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북한 코로나19 정책 비판에 대해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은 강 장관을 비난하는 담화문 정치를 재개했다.사진=연합뉴스
“며칠 전 남조선 외교부 장관 강경화가 중동 행각 중에 우리 비상 방역조치들에 대해 주제넘은 평을 하며 내뱉은 말들을 보도를 통해 구체적으로 들었다.” 김여정 담화문 서두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2월 5일 중동지역 안보대화 ‘마나마 대화’에 자리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가 바레인 정부와 공동주최한 행사였다. 이날 강 장관은 북한 코로나19 방역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강 장관은 “북한은 여전히 코로나19 확진자가 전혀 없다고 주장하지만 믿기 어렵다”면서 “모든 신호는 북한 지도부가 코로나 통제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강 장관은 “코로나19 사태가 북한을 ‘더 북한답게’ 만들고 있다”면서 “북한이 코로나19 대처 방식에서 더 폐쇄적이고 토론이 거의 없는 톱다운 방식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 장관 발언 이후 나흘 만에 북한 2인자이자 ‘위임통치 체제’ 핵심인 김여정이 응답했다. 김여정은 강 장관 발언을 두고 “앞뒤 계산도 없이 망언을 쏟은 걸 보면 얼어붙은 북남(남북)관계에 더욱 스산한 냉기를 불어오고 싶어 몸살을 앓는 모양”이라면서 불쾌한 감정을 쏟아냈다.
“그 속심 빤히 들여다보인다. 정확히 들었으니 우리는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고 아마도 정확히 계산돼야 할 것이다.” 김여정 담화문은 이렇게 끝났다. 이번 담화문은 그간 김여정이 내놨던 담화문보다 짧았다. 하지만 메시지는 묵직했다. 한 북한 소식통은 “김여정의 담화문 행보를 살펴보면 북한의 약점을 쿡쿡 찌를 때마다 강한 어조로 한국 정부를 위협했다”고 했다.
지난 3월 4일 김여정이 자신 명의로 첫 담화문을 냈을 때 타깃은 청와대였다.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청와대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김여정은 담화문 정치 데뷔 무대에서 청와대를 향해 “주제넘는 실없는 처사”라면서 “저능한 사고방식에 경악을 표한다”고 했다.
6월 16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되는 순간. 사진=연합뉴스
6월 4일 김여정은 대북전단살포를 묵인한 한국 정부와 탈북민들을 겨냥했다. 김여정은 “남조선 당국이 (대북전단살포 관련) 응분의 조처를 세우지 않는다면 금강산 관광 폐지에 이어 (그 다음 조치가) 개성공업단지 완전 철거가 될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폐쇄가 될지, 있으나 마나한 남북 군사합의 폐기가 될지 단단히 각오해둬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6월 13일 김여정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인질 삼은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다시 한번 내밀었다. 김여정은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형체도 없이 무너뜨릴 것”이라는 담화문을 냈다. 김여정은 이어 군사행동까지 예고하기까지 했다. 담화문이 나온 지 사흘 만인 6월 16일 김여정 말처럼 남북공동연락사무소는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6월 이후 김여정 담화문 정치는 뜸했다. 정확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여정 담화문에서 언급된 ‘군사행동 예고’를 주워 담으면서부터다. 그리고 8월 국정원은 김정은이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로 위임통치를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위임통치 체제 중심엔 김여정이 있다고 했다. 북한 정치권 내부에서 김여정의 존재감이 여전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보고 내용이었다.
위임통치 체제 보도가 나온 뒤 김여정은 침묵해 왔다. 복수의 북한 소식통들은 ‘미국 대선을 전후로 북한 지도부는 향후 외교 정책 실익을 정확히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담화문을 발표하는 등 국제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섣불리 하기 어렵다’는 분석을 내놨다. 올여름엔 ‘김여정 미국 특사설’이 불거졌지만 없던 일이 됐다.
