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기업 구조조정이 활발히 진행된 시기로는 크게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꼽힌다. 예상치 못한 변수로 인해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급변했고 대규모 기업 부실화가 진행됐다. 최근 시중은행 구조조정 전문가들과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코로나19가 관통하고 있는 2020년이 새로운 기업 부실화와 구조조정이 진행된 시기로 기록될 것으로 본다.
기업 부실화가 심각해질 때마다 정부, 금융권, 산업계의 시선이 몰리는 곳이 있다. 산은이다. 산은은 국책은행으로서 기업 구조조정부터 산업 재편 역할을 주도한다. 그러나 산은의 순탄치 않은 구조조정 역사 탓에 늘 물음표와 우려가 따라 붙었다. 몸집이 큰 기업의 구조조정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상대적으로 관련 산업 전문성이 낮은 탓에 경영 정상화가 지지부진하거나 투입했던 자금 회수를 두고 저울질을 하다 매각 골든타임을 놓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혈세로 부실기업에 산소호흡기만 달아주고 있다는 지적이 뒤따랐다. 그런데 최근 산은을 향한 시선엔 기대가 섞여있다. 구조조정의 방향과 방식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산은이 관리하던 부실기업들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한 데 이어 매각과 인수합병 등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고 있다.
이동걸 KDB산업은행 회장. 사진=이종현 기자
산은과 시장 안팎에선 이 같은 변화는 이동걸 회장의 취임 이후부터 시작됐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회장직에 오른 직후 “부실기업 숙제를 완전히 끝내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를 이행하는 한편 성공 사례까지 나오고 있어서다. 10년 가까이 산은의 ‘앓던 이’였다가 2018년 매각 이후 빠르게 경영 정상화가 이뤄져 지금은 미래가치에서도 높은 평가 받는 금호타이어가 대표적이다.
이동걸 회장의 또 다른 ‘작품’으로 꼽히는 거래들도 일사천리로 진행 중이다. 대우조선해양과 두산그룹, 아시아나항공 등이 정상화를 위한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해외 일부 국가의 기업결합 심사가 진행 중이고, 두산그룹은 두산인프라코어 매각만 성공하면 사실상 구조조정이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게 된다. 아시아나항공은 아직 적지 않은 숙제가 남았지만 현재 방향성이 뒤집힐 가능성은 낮다. 3건의 거래 모두 이 회장이 전면에 나서 진두지휘하는가 하면, 과감한 결단을 통해 문제를 정면돌파 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근 그에게 ‘해결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이유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논란거리가 불거지고 있다. 이동걸 회장의 거래 방식에 대한 지적이다. 한 시중은행 구조조정 전문가는 “최근 진행 중인 거래들의 공통점이 있다. 부실기업뿐만 아니라 산업 전반의 위기를 강조해 명분을 앞세우고, 관련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특정 경쟁 기업에 넘기는 방식”이라며 “기업 정상화, 경쟁력 강화는 물론 앞으로 들어갈 정책자금 등 정부 지원도 최소화할 수 있다는 논리지만 부작용이 따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대표적인 것이 특정 기업에 대한 특혜 논란이다. 대우조선해양은 현대중공업그룹이 인수했고, 두산인프라코어 역시 지난 12월 10일 현대중공업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했다. 아시아나항공은 대한항공과 통합한다.
서울 중구 대우조선해양 서울사무소. 사진=박정훈 기자
대기업이 경쟁 기업을 인수하는 방식 자체는 과거 외환위기 구조조정 때와 유사하지만 세부 내용은 크게 다르다. 당시엔 정부가 인수합병을 사실상 강제하는 방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인수 기업에 당근을 줬다. 현대중공업은 조 단위가 넘어가는 2개의 빅딜에 뛰어들면서도 자금부담을 크게 줄였다. 회사가 대우조선해양 인수에 투입하는 자금은 약 4000억 원이고, 두산인프라코어의 경우엔 산은의 100% 자회사인 사모펀드 KDB인베스트먼트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다. 대한항공은 아시아나항공 인수자금 전액을 산은과 유상증자를 통해 주주로부터 얻게 된다.
오너 일가 측에 유리한 ‘맞춤형’ 거래의 흔적들도 보인다. 현대중공업그룹의 경우 최근 수년 사이 전문경영인 체제에서 정기선 부사장을 중심으로 한 오너 경영 체제로 전환 중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와 이와 연결된 지배구조 개편은 정 부사장의 경영승계 작업과도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산은은 복잡한 거래 구조 속에서 정 부사장 등 오너일가의 경영권은 보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구체적으로 산은은 현대중공업지주가 아닌 그 아래 새로 설립한 한국조선해양이라는 중간지주사가 보유하던 대우조선해양 지분을 현물 출자하고 2대주주가 됐다. 이 대가로 현대중공업지주는 전환상환우선주와 보통주를 발행하고 산은에 넘겼는데, 전환상환우선주 청구 기간이 연장 기간을 포함해 최대 10년이다. 여기에 전환 시점에 산은이 최대주주가 될 것으로 예상되는 경우에는 전환권을 청구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경우라도 산은이 오너 일가의 경영권을 흔들게 되는 일은 없는 셈이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통합 과정은 현대중공업과의 거래와는 정반대다. 산은은 한진칼의 신주를 매입해 3대 주주로 올라서면서, 한진칼 내부에 경영평가위원회와 윤리경영위원회 등을 설치해 사실상 경영 활동을 감시, 관리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사회에는 산은 측 사외이사 3명을 선임해야 하고, 대한항공 주식 등에 대한 담보 제공과 처분 제한에 관련한 조항도 마련했다. 산은이 제시한 각종 의무 사항을 위반하면 5000억 원의 위약금을 부담하는 내용도 담겼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입장에선 굴욕적인 내용들이지만, KCGI 주주연합과 경영권 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산은이 조 회장의 강력한 우군이 될 것으로 업계는 해석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금호아시아나 본사. 사진=연합뉴스
시장에서 절대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업의 탄생을 두고 우려의 목소리도 작지 않다. 당장 국내외 기업결합심사 문제와 연결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승인을 하더라도 해외 국가 가운데 한 곳이라도 어깃장을 놓으면 거래가 최종 무산된다. 현재 대우조선해양과 현대중공업 기업결합 승인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거래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더라도, 현대중공업은 조선·건설기계 분야에서, 대한항공은 항공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가지게 되는 점도 논란이다.
다만 한 PEF운용사 관계자는 “과거 독점 기업의 횡포와 부작용 등이 부각돼 부정적 인식이 있지만 세계적으로는 지배력을 높이고 그로 인한 시너지 효과를 높이는 M&A(인수합병)를 하는 추세로 바뀐 지 오래다. 국가 기간산업의 경우 경쟁력을 높여 세계 시장에서 위상이 높아지면 시너지 효과는 물론 이동걸 회장의 방식이 구조조정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걸식 구조조정’의 결말이 나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남아있다. 이 때문에 논란은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대해 앞서의 산은 주도 거래에 깊게 관여한 한 인사는 “학계에서는 정부가 부실기업을 떠맡아 지원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비효율과 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킨다는 견해가 있다. 국내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대우조선해양의 대규모 지원과 연결된 분식회계 문제”라며 “이동걸 회장은 2017년 취임 직후부터 시장 중심 구조조정을 강조해 왔다. 과거의 산은이 투자금 회수에 초점을 맞췄다면 지금은 관련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기업에 넘겨 경영 효율성을 제고하고 빠른 정상화를 달성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 기준으로 보면 특혜 시비나 독점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인 셈”이라고 분석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