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0일 부산고등법원(제1형사부, 곽병수 부장판사)에서 열린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심 결심공판(관련기사 검찰 “낙동강변 2인조, 진범 아니다” 재심서 무죄 구형) 최종변론에서도 그는 목소리를 높였다. 다만 분노와 비판은 없었다. 대신 거대한 힘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진 재심 청구인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들이 스스로 표현하지 못했던, 깊은 곳에 감춰져 있던 고통과 울분을 대신 토해냈다.
다음은 박 변호사의 최종변론 전문과 법정에서 공개한 사진 일부다.
장동익, 최인철 씨와 가족들. 사진=박준영 변호사
어른 넷과 세 아이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피고인 최인철, 장동익의 가족입니다. 1991년 10월 8일 부곡하와이로 놀러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 한 달 뒤, 두 남자는 경찰에 끌려갔고 무기수가 됐습니다. 그 후 두 가족은 무너졌습니다. 저마다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왔습니다. 국가 폭력으로 무너진 이 두 가족.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가족들 이야기로 최종변론을 하고자 합니다.
피고인 최인철이 경찰에 끌려갔을 때 아내 정숙기의 나이 28세, 아들 최OO 7세, 딸 최OO 4세였습니다.
최인철 씨와 아들, 딸. 사진=박준영 변호사
1991년 12월 부산지방검찰청에서 참고인 조사를 받을 때 일입니다. 정숙기는 혹시라도 남편을 볼 수 있을까싶어 딸을 등에 업고 검찰청으로 갔습니다. 검사는 정숙기에게 1990년 1월 4일 새벽 최인철이 어디에 있었는지, 혹시 옷에 피를 묻힌 채 집에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등을 물었습니다. 정숙기는 “그때 우리 가족 모두 대구 친청집에 있었고, 남편이 옷에 피를 묻힌 채 집에 들어온 일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검사는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오전이 가고 오후가 다가오는데도 집에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을 보여준 것도 아닙니다. 점심 무렵, 검사실 직원이 짜장면을 배달시켜 정숙기에게 내밀었습니다. 죄 없는 남편이 살인범으로 몰려 구속됐는데, 검찰청에서 짜장면이 넘어갈 리 없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옆에 있던 딸이 배고프다면서 그 짜장면을 먹는 겁니다.
정숙기는 아버지를 구속한 검사의 사무실에서 짜장면을 먹던 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맛있게 먹는 어린 딸을 그만 먹게 하지 못하고 황망하게 바라보던 그때 자신의 기분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라도 딸을 바라보던 시절은 그나마 나았습니다. 피고인 최인철의 1심 재판이 한창이던 1992년 6월 정숙기도 남편처럼 구속이 됐습니다. 동생 정OO이 사건 당일 남편이 친정에 있었다고 증언했는데, 이를 위증으로 몰았고 정숙기는 위증을 교사했다며 구속했습니다.
죄 없는 남편이 구속됐고,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노력한 정숙기와 동생 정OO이 거짓말을 했다며 구속됐습니다. 고문으로 살인범을 만들고 그 잘못을 감추기 위해 가족을 구속시킨 수사에 사하경찰서 경찰들과 검사 송OO이 관여했습니다.
최인철 부부는 부산구치소 남자사동, 여자사동에 각각 수감됐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고아 아닌 고아신세가 됐습니다. 엄마가 집행유예로 풀려날 때까지 딸은 큰 삼촌 집에서, 아들은 작은 삼촌 집에서 살았습니다.
최인철이 무기징역이 확정된 후 두 아이와 함께 삶을 꾸려야 하는 건 온전히 엄마 정숙기의 몫이 되었습니다. 정말 기막힌 신세입니다. 남편이 죄 없이 교도소에 가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말도, 어떤 사람들을 통해 ‘죄 없이 설마 무기수가 됐겠느냐’는 반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고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 세상. 도망갈 수도, 갈 데도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야 했습니다. 소금밭 같은 가슴을 다독이며 지옥 같은 세상을 견뎌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을 지켜야 했습니다.
최인철 씨 아내 정숙기 씨와 아들, 딸. 사진=박준영 변호사
정숙기는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대파가 유명한 명지동에서 일당을 받으며 농사일을 했고, 명지항에서 물고기 실은 배가 도착하면 항구에서 바닷일을 했습니다. 공장에서도 일했습니다. 쉬는 날에는 종종 아이들과 함께 남편 최인철을 면회 갔습니다. 어린 자식들이 엄마와 함께 부산에서 광주교도소까지 오고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시간.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 최인철과 만나는 시간 10분. 무슨 이야기를 꺼내기도 힘들고, 뭔 말을 끝내기도 어려운 시간입니다.
