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남재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세요.” 재판장이 말했다.
“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다음 이병기 피고인,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엄상익 변호사
“마지막으로 이병호 피고인 최후진술을 하시죠.”
“저는 인생에서 이 최후 진술이 다시없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평생을 정보기관에 몸 바쳐 왔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만들고 싶은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중심체가 필요했습니다. 그게 중앙정보부였습니다. 정보기관은 원래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는 게 사명입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비전을 실현시키기 위해 정보기관에게 손과 발의 역할도 시켰습니다. 제가 처음 들어갔던 시절 정보기관은 가장 애국적인 조직이었습니다. 우리들은 충성심으로 피가 끓었습니다. 저는 정보기관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끊임없이 정권에 휘둘리며 과오를 범한 것도 인정합니다.”
그는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권력기관 최후의 수장으로서 그들만의 자존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는 김정은 암살 공작을 전개하면서 남북 최후의 정보전쟁을 수행했다. 그가 덧붙였다.
“지금의 정권은 사람들을 네 편 내 편으로 가르고 증오를 키웁니다. 상대편을 적폐로 몰아 법을 동원해 죽이고 있습니다. 제가 본 법정이 그런 곳이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통합과 치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법원은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촛불정권에 대한 지적이었다. 그 말에 30년이 넘게 법의 밥을 먹어온 나는 부끄러웠다. 대법원이 정치권력화 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대통령이 되자 국정원의 특활비를 오랫동안 청와대에서 격려금 등으로 사용해 온 사실을 보고 받았다. 대통령 직속인 국정원의 예산사용은 대통령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역대 대통령들이 하던 대로 하라고 명령했다. 검찰은 그 돈을 대통령이 받은 뇌물이라고 기소했다. 그리고 국정원장들을 전문직 회계공무원으로 간주해서 국고손실범으로 기소했다. 판사들은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보면 모든 장관이나 대법관도 그렇게 확대 해석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전화를 걸어 뇌물을 요구할 사람으로 본 것 같지는 않았다. 1심과 2심의 판사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달랐다. 검찰의 주장대로 그 돈을 박근혜 대통령이 받은 뇌물로, 국정원장을 회계직원으로 보라고 명령하면서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다시 열린 법정에서 재판장이 딱한 표정으로 국정원장들을 내려다보며 혼잣말같이 했다.
“저희는 국정원장이 회계관계 직원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에게 간 돈도 뇌물이 아니라고 했는데 대법원이 그렇게 하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법관의 양심에 배치되는 재판을 해야 하는 공허한 법정이었다. 권력이 법에 관여하면 법치는 실종된다. 결론은 정해져 있었다. 와글거리는 변호사들의 법리논쟁은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유신 시절도 그랬다. 민주화운동의 피고인이, 그리고 인권변호사가 아무리 외쳐도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재판은 요식행위일 뿐이었다. 촛불혁명 후의 적폐청산재판도 비슷한 것 같다.
이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운동권 출신들은 유신 시절의 나쁜 사법부를 배워 모방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이 그 시절 주장했던 것은 민주법치가 아니었던가. 악법도 법이라는 판사들의 실정법 논리에 악법은 없애야 한다고 했던 그들이다. 당시 인권변호사들은 법정이라는 공간과 시간을 넘어 세상과 역사에 대해 기록을 남겼었다. 양지가 음지가 됐다. 나는 국정원장에게 한 줌의 정치철학이나 자존심이 담긴 최후진술을 권고했다. 법치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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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