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아미산 굴뚝(보물 제811호). 왕비의 생활 공간인 교태전의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다. 사진=박정훈 기자
온돌이란 원래 ‘따뜻하게 데운 돌’이라는 뜻으로, 바닥에 구들을 깔고 불을 지펴 그 불기운으로 구들장을 달구어 난방하는 우리 고유의 주거문화다. 한반도 지역의 온돌문화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원삼국시대에 부뚜막식 화덕과 연도(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가 설치된 원시적 형태의 난방방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 온돌의 역사’를 집필한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는 고대 국가인 북옥저에서 극동 온돌이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구려 시대 무덤인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벽화에는 아궁이와 굴뚝이 있는 부엌에서 여인 둘이 일하는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하다.
신라 효공왕 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경남 하동군 칠불사의 ‘아자방지’는 당시 구들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아자방지는 ‘아’(亞) 자 형태의 방(아자방)이 있던 터를 뜻하는데, 이 방은 난방을 위해 온돌을 특이하게 이중으로 구축하여 한 번 불을 넣으면 100일 동안이나 따뜻했다고 전해진다. 아자방 건물은 조선 순조 때, 그리고 1949년 지리산 전투 등으로 소실되었으나 밑의 온돌은 그대로 남아 1982년 지금과 같이 새로 지었다.
경북 상주 양진당(보물 제1568호). 처음 건축될 때에는 마루방이었으나 훗날 고쳐 지으면서 온돌을 넣은 건물이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삼국시대에 온돌은 대부분 ‘쪽구들’(방의 일부분을 따뜻하게 덥히는 온돌) 형태였다. 일종의 ‘부분 난방’을 한 것이라 당시에는 실내에 신을 신고 들어와 의자에 앉아 일을 보는 입식 생활이 주를 이뤘다. 고려시대에 들어서 쪽구들은 고래(불길과 연기의 통로)를 만들어 방 전체를 난방하는 ‘온구들’의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온돌의 보급은 생활방식의 변화로 이어졌다. 의자에 앉는 입식 생활이 바닥에 앉는 좌식 생활로 바뀌게 된 것이다.
대부분의 생활문화가 상류층에서 서민층으로 전파된 것과는 달리, 온돌을 이용한 주거문화는 서민층에서 유행해 지배계층으로까지 확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례로, 1123년 사신으로 고려를 다녀간 송나라 문인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는 “서민들이 대부분 흙침상에서 지내는데, 땅을 파서 화항(火炕)을 만들어 그 위에 눕는다”는 대목이 있다. 반면, 개성의 고려 궁궐인 만월대를 남북한이 공동발굴했을 때, 온돌은 발견되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온돌’이라는 단어는 태종 때에 이르러 처음 등장한다. ‘태종실록’ 태종 17년(1417) 윤5월 14일자에는 임금이 성균관 기숙사의 한 모퉁이에 온돌방을 지어 풍습병을 앓는 학생들이 휴양하는 장소로 삼으라고 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온돌이 궁중에 확산된 것은 선조 때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전까지 궁중 건물의 대부분은 마루방으로 지어지고, 온돌방은 서너 곳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인조와 현종 재위 때에는 온돌에 쓸 땔감 때문에 기인(땔나무와 숯을 공급하는 사람)들의 공물 부담이 커지는 등 폐해가 크니 궐내의 온돌방을 줄여야 한다고 신하들이 주청을 하는 일도 빚어졌다. 그런가 하면 당시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에 온돌이 설치돼 있었는데, 방이 따뜻하고 아늑해 사신들의 호평을 받았다.
하동 칠불사 아자방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4호). 놀라운 구들 기술을 보여준 신라시대의 아자방 터로, 1982년 현재와 같이 아자방이 복원되었다. 사진=문화재청 제공
우리 온돌문화는 일제강점기 때 일대 위기를 맞기도 했다. 온돌이 땔감 때문에 산을 헐벗게 하고 화재를 일으키는 원흉으로 지목돼 ‘온돌 폐지론’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당시 30대의 열혈청년이던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은 1926년 ‘동아일보’에 ‘조선민족 갱생의 도’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온돌을 변호하는 글’을 수차례 실어 이런 움직임에 맞서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일본의 화로, 서양의 난로, 증기난로 등을 예로 들며 온돌이 얼마나 우수한 난방방식인지 밝히고, 산이 벌거벗은 것은 온돌의 죄가 아니라 사람의 죄일 뿐이라고 설파했다.
광복 이후 우리 온돌문화는 급속한 서구화의 물결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전통적인 방식의 온돌이 아니라 연료가 바뀌고 온수관이 고래를 대신하게 됐지만,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하는 문화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최신 주택이나 아파트도 라디에이터가 아닌 온돌 난방을 쓴다. 이는 ‘전도, 복사, 대류’라는 열 전달의 성질을 고루 이용하는 우리 온돌의 장점과 편리성 덕분이기도 하다. 유서 깊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는 1982년 ‘ondol’이 표제어로 등재되었고, 아자방 온돌은 ‘세계건축대사전’에도 수록될 만큼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무형문화재를 보호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를 계승해 발전시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례가 온돌문화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료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