아이들이 교도소 면회실 투명 창 너머에서 나오지 못하는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할까, 정숙기는 그게 걱정이었습니다. 최인철은 어린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고 설명하기도 그렇고, 억울하다고 어린 아이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습니다. ‘엄마 말 잘 듣고 건강하게 지내라’며 안부 인사 정도 한 것 같은데, 10분이 다 가버립니다. 그렇게 아내와 자식들을 보내고 ‘감방’으로 향할 때면 발바닥은 유리를 밟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자식들을 데리고 다시 버스를 타고 부산 집으로 향하는 아내 정숙기 가슴에는 모래 바람이 불었습니다. 무기수인 남편, 언제 나올지 모르는 그 막막함. 견디기 힘든 슬픔….
시간은 느리지만 꾸준히 흘렀습니다. 네 살 딸은 초등학교에 입학하더니,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어느덧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자라는 동안 손 한 번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면회실 투명 유리창만 더듬었습니다. 부녀 관계는 맞지만, 별다른 추억이 없는 아버지와 딸은 조금씩 할 말을 잃었습니다.
방황도 했지만 최인철은 모범수가 됐고 18년 만에 가족들과 교도소 내 만남의 집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네 살이던 딸은 22세 어른이 되어 최인철 앞에 나타났습니다. 최인철은 딸을 한 번 안아줬는데, 좀 어색했습니다. 경험이나 기억을 나눠 가진 게 없으니 대화는 자주 끊겼습니다. 세상에 나가더라도 친밀한 관계를 복원하는 게 참 힘들겠구나 싶어 두려웠습니다.
출소 후 4년이 되던 해 딸이 결혼을 했습니다. 21년을 떨어져 살다가 겨우 4년을 함께 살았는데 또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운명. 딸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입장하면서 기쁘고 서럽고 미안했습니다. 펑펑 울고 싶었지만, 고생한 아내가 울고 있어 눈물을 삼켰습니다.
신랑, 신부의 인사가 끝난 뒤 최인철은 딸을 꼭 안아줬습니다. 교도소 만남의 집에서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가슴이 허했습니다.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지난 시간이 떠올라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기억 속에 아버지가 거의 없는 딸은 아버지 품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의 결혼식에서 최인철 씨. 사진=박준영 변호사
최인철은 2013년 6월 24일 자정 무렵 출소했습니다. 아들은 삼촌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으로 갔습니다. 교도소 철문이 열렸고, 문 안쪽에서 20대에 끌려간 아버지가 50대가 되어 걸어 나왔습니다. 일곱 살이던 어린 아들은 아버지보다 덩치가 큰 20대 후반의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맞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면서 서글픔을 느꼈습니다.
2016년 10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이 사건의 진실을 다뤘습니다. TV 속 아버지는 25년 전 겪은 고문에 대해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한 번도 하지 않은 이야기였습니다. 아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TV 시청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습니다. 어렸지만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 텅빈 집에 대한 기억, 아버지 이야기를 피하며 살아온 세월, 아버지가 당했던 물고문….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최인철 씨가 당했던 고문 장면을 묘사한 그림. 사진=박준영 변호사
남편이 오기까지 혼자 남매를 키운 정숙기의 몸은 많이 망가졌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크게 이야기해야 들릴 정도로 두 귀는 나빠졌습니다. 허리 디스크가 생겼고, 무릎은 계단 한 층을 오르거나 50미터를 걷는 게 버거울 정도입니다. 최근에는 백내장 수술도 했습니다.
(다음은 최인철 씨가 교도소에서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로 박준영 변호사는 편지들을 법정 화면에 띄워 하나씩 읽어내려 갔다. 최 씨 부인의 본명은 정숙기 씨인데 숙희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편집자 주)
“당신이 건강하고 용기를 잃지 않아야 나도 억울한 누명 속에서 지내는 인생이지만 자신을 가지고 지낼 수 있으며 또 당신과 가족들이 건강해야 훗날 한자리에 모여 살며 못다한 사랑 나눌 수 있음을 알기에 당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기원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숙희. 날씨가 차가우면 신경통으로 많이 고생할 텐데 걱정이 됩니다. 항상 몸을 따뜻하게 하고 건강관리 잘하세요.”
“OO아(아들), OO아(딸), 건강하거라. 세월이 흘러가다보면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엄마 말씀 잘 듣고 아빠와 지낼 수 없다고 슬퍼하지 말고 용기 잃지 말기를 바란다. 아빠는 항상 엄마와 너희들을 지켜보며 너희들 곁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건강하거라.”
