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13승 6패를 기록한 KT 소형준이 고졸 투수로는 14년 만에 신인왕을 차지했다. 사진=연합뉴스
소형준은 한국야구기자회 소속 언론사와 각 지역 언론사 취재기자 112명이 참여한 신인왕 투표에서 560점 만점에 511점을 받았다. 1위 표(5점) 98장, 2위 표(3점) 7장을 휩쓴 결과다. 2위 홍창기(LG 트윈스·185점), 3위 송명기(NC 다이노스·76점)를 큰 격차로 따돌렸다. 만장일치가 아닌 게 의아할 정도였다. 실제로 투표인단 중 7명이 소형준을 1~3위 안에 찍지 않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상식 후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 정도로 압도적인 한 해를 보냈다.
소형준은 수상 후 “입단할 때 추상적인 목표로 삼았던 신인상을 실제로 받게 돼 기쁘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만큼 자만하지 않고, 더욱 발전해 리그를 대표할 수 있는 투수로 거듭나고 싶다”고 했다.
올해 창단 후 최고의 성적(정규시즌 2위)을 낸 KT는 소형준 덕에 집안잔치를 치렀다. 외국인 타자 멜 로하스 주니어(30)가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로 뽑혀 2015년 1군 진입 후 6시즌 만에 첫 MVP를 배출했다. 또 같은 해 MVP와 신인왕을 석권한 역대 6번째 팀으로 남게 됐다. 1985년 해태 타이거즈(MVP 김성한·신인왕 이순철), 1993년 삼성 라이온즈(MVP 김성래·신인왕 양준혁), 2006년 한화 이글스(MVP·신인왕 류현진), 2007년 두산 베어스(MVP 다니엘 리오스·신인왕 임태훈), 2012년 넥센 히어로즈(MVP 박병호·신인왕 서건창)에 이어 8년 만의 경사다.
#14년 만에 등장한 ‘10대 괴물’ 소형준
올 시즌 소형준의 성적이 수상 이유를 증명한다. 개막과 동시에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꿰찬 그는 데뷔 첫 시즌인 올해 26경기에 등판해 13승(6패)을 올렸다. SK 와이번스 박종훈과 함께 국내 투수 최다승이다. 고졸 신인으로는 역대 아홉 번째이자 2006년 류현진(당시 한화·현 토론토 블루제이스) 이후 14년 만에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평균자책점도 3.86으로 준수하다. 프로 한 시즌 만에 ‘유망주’ 꼬리표를 떼고 KBO리그 정상급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KT가 최초로 포스트시즌 무대를 밟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역사적인 KT의 가을 야구 첫 경기 선발도 소형준이었다. 그는 플레이오프(PO) 1차전 마운드에 올라 ‘가을의 골리앗’ 두산 타선을 6⅔이닝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14년 전 류현진을 연상케 하는 배짱투였다. KT가 2-3으로 패했지만, 스포트라이트는 두산이 아닌 소형준에게 쏟아졌다.
이강철 KT 감독은 경기 후 “더는 칭찬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모처럼 국가대표급 투수가 나온 거 같다. 내가 선수였을 때보다 훨씬 잘했다”고 흐뭇해했다. 적장인 김태형 두산 감독조차 “웬만해선 신인 투수를 포스트시즌 첫 경기에 낼 수 없다. 그런데 소형준을 보니, 이강철 감독이 1차전 선발로 쓴 이유를 알겠더라”고 감탄했다. 소형준이 ‘올해의 신인’을 넘어 차세대 국가대표 에이스로 발돋움할 만큼 성장했다는 얘기였다.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소형준은 고교 시절부터 묵직한 구위와 노련한 투구를 앞세워 청소년 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지난해 세계 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 일본전 선발도 소형준이었다. 대학생 선수들이 주축을 이룬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대표팀에서도 그랬다. 고교생 4명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된 소형준은 이 대회에서도 형들을 제치고 중요한 경기에 모두 나섰다. 어딜 가나 에이스였던 소형준을 KT가 놓칠 리 없었다. 때마침 연고지역 학교(유신고)에 재학 중이던 그를 망설임 없이 1차 지명했다. 소형준은 계약금 3억 6000만 원을 받고 당당하게 프로에 입성했다.
