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 등 4개 부문을 휩쓸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됐다. 사진=A.M.P.A.S.® 제공
#아카데미 4관왕에 오른 ‘기생충’
확률적으로 볼 때 작품상 수상 가능성은 0%였다. 91회까지 아카데미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비영어 영화가 작품상을 받은 사례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기대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봐야 확률은 1% 남짓이다. 아카데미에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 작품상을 받은 경우 역시 ‘기생충’ 전까지는 1955년 ‘마티’가 유일했다.
감독상 수상 확률은 2%. 그나마 대만의 이안 감독이 아시아인으로 감독상을 받았다는 부분에서 작은 기대감은 있었다. 각본상도 1% 남짓의 확률로 비영어 영화는 1946년 리처드 쉬웨이저 감독의 스위스 영화 ‘마리 루이스’가 최초였다. 당연히 아시아 영화는 감히 넘보지 못하던 영역이었다.
사실 2019년까지만 해도 한국 영화계의 오랜 염원은 아카데미 ‘진출’이었다. 지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국제영화상(Best International Film)으로 이름이 바뀐 외국어영화상(Best Foreign Language Film)에 매년 도전했지만 단 한 번도 후보작에 오르지 못했다.
2019년 제91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부문에 도전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이 예비후보(숏리스트)에 포함됐다. 최종 후보에 오르진 못했지만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에 도전한 지 무려 55년 만에 일궈낸 성과였다. 그리고 1년 뒤 ‘기생충’이 비로소 국제영화상 최종 후보로 선정됐다. 56년 숙원인 후보작 선정의 꿈을 이룬 것이다.
‘기생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미술상, 국제장편영화 등 모두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고 최종적으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 등 4개 부문을 휩쓸며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진정한 주인공이 됐다.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이다. 지금껏 아시아 영화는 물론이고 전세계 비영어 영화가 감히 다가가지 못한 고지에 ‘기생충’이 올랐다.
2020년 한 해 동안 빌보드 핫100 차트에 1위 곡을 무려 3곡이나 올린 방탄소년단(BTS)는 이제 그래미에 도전하고 있다. 2020 MAMA 무대에 선 BTS의 모습. 사진=CJ ENM 제공
#빌보드 핫100 1위를 3번이나
영화계에서 아카데미가 ‘넘사벽’이었다면 가요계에선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이 비슷한 존재였다. 이미 세계 정상급 스타로 거듭난 방탄소년단(BTS)은 2018년 5월 정규 3집 ‘러브 유어셀프 전 티어’로 빌보드200 1위에 오른 뒤 새 앨범이 나올 때마다 ‘빌보드200’ 1위에 오르곤 했다. 이런 BTS에게도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 1위는 머나먼 고지로만 보였다.
한국 가수는 감히 넘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빌보드가 도전해 볼 만한 영역이라는 생각을 한국인에게 심어준 주인공은 싸이다. 2012년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빌보드 핫100에서 7주 연속 2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1위 자리까진 오르지 못했다.
이런 아쉬움을 BTS가 해소해줬다. 8월 21일 발매된 BTS의 ‘다이너마이트(Dynamite)’가 8월 31일(현지시간) 빌보드 핫100 1위에 오른 것이다. ‘다이너마이트’가 영어 가사 노래인 터라 약점이었던 라디오 방송 횟수가 폭발적으로 나오면서 비로소 빌보드 핫100 1위 자리에 오르게 됐다.
BTS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0월에는 ‘새비지 러브(Savage Love)’ 리믹스 버전으로 다시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 1위에 올랐다. 그리고 11월 30일(현지시간)에는 BTS 신곡 ‘라이프 고스 온(Life Goes On)’이 또 핫100 1위에 올랐다. 한국어 가사 노래로는 최초다. 뿐만 아니다. 단 세 달 사이에 빌보드 핫100 1위곡을 세 곡이나 올린 것은 호주 록밴드 비지스 이후 무려 42년 만의 대기록이다.
이제 BTS는 그래미를 향해 달려간다. 2021년 2월 1일 열리는 63회 그래미 어워드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오른 BTS는 ‘백인 중심’으로 유명한 그래미에서도 수상이 유력한 상태다.
걸그룹 블랙핑크의 기세도 무섭다. 10월에 발표한 첫 정규앨범 ‘디 앨범’이 발매 첫 주에 빌보드200과 영국 오피셜 앨범 차트에서 동시에 2위를 기록했고 각각 9주, 7주 동안 연속 랭크됐다.
최근 한국 걸그룹 최초로 미국 ‘버라이어티 히트메이커스(Variety Hitmakers)’ 시상식에서 ‘올해의 그룹상’을 수상했으며 미국 유력 경제전문지 블룸버그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팝스타’ 1위로 선정됐다. 또한 유튜브 채널 구독자 수 역시 전세계 아티스트 가운데 2위로 1위인 팝스타 저스틴 비버를 뒤쫓고 있다.