최인철 씨가 교도소에서 아내 정숙기 씨에게 보낸 편지. 사진=박준영 변호사
“어린이날 항상 건강하고 씩씩한 아빠의 아들, 딸이 되고 어머니날 엄마 가슴에 예쁜 꽃 한송이 꽂아주며 엄마를 위로하고 효도하는 아빠의 사랑하는 OO(아들)이 OO(딸)이가 되기를 아빠는 바란단다.”
“제한된 삶, 제한된 공간, 하지만 생각까지 제한된 것은 아니니 마음으로나마 사랑하는 당신과 아이들을 떠올려봅니다. 문득문득 생각나는 당신과 OO(아들)이 그리고 예쁜 우리 OO(딸)이의 모습이 내게는 큰 힘이고 내가 지금의 답답하고 제한된 공간 속에서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것을,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언제나 내 마음 속에는 우리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밖에는 달리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지금의 현실이 나를 어렵게 하는군요. 당신을 비롯한 우리의 소중한 두 아이들 우리 모두 절망과 슬픔보다는 희망과 즐거움을 갖고서 견뎌봅시다.”
피고인 장동익이 경찰에 끌려갔을 때 아내 박OO의 나이 27세, 딸 장OO은 2세였습니다.
장동익 씨와 딸. 사진=박준영 변호사
“유리벽 하나를 두고 손 한 번 잡지 못하는 내 마음 아프지만 당신보다야 할까요. OO(딸)이는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어요. OO이가 자기 이름도 알고요. 참 대견해요. OO이가 집안에 없으면 너무 조용해요. 다락방과 부엌은 마음대로 드나들구요. 막내 삼촌을 무척 따르는군요. OO이 아빠! 고생이 되더라고 참아주구려. 여보! 사랑해요 영원히 건강하세요.”
편지지에 적힌 글자는 굵은 사인펜으로 쓰였습니다. 앞을 잘 보지 못하는 남편을 위한 아내의 배려입니다.
장동익 씨의 아내가 보낸 편지. 어린 딸과 막내 동생의 메시지도 함께 적혀 있다. 사진=박준영 변호사
장동익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는 부산에 있는 ‘OO고무’라는 신발공장에 어렵사리 취직해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할 수 있는, 손에 익히면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새로 직원이 들어왔는데, 같은 라인 앞뒤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유난히 어여뻐 보이는 아가씨였습니다. 아내는 밥을 참 맛있게 먹었습니다. 장동익의 눈에만 그랬는지 몰라도, 그때 아내는 참으로 예뻐 보였습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아침마다 약국에 들러 박카스 한 병, 우루사 한 알을 꼬박꼬박 사다 바쳤습니다. 안 받으려고 하고 안 먹는다고 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지만 그냥 놓고 와 버렸습니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퇴근 후에 만나자는 청에 “예” 소리를 듣게 됐습니다. 연애를 1년쯤 했습니다.
장동익은 눈이 안 보인다는 걸 들키기가 싫어서 약속 시간에는 무조건 먼저 나갔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일 때문에 조금 늦었는데, 아내는 뻔히 보이는 자리에 있는 자기를 몰라보고 엉뚱한 자리로 가는 장동익을 보고 장동익의 시력이 좋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장동익은 그때나 지금이나 시력에 문제가 있다는 걸 들키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은 일입니다.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무죄를 밝힐 수만 있다면 숨기고 싶은 장애입니다.
장동익은 처가에 인사를 갈 때도 눈 나쁜 거 들키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써야 했습니다. 반찬을 금방 못 집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밥하고 국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아내와 있는 모든 순간이 좋았습니다.
장동익 씨. 사진=박준영 변호사
형님이 미혼이라 결혼식은 나중에 올리기로 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년 뒤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꿈같이 행복했고, 사는 동안 나쁜 일은 더이상 생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생에 지은 죄가 있다면 잘 안 보이는 눈으로 다 갚지 않았겠는가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딸을 업고 교도소에 면회를 올 때마다 아내는 늘 울었습니다.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보면 장동익은 안에서 미칠 것 같았습니다. 장동익은 지금은 아이가 어리니 데리고 오더라도 좀 더 크면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딸은 안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해, OO이(딸)를 데리고 왔습니다. 밖에서 하염없이 울고 가던 그날 아내 모습이 지금도 선합니다.
생각해 보니, 무남독녀 외동딸 데려와 몸고생, 마음고생 엄청 시켰습니다. ‘어머니 성격 보통 아니신데 남편 없을 때 시어머니한테 듣는 말이 많이 다를 것, 남편 단속 제대로 못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는 원망도 들었을 것이다. 형과 동생들도 나 없는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한 지붕 아래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 한마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데 생각이 미치니 아내를 잡아두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되었습니다. “면회 오지 마라. 언제 나갈지 알 수 없는데, 좋은 사람 만나 새 삶 살아라.” 장동익은 이렇게 아내를 떠나보냈습니다.
