서 씨는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의 오덕 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형태로 변화했다고 밝히며, 소위 ‘덕질’의 주류가 만화와 애니메이션에서 콕 집어 ‘K-POP’으로 그야말로 완전히 넘어갔다고 진단했다.
저자는 “급기야 코로나19 사태로 만화 애니메이션 ‘아키라’ 속 2020년 도쿄올림픽 중지 설정이 정말로 현실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상황에서 오늘날 대중에게 이른바 ‘덕질’이란 만화와 애니메이션 쪽과는 점점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영역이 되고 있다”고 풀이했다.
이어 “한 시기 우리에게 많은 영감과 즐거움을 줬던 일본발 오덕 문화들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한계와 맞물리며 한국의 어떤 것에도 우월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며 “일본 문화가 그들의 전근대 정치와 발맞추어 갈수록 동어반복과 자기 복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더는 새롭고 힙한 문화로서의 가치를 주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은 완전히 다른 세대에 최적화되어 나름대로 잘 만들어지고 있다. 한국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등은 철저하게 ‘더 넓은’ 대상, 다시 말해 대중 전반을 향한 행보를 펼치고 있다.
저자는 “‘덕립선언서’의 내용처럼 일본을 넘어 덕립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 한국의 오덕 문화를 주목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며 “이 책의 내용은 그야말로 우리 덕후 문화의 독립선언문에 다름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국 대중문화의 성격과 저변이 ‘한국적’이라는 모호한 딱지를 붙이고서야 자부심을 억지로 제조할 수 있었던 시기를 한참 뛰어넘은 상태에 도달해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났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이채훈 기자 freeinterne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