첫 등장도 화려했다. 5월 8일 잠실 두산전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성적은 5이닝 5피안타 2실점. 무난한 호투로 선발승을 챙겼다. 다음 경기인 5월 15일 삼성전(6⅓이닝 5실점 2자책점)에서도 승리했다. 양일환(1983년 삼성), 김진우(2002년 KIA 타이거즈), 류현진에 이어 통산 4번째 데뷔전 포함 2연속 선발승을 기록했다.
6월에는 첫 프로 풀타임 시즌의 체력적 한계로 고전했지만, 7월 들어 2군에서 구위를 다듬은 뒤 되살아났다. 소형준은 9월 12일 수원 한화전에서 6⅓이닝 2실점으로 역투하면서 데뷔 첫 해 10승을 채웠다. 막내 구단 KT에 찾아온 복덩이 막내 투수는 어느덧 이강철 감독이 가장 믿고 기용하는 ‘에이스 카드’가 됐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 신인 투수에게는 더 바랄 게 없는 한 해. 다만 리그를 들썩거리게 한 이 신인 투수의 피칭을 많은 야구팬이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다. 수많은 관중이 모인 잠실구장(LG전)에서 ‘괴물’의 탄생을 알린 류현진과 달랐다. 소형준이 데뷔전을 치르던 날, 수원 KT위즈파크 관중석은 텅 비어 있었다. 코로나19 여파로 무관중 경기를 치르던 때다.
시즌 도중에도 마찬가지다. 코로나19는 좀처럼 잠잠해지지 않았다. 고교 선수들이 꿈꾸기 마련인 프로야구 만원 관중의 함성은 올해 신인들에게는 다른 세상 얘기였다. 소형준이 데뷔 후 가장 많은 관중을 만난 경기는 PO 1차전. 관중석의 50% 입장이 허용돼 총 8200명이 고척스카이돔을 찾은 날이다.
당사자도 아쉬움이 크다. 소형준은 시즌 도중 승리 투수가 될 때마다 “팬들의 박수와 응원이 없어 아쉽다. 야구장에 팬들이 돌아오는 날을 기다리겠다”는 소감을 밝히곤 했다. 신인왕 수상 후에도 마찬가지다. 올해 가장 뜻 깊은 경기로 데뷔전과 PO 1차전을 꼽은 뒤 “처음으로 팬들이 입장한 가운데 던졌던 경기도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강조했다. 내년 시즌 가장 큰 희망도 그 연결선 위에 있다. 그는 “다음 시즌엔 코로나 사태가 진정돼 올해보다 더 많은 팬 앞에서 공을 던져보고 싶다. 팀이 또 포스트시즌에 올라 더 오래 야구를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2021시즌, 더 강해진 2년차 투수 소형준이 마운드 위로 쏟아지는 함성과 환호를 기다리고 있다.
소형준 이전 마지막 ‘10대 괴물 투수’는 한화에서 데뷔한 류현진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소형준 이전 등장했던 ‘괴물 고졸 신인’ 계보
올해 소형준의 등장이 더 반가웠던 건, 그가 14년간 나타나지 않았던 ‘10대 괴물 투수’기 때문이다. 소형준에 앞서 고졸 신인 투수가 입단 첫 해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한 사례는 역대 8번밖에 없다. 그리고 그 8명은 모두 KBO리그 39년 역사 중 15년(1992~2006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탄생했다. 1992년 이전에는 많은 구단이 대졸 신인을 선호했고, 2006년 이후로는 데뷔 첫 해 리그를 장악한 고졸 선발 투수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2007년 데뷔한 김광현(당시 SK·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조차 첫 정규시즌에는 3승(7패)에 그쳤을 정도다.
1992년 염종석(롯데)이 17승, 정민철(빙그레)이 14승을 각각 올리면서 처음으로 고졸 신인 투수도 프로에서 곧바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고졸 신인을 향한 프로 구단들의 평가가 달라진 계기였다. 2년 뒤인 1994년엔 주형광(롯데)이 11승으로 그 계보를 이었다.
그 후 1998년 김수경(현대 유니콘스)이 11승, 2000년 조규수(한화)가 10승, 2002년 김진우가 12승, 2004년 오주원(현대·당시 이름 오재영)이 10승을 차례로 올렸다. 그리고 2006년, 마침내 류현진이라는 ‘괴물’이 등장해 순식간에 리그를 평정했다. 18승으로 대졸과 고졸을 모두 포함한 역대 신인 투수 최다승 고지를 밟으면서 다승·평균자책점·탈삼진 1위를 휩쓸었다.