한편 일본에선 JYP엔터테인먼트와 소니뮤직의 ‘니지 프로젝트(Nizi Project)‘를 통해 탄생한 걸그룹 니쥬 열풍이 거세다. 니쥬는 멤버 9명이 모두 일본인인 K팝 아이돌이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제작발표회 당시의 현빈, 손예진, 서지혜, 김정현.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타고 일본에서 4차 한류 붐을 주도하는 등 글로벌 인기를 누렸다. 사진=일요신문DB
#“’사랑의 불시착‘에 빠져 죄송하다”
사실 한류의 중심은 역시 드라마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드라마 한류는 다소 침체돼 있었다. 가장 큰 시장인 일본과 중국에서 한국 드라마가 외면 받아 왔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자체의 경쟁력 때문이 아닌 정치 외교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오히려 코로나19는 호재가 됐다. 어느 나라나 외출보다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2020년 한 해 동안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시장이 급성장했다.
특히 넷플릭스의 기세가 거세다. 넷플릭스는 아시아 시장 공략을 위해 한국 드라마와 연이어 계약을 맺고 아시아를 비롯해 전세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일본과 중국의 방송사들이 아무리 한국 드라마를 외면할지라도 중국과 일본 젊은이들이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즐기는 것까지는 막을 순 없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일본에서 열풍이 거세다. 일본에선 2020년 한 해 동안 ‘4차 한류 붐’이 엄청난 화제가 됐다. 그 시작은 연초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수상이었다. ‘기생충’은 2020년 일본 극장가에서 최고의 흥행 성적을 올렸다. 그리고는 넷플릭스를 통해 일본 젊은이들이 한국 드라마에 빠져들었다.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스’가 연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사랑의 불시착’은 최근 발표된 일본의 ‘2020 신조어·유행어 대상’에서 톱10에 포함됐다. ‘3밀’ ‘아베노마스크’ ‘아마비에’ 등 코로나19 관련 단어들 사이에 ‘사랑의 불시착’이 포함됐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 내에서 4차 한류 붐이 뜨겁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11월 23일에는 악명이 높은 극혐한 인사인 일본 작가 햐쿠타 나오키가 자신의 SNS에 “‘사랑의 불시착’에 빠져 죄송하다”는 사과의 글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애초 지인에게 ‘사랑의 불시착’을 추천 받았지만 “쓰레기 같은 한국 드라마 따위를 왜 보냐”고 화를 냈다는 그는 ‘한국 드라마지만 미국 기업(넷플릭스)을 통해 보는 건 괜찮다’는 묘한 논리로 시청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매료됐다. 결국 그는 SNS에 “한류에 빠져 죄송하다”며 “억울하지만 이 점은 일본이 졌다”고 적었다.
일본 언론은 일본에서 2020년 넷플릭스 가입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의 한국 드라마 열풍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다 보니 지난 몇 년 동안 한국 드라마를 외면하고 방영하지 않았던 일본 방송사들이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사랑의 불시착’ 인기 요인을 방송하기도 했다.
일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드라마는 넷플릭스를 타고 일본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을 거쳐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사랑의 불시착’ ‘이태원 클라쓰’ 등 올해 방영해 큰 인기를 끈 드라마들이 글로벌 인기를 얻은 데 이어 이미 수년 전에 방영한 드라마까지 인기를 얻고 있다. 심지어 소설 ‘연금술사’로 유명한 브라질의 대문호 파울로 코엘료가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 ‘나의 아저씨’를 본 뒤 자신의 트위터에 “인간의 조건을 완벽하게 묘사한 작품”이라는 찬사를 올렸을 정도다.
#해외로 못 나가는 한류 스타들
안타까운 부분은 이런 한류 성과들이 엄청난 수익 창출로 이어지진 못했다는 점이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여느 아카데미 4관왕 영화들처럼 ‘기생충’은 전세계적인 흥행 대박이 가능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생충’이 아카데미를 휩쓴 직후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됐다.
BTS가 정상적으로 월드투어를 진행했다면 더 큰 수익을 올렸을 것이다. 2020년 한 해 동안 빌보드 핫100 1위곡을 세 곡이나 발표하고도 BTS는 콘서트 무대에서 직접 팬들을 만나지 못했다.
어렵게 일본 4차 한류 붐이 시작됐지만 한류 스타들의 일본 방문 역시 이뤄지지 못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사랑의 불시착’과 ‘이태원 클라쓰’ 등에 출연한 배우들인 일본에서 팬미팅 등 각종 행사에 참석하며 상당한 수익을 올렸을 것이다. 실제 1~3차 한류 붐 당시에는 한국 연예계가 일본 시장에서 엄청난 수익을 창출했다. 그렇지만 2020년은 일본에서의 대규모 행사는커녕 일본 방문조차 쉽지 않은 분위기였다.
조재진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