출소하던 날 딸이 살고 있는 셋째 동생 장봉익 집 앞에서 장동익은 망설였습니다. 문 너머에 딸이 있는데, 문손잡이를 잡고 차마 돌리지 못했습니다. 첫 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아빠 왔다!’ 너무 일상적으로 들릴까? ‘보고 싶었다!’ 복받치는 내 마음을 전하기에 너무도 부족한 말이다. ‘미안하다.’ 내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이한테는 늘 미안하기만 하다. ‘OO(딸)!’ 그냥 이름을 부를까? 그러면 우리 OO이는 달려와서 나를 안아 줄까? 나는 아빤데, 의연해야 하는데, 나부터 눈물을 쏟진 말아야지.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에서는 온갖 장면들이 소용돌이쳤습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잡은 손이 그저 허청대기만 했습니다.
“형님, 요새는 문 여는 방식이 다릅니다. 내 전화번호를 눌러야 합니다.” 번호를 누르면 문이 열리다니 놀랍기만 했습니다. 딸 때문에 망설인 것도 있지만 문을 열 줄 몰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딸을 만나러 오는 데 걸린 시간, 21년 하고도 5개월 20일이었습니다.
장동익 씨(오른쪽 아래), 막내 장성익 씨(아랫줄 가운데)와 형제들. 사진=박준영 변호사
아비로서 딸에게 해 준 일이 없었습니다. 못 해 준 일들만 수도 없이 지나갔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실수라도 할까봐 아이를 안아주거나 업어주는 것도 조심스러웠습니다. 돌이 지날 무렵이었습니다. 딸은 어여쁜 옹알이 소리를 하면 장동익의 손을 끌고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더니 과자 한 봉지를 들고 이제는 됐다는 듯이 가게를 나섭니다. 체육복 차림에 아무렇게나 나온 길이라 주머니에 동전 한 푼이 있을 리 없었습니다.
“OO(딸)아, 안 돼! 이렇게 들고 나오면 안 되는 거야”하며 과자를 빼앗다시피 해서 도로 내려놨습니다. 과자를 빼앗긴 딸은 서럽게 울었습니다.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체육복 주머니를 뒤집어 내보이며 “아빠 돈 없어서 그래. 집에 가서 돈 가지고 오자.” 그래도 막무가내였습니다.
30년도 훨씬 전의 어느 순간. 장동익은 바로 어제 일인 듯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환하기만 하던 햇살, 골목 가득 울려 퍼지던 딸의 울음소리, 그리고 아이의 슬픔이 가시기까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서툰 아비의 막막한 절망…. 집까지 날다시피 가서 돈을 가지고 가게로 돌아왔지만, 이미 OO이의 관심은 과자를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절실하게 과자를 원했던 딸아이에게 아빠 장동익은 딸이 가장 원하는 무언가를 빼앗은 원망스런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장동익은 다시는 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는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살아왔습니다.
딸이 열 살이 되고, 스무 살이 되는 동안 딸의 인생에서 장동익은 늘 부재중이었습니다. 딸이 빛날 수 있었던 결정적 순간들에 어쩌면 심각한 걸림돌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아빠를 대신해 딸을 살펴 준 셋째 동생 장봉익이 고맙습니다.
장동익은 2003년 8·15 특사 때 징역 20년형으로 감형됐습니다. 앞으로 10년을 더 교도소에서 살아야 했지만,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엄마와 가족들 놀래키려 이 사실을 한동안 숨겼습니다. 엄마가 면회 오면 말하려 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엄마는 오지 않았습니다. 합동접견으로 엄마를 초청했지만 교도소 측은 “어머니가 다리에 깁스를 해 올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장동익 씨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사건기록. 재심 청구의 결정적 역할을 했다. 사진=일요신문DB
장동익은 그 말을 믿었습니다.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장동익의 엄마는 위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엄마는 2003년 11월 2일 동아대학교에서 사망했습니다. 아들이 10년 뒤에 세상에 나온다는 소식도 듣지 못했습니다. 아들에게 자기 눈을 주지 못한 게 서러워서였는지. 자유의 몸이 된 아들을 끝내 못 본 게 한으로 남은 것인지. 두 눈을 뜨고 허공을 응시한 채 사망했습니다.
엄마는 유산으로 분홍 보따리 하나를 남겼습니다. 사건기록이었습니다. 셋째 동생 장봉익이 이 기록을 10년 동안 잘 보관했습니다. 이 기록이 재심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피고인 최인철, 장동익이 살아나온 힘, 재심을 받을 수 있었던 힘 모두 가족이었습니다. 이 가족들에 대한 진정한 위로는 ‘진실’뿐입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