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트롯의 영역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대중가요의 발전이 급속도로 이뤄졌는데 유학파 작곡가와 가수 등 뮤지션이 늘면서 해외 흐름에도 민감해졌다. 대중가요는 랩과 힙합, 테크노 등 새로운 장르가 추가되며 계속 세분화돼 발전했다. 반면 트롯은 현철, 설운도, 태진아, 송대관 등 트롯 4대 천왕 정도로 제한되는 분위기였다. 1990년대 초중반 X세대를 기점으로 등장한 신세대들은 트롯을 옛날 노래, 중장년층만 좋아하는 노래 정도로 여기게 됐다.
아직 장윤정이 ‘어머나’로 본격적인 TV 출연을 하기 전인 2004년 10월 초 대구 카톨릭대 축제 무대에 선 모습. 당시만 해도 트롯 가수가 대학축제 무대에 선다는 게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진=임준선 기자
이런 분위기는 2003년에 발표된 노래 하나로 완전히 뒤바뀐다. 바로 ‘어머나’다. 이 노래가 담긴 장윤정 1집의 발매일은 2004년 10월 22일이지만 이때는 이미 ‘어머나’가 어느 정도 히트한 뒤다. 장윤정은 2003년 가을 ‘어머나’ 한 곡이 담긴 싱글 홍보용 CD를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래봐야 매니저가 방송사 라디오국을 찾아다니며 방송을 부탁하고 장윤정이 각종 지방 행사와 밤무대 등에서 노래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렇지만 장윤정과 ‘어머나’의 매력이 서서히 대중의 귀를 사로잡았고 2004년 여름에는 이미 물밑에서 유행이 시작됐다. 장윤정이 본격적인 방송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었지만 이미 2004년 가을 장윤정은 대학 축제에서도 각광받는 스타가 됐다. 트롯 가수가 대학축제 무대에 선다는 게 당시만 해도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20대 중반의 여가수, 그것도 강변가요제에서 발라드 곡으로 대상을 받은 여가수가 트롯으로 데뷔한다는 게 당시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렇지만 장윤정의 가창력과 발랄하고 젊은 이미지는 ‘어머나’라는 곡과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다.
2005년부터 ‘신세대 트롯 가수’라는 타이틀로 장윤정의 본격적인 전성시대가 시작됐고 가요계 전반으로 이런 흐름이 확대됐다. 2005년 트롯을 표방한 걸그룹 LPG가 데뷔했고 2006년에는 ‘빠라빠빠’를 들고 박현빈이 등장했다. 2007년에는 홍진영이, 2008년에는 윙크가 데뷔했다. 장윤정을 필두로 당시 데뷔한 신세대 트롯 가수들을 통해 ‘트롯은 옛날 노래, 중장년층만 좋아하는 노래’라는 젊은 층의 선입견이 깨지고 트롯은 다시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장르가 됐다.
2004년 장윤정의 ‘어머나’ 열풍 이후 15년가량이 지난 2019년 ‘송가인 열풍’이 시작됐다. TV조선 ‘미스트롯’을 통해 데뷔한 송가인은 엄청난 가창력을 바탕으로 다시 한국 사회에 트롯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송가인의 성공적인 데뷔는 ‘미스터트롯’의 성공으로 이어지며 트롯 열풍은 더욱 거세졌다.
송가인 열풍은 가요계에서 가장 수동적인 소비자층이던 중장년층을 깨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실시간 문자 참여 등에 큰 관심이 없던 중장년층이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에선 가장 적극적인 시청자이자 소비자가 됐다. 사진=MBC 제공
장윤정 열풍을 통해 트롯이 모든 연령층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면 송가인 열풍은 가요계에서 가장 수동적인 소비자층이던 중장년층을 깨우는 효과를 발휘했다. 이미 수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을 통해 실시간 문자 참여 등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와 달리 그런 쪽에 큰 관심이 없던 중장년층이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에선 가장 적극적인 시청자이자 소비자가 됐다.
10대 위주인 아이돌 스타 팬들의 행보가 50대 이상이 주류인 송가인 팬들 사이에서도 똑같이 목격됐다. 버스를 대절해 송가인이 무대에 서는 전국 각지의 공개방송과 행사를 따라다니고 굿즈를 만들고 구매한다. 송가인의 노래를 스트리밍 음원 서비스 차트 1위로 만들기 위해 ‘스밍’(음원 스트리밍)을 돌리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송가인 열풍은 ‘미스터트롯’을 거치며 중장년층 사이에 더 폭넓게 퍼져나갔다. 유튜브로 자신이 좋아하는 트롯 가수의 영상을 골라서 보고, SNS를 통해 트롯 스타들과 직접 교류를 하기도 한다.
송가인을 비롯한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 출신 가수들을 좋아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갖고 있던 스마트폰의 기능을 제대로 알게 됐다고 말하는 중장년층이 많다. 물론 2030 청년층이나 10대에서도 송가인 등 요즘 신세대 트롯 가수들을 좋아하는 팬들이 많다. 자신이 좋아하는 트롯 스타를 중심으로 10대 팬과 70대 팬이 유튜브와 SNS 등으로 교류하는 등 세대의 장벽이 또 한 번 무너지고 있다.
‘장윤정 열풍’에 이어 ‘송가인 열풍’으로 대중문화 소비와 디지털플랫폼 활용에 대한 세대 구분이 무너졌다. 이렇게 트롯은 가요의 한 장르가 아닌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하는 혁신의 아이콘이 됐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