미국 대선 결과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의 백악관 입성이 확정된 상황이다. 바이든 당선자는 외교·안보 라인을 발표하면서 기존 ‘톱다운’ 방식이 아닌 ‘바텀업’ 기조를 예고했다. 또다른 대북 소식통은 “이번 김여정 담화문은 미국의 대북 외교 기조 변화가 감지된 이후 처음 나온 공개 정치 활동”이라면서 “‘북한식 바텀업’ 예고편으로 이번 김여정 담화문을 내놓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 사진=이종현 기자
이 소식통은 “북한이 미국 대선 관련 언급에 앞서 한국 정부 인사에 대한 공개적 불만을 드러냈다. 특히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대남 외교 최전선에 있는 김여정의 카운터파트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북한은 언젠가 마주할 한국 정부와 협상 테이블을 차리기에 앞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려는 의도가 있어 보인다. 한국과 물밑에서 협상 성과를 이뤄내면 미국 및 한반도 관계국과 협상을 하는 데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강 장관 발언을 문제삼아 강 장관을 흔들면 남북 대화 및 협력을 원하는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가장 곤란한 상황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이 점을 노렸을 수 있다. 김여정이 대북전단살포에 대한 불만을 담은 담화문을 발표한 뒤 우리 국회는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발의하며 남북평화무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상황이다. 김여정이 한국 정치권이 자신의 발언에 의해 움직이는 정황을 파악한 뒤 다시 한번 강 장관을 정면 비판함으로써 ‘간보기’에 나선 것이라 볼 수 있다.”
12월 9일 태영호 국민의힘 의원은 이번 김여정 담화문에 대해 “북한은 지금 대북전단살포금지법 국회 통과가 눈앞에 오자 대북전단문제는 김여정 요구에 따라 ‘승리적으로 결속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을 것”이라면서 “현재 우리 정부 장관 가운데 앞으로 가장 교체 가능성이 높은 강경화 장관을 좌표로 삼고 마치 김여정 요구에 따라 (우리 정부가 장관을) 교체하는 듯한 이미지를 조성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 북한 전문가도 비슷한 판세 분석을 했다. 그는 “북한이 올해 연말 또는 내년 초 문재인 정부 개각설을 파악하고 이 같은 조치를 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중국 언론이 김여정 담화문을 의역한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중국 언론은 김여정이 9일 담화문에서 “그 속심 빤히 들여다보인다”고 언급한 부분을 고사에 비유해 의역했다고 한다. 중국 언론이 해당 문구를 번역한 내용은 “사마소가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는 거리에 사람들이 다 안다(司马昭之心, 路人皆知)”라는 내용이었다.
이 고어는 ‘삼국지’에 나온다. 위나라를 엎고 진나라를 건국한 사마소가 혁명을 일으키기 전 ‘사마소는 결국 위나라 황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 자리에 오르려 할 것’이라고 소문이 퍼졌는데, 이 일화를 함축한 말이다. 중국 언론매체는 김여정 발언을 “한국의 흑심을 북한은 모두 알고 있다”는 취지로 분석한 셈이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남북 정상이 함께 걸어가는 장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옆엔 김여정 조선노동당 제1부부장이, 문재인 대통령 오른쪽엔 강경화 외교부장관이 서 있다. 사진=연합뉴스
중국 거주 북한 소식통은 “김여정이 한국 정부의 대북 평화정책에 대한 진정성을 의심하는 문구를 넣었다”면서 “정황을 따져봤을 때 북한은 추후 남북협상 국면에서 한국 측 진정성을 증명할 매개체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짚었다. 소식통은 “북한이 원하는 카드로는 지금 언론에 나오는 강경화 장관 교체 여부부터 북한 지도부에 실질적 이득이 되는 대북 지원 방안 등을 예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김여정은 그동안 미사일 발사, 탈북민의 대북전단살포, 그리고 강경화 장관의 코로나19 방역 관련 발언에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사안들의 공통점은 모두 북한 지도부 정통성과 체제 보존에 영향력을 미치는 아킬레스건이라는 점”이라며 설명을 덧붙였다.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에 대한 견제가 따르면 군 중심 국가 발전이라는 북한의 핵심 사업에 문제가 생긴다. 탈북민과 대북전단살포는 현지 주민들이 동요해 북한 지도부에 대한 반발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심리전 수단’이다. 강 장관의 북한 코로나19 방역 실태 관련 발언은 북한 입장에서 가장 큰 도발로 느껴질 수 있다. 북한 내 코로나19 방역 실태가 면밀하게 드러나게 되면 북한 지도부 역시 ‘방역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해 주민 통제에 애를 먹을 수 있다.”
김여정이 12월 9일 발표한 담화문 길이가 짧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번 담화문은 216자 분량으로 여태껏 김여정이 낸 담화문 중 가장 짧다. 3월 4일 ‘청와대 비난’ 담화문이 약 1400자, 6월 4일 ‘대북전단살포 비난’ 담화문이 1650자, 6월 13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위협’ 담화문이 900자 분량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쪽글’ 수준이다. 이와 관련해 앞서의 대북 소식통은 “앞으론 김여정이 길고 원색적인 수식어를 포함하는 장황한 담화문보다 짧고 굵은 메시지를 함축한 쪽글 형태로 담화문을 낼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고 전망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