이 8명 중 신인상을 수상한 선수는 딱 절반이다. 염종석, 김수경, 오주원이 그해 최고의 신인으로 뽑혔고, 류현진은 신인왕뿐 아니라 정규시즌 MVP까지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다. 반면 정민철은 신인으로는 ‘역대급’ 성적을 내고도 하필이면 염종석과 같은 해 데뷔한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주형광은 우승팀 LG에서 ‘신바람 야구’를 주도한 유격수 유지현에게 신인왕을 내줬다. 조규수는 SK 이승호, 김진우는 현대 조용준에게 각각 밀렸다.
#17승 염종석-14승 정민철의 고졸 신인 라이벌전
특히 1992년 염종석과 정민철의 ‘괴물’ 고졸 신인 대결은 많은 야구팬이 기억하는 명장면 중 하나다. 그해 부산고를 졸업하고 롯데에 입단한 염종석은 첫 해부터 17승 6세이브, 평균자책점 2.33을 기록해 야구계를 놀라게 했다. 까까머리 열아홉 신인 투수가 7년 연속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했던 ‘대투수’ 선동열의 뒤를 이어 1위에 오른 것이다. 여기에 대학 진학 한 달 전 어머니가 큰 교통사고를 당하자 입원비 마련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프로행을 택한 사연까지 심금을 울렸다. 계약금 1500만 원, 연봉 1000만 원에 롯데와 계약한 염종석은 그해 신인왕은 물론이고 투수 부문 골든글러브까지 가져갔다.
다만 이후 선수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첫 해부터 200이닝을 넘게 던지면서 팔꿈치에 무리가 온 게 문제였다. 이듬해에도 10승을 채우긴 했지만 평균자책점은 3.41로 나빠졌다. 이후 한 번도 두 자릿수 승리를 하지 못하고 은퇴했다.
정민철은 입단 당시 동기생 박찬호, 임선동, 조성민 등의 명성에 밀려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팀 내에서도 1차 지명을 받은 대졸 신인 지연규가 더 기대주로 꼽혔다. 데뷔 첫 경기에 중간투수로 등판했다가 만루홈런을 얻어맞기도 했다. 그러나 선발 투수로 기용되기 시작하면서 재능을 꽃피웠다. 33경기에서 195⅔이닝을 소화하면서 14승 7세이브, 평균자책점 2.48로 활약했다. 완투도 11번이나 해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그해 함께 데뷔한 염종석이 정민철보다 조금 더 잘했다. 다른 시즌이라면 신인왕을 받고도 남을 성적이었지만, 트로피는 염종석에게 돌아갔다.
대신 정민철은 더 오랫동안 잘 던졌다. 첫 해 14승을 시작으로 1999년까지 8년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따냈다. 이강철(해태)의 10년 연속 10승에 이어 여전히 리그 공동 2위에 올라 있는 기록이다. 1990년대 최고의 완투형 선발 투수로 이름을 날렸고, 팀 타선이 침체에 빠진 시기에도 묵묵히 마운드를 지킨 ‘암흑기의 에이스’였다. 1999년엔 한국시리즈에서 4승 중 2승을 따내면서 팀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두 투수는 데뷔 첫 시즌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사상 최초이자 현재까지는 유일한 고졸 신인 한국시리즈 선발 맞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그해 프로야구를 뜨겁게 달군 롯데 염종석과 빙그레 정민철이 최후의 무대에서 맞대결한다는 것만으로도 경기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역시 소문난 잔치에는 의외로 먹을 것이 없는 법이다.
프로 첫 해부터 200이닝 안팎을 소화한 두 고졸 신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염종석은 팔꿈치 통증이 이미 시작된 상태였고, 정민철은 2차전에서 8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한 뒤 이틀만 쉬고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애초에 진검승부가 불가능했다. 염종석은 6회 집중타를 허용하면서 5⅔이닝 3실점으로 물러났고, 정민철은 사흘 만의 선발 재등판을 이기지 못하고 2회 조기 강판했다. 경기는 롯데의 6-5 승리. 롯데는 그해 창단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