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2021 KB바둑리그 3라운드 3경기에서 심재익(왼쪽)이 상대팀 2지명 설현준을 꺾었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신인상 후보에 아쉽게 빠진 한 사람이 있다. 백현우와 공동 다승 1위지만, 승률은 더 높은 심재익 4단이다. 최근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기사다. 10월 이후 성적은 무려 24승 1패. 특히 하반기에 벌어진 KB바둑리그, GS칼텍스배 예선, 한국프로기사협회리그 등에서 16연승으로 전승 질주하고 있다. 심재익은 “지난 10월 바둑리그 선발전 이후 겨우 성적이 좋아졌어요. 신인상 후보에 오르기엔 상반기 성적이 너무 형편없었습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한다.
심재익은 여섯 살에 바둑을 알았다. 아버지가 좋아하던 취미라 단수와 사는 법을 직접 가르쳐주었다. 바둑에 재미가 든 심재익은 초등학교 시절엔 동네 바둑학원에 나가서 바둑을 배웠다. 4학년 무렵에 이미 인터넷 8, 9단에 올랐다. 집 근처 평촌 기린아도장과 왕십리 충암도장을 거쳐 20세에 입단했다. 입단 운은 별로 좋지 않았다. 한국기원 연구생에선 1위도 했지만, 2015년 부활한 연구생 입단대회를 잘 뚫지 못했다. 일반입단대회에서 칠전팔기하여 프로가 됐다.
심재익이 바둑을 처음 접했던 건 여섯 살 무렵이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입단 영순위로 실력은 인정받았기에 2017년 일반입단대회 통과자 다섯 명 중 유일하게 바둑리그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첫 무대에서 결과는 참담했다. 이상훈 감독 밑에서 1승 11패, 승률 8.3%란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리그 역사상 최다 연패였다. 2018년은 바둑리그에서 빠지는 아픔까지 맛봤다. 2019-2020리그에서 다시 최규병 감독에게 4지명으로 부름을 받았지만, 5승 8패로 성적은 그저 그랬다. 심재익은 리그 첫 도전의 아픔을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망해도 너무 망했어요. 대국일이 다가오면 질 것 같은 불안감에 시달렸고, 실제로 졌어요. 그때도 마음을 다스리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라고 토로한다.
심재익은 2016년 연구생 1위로 시드를 받아 출전한 LG배 통합예선에서 중국 강호 후야오위를 꺾었다. 사진=사이버오로 제공
심재익은 “최근에 성적이 좋아진 건 승부에 대한 집중력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자꾸 지면 다음 패배가 걱정되고 스트레스가 배로 쌓이는데 반대로 이기다 보면 떨리는 마음이 사라지고, 이기는 게 습관이 됩니다. 예전부터 한국기원 국가대표팀은 훈련일정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선발전 참가를 안 했어요. 왕십리 충암도장에 출퇴근하며 자유롭게 공부하고 있는데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문을 자주 닫아서 공부하던 흐름이 끊어졌죠. 그러다가 5월부터 컴퓨터 게임에 빠져 성적이 급추락하며 완전히 리듬을 잃었어요. 그러다 지난 삼성화재배 예선전을 치르고 각성해서 게임을 끊고, 바둑에만 다시 집중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기풍은 이창호류다. 두텁게 두면서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린다. 자신의 장점을 꼽아달라고 하자 주저하지 않고 “계산력엔 자신 있습니다. 마무리 부분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한창 공부할 때는 모든 기보를 다 봤는데 이세돌 9단 바둑을 가장 좋아했어요. 화려한 싸움 솜씨를 닮고 싶었는데 생각과 달리 제 기풍은 단단하고 차분한 바둑이 되었습니다. 중반에 바둑판의 모양을 보면 이겼다는 느낌이 올 때가 많아요. 어릴 때 기보를 많이 놓아보면서 생긴 감각 같아요. 이미 이겨있는데 굳이 싸울 필요는 없죠”라는 생각이다. 최신 AI(인공지능)의 기풍이 심재익에겐 잘 맞는 옷이다. 초반만 어느 정도 버티면 중후반은 그의 홈그라운드다. 빼어난 계산력 덕분에 AI가 블루스팟 자리를 선택하는 이유를 깊이 이해한다.
심재익의 기풍은 이창호류다. 두텁게 두면서 느긋하게 기회를 기다린다. 사진=한국기원 제공
10년 후 프로기사 심재익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봤는지 묻자 고개를 저었다. “주목받는 걸 좋아하진 않아요. 우선은 잡념 없이 바둑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공부하는 건 매일 일정하고, 실력도 계속 늘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이기고 지는 흐름에 따라 성적에 기복이 심한 편이라 마음 관리가 늘 고민입니다”라며 마치 수도승 같은 표정을 지었다. “커제와 아직 안 두어봤습니다. 내년엔 세계대회 본선도 가서 중국 고수들과 많이 대국하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마음속엔 2021년에는 KB바둑리그를 보는 맛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매일 실력이 발전하는 심재익, 떨리는 마음을 삼키며 승리를 이어가는 모습을 살피는 재미다.
[AI 바둑산책] 상상도 못한 손 빼기 신공 ●심재익 ○절예(중국AI) 127수 백불계승(두 점 접바둑) 실전1 #실전1 절예의 신묘한 두 점 포석을 감상해보자. 치석(흑O표시)을 놓고 시작하니 AI 백승률이 1%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은 아무리 불리해도 무리한 행마가 없다. 심재익은 인공지능과 두면 둘수록 “거대한 벽을 느낀다”고 말한다. “절예(중국 AI)는 두 점으로 버티긴 어렵다. 석 점을 놔도 꼭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는 의견을 내놨다. 실전2 #실전2 초반부터 하변에서 돌이 부딪히며 나오는 마찰음이 요란하다. 백은 21, 23의 활용 후 27, 29로 연계하는 행마가 기가 막힌다. 바둑 인공지능은 상상하지 못한 곳에서 손을 빼며 아주 빠르게 요소를 선점한다. 돌을 버리고 살리는 행마의 신묘함은 놀라운 계산력을 바탕으로 한다. 반발 한번 잘못하면 순식간에 승률은 역변한다. 실전3 #실전3 절예는 백1로 먼저 안형을 없애고, 좌중앙 흑돌을 몰아가며 뭔가 엮어나간다. 백9, 흑10의 교환 이후 백11이 두어지자 흑대마가 맞보기로 죽어버렸다. 실전에서 흑은 A로 따내 중앙을 살렸고, 백은 B로 두어 하변 흑돌(X표시)을 잡았다. 10% 미만이었던 AI 백승률은 대번에 85%로 치솟았다. 실전은 이후 약 50여 수를 더 두었다. 그러나 백이 중앙 백 세력까지 대부분 집으로 만드는 걸 보고 흑이 돌을 거뒀다. |
박주성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