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전쟁에 담긴 ‘숨은 1인치’ 찾기 게임이 시작됐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대선 전초전인 내년 4·7 재보궐선거 본선에 진출한다. 예선전 백미는 룰을 둘러싼 고도의 두뇌싸움이다. 본선이 중도 확장성을 겨루는 게임이라면, 예선전인 각 당 경선의 핵심은 지지층 결집 여부가 핵심 변수다. 예선전에서 같은 편 등에 칼을 꽂는 행위를 일삼으면 정작 본선에선 지지층 분열로 자멸한다. ‘전쟁까지 승리의 나팔을 부느냐, 전투에서만 이기느냐’, 그야말로 개봉박두다.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12월 17일 국회에서 열린 정책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정치권에서 신사협정을 맺지 못할 때가 언제인 줄 아느냐. 바로 당 경선 때다.” 예산 정국을 끝으로 재보선 정국의 막이 오르자, 여의도 정치권 관계자가 던진 말이다. 경선 룰을 정할 때부터 본선보다 치열한 내부 알력 다툼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양측이 ‘루비콘 강’을 건너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상처뿐인 영광은 때때로 본선 패배로 이어진다.
9룡의 대결로 불린 1997년 신한국당 대선 경선이 그랬다. 당시 이회창 후보와 여론조사 1, 2위를 다투던 박찬종 후보는 당의 불공정 경선을 이유로 전당대회 막판 사퇴했다. 결선투표에서 이회창 후보와 맞붙었던 이인제 후보는 끝내 국민신당을 창당, 보수 분열로 이어졌다. 상처만 입고 본선에 진출한 이회창 후보(이하 득표율·38.7%)는 결국 김대중(DJ) 전 대통령(40.3%)에게 패했다.
진보진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2007년 열린우리당을 깨고 만든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정동영·손학규·이해찬 후보 등은 ‘선거인단 명부 박스떼기’, ‘선거인단 카풀 차떼기’ 의혹을 둘러싸고 네거티브 공방전을 펼쳤다. 당시 유시민 후보 캠프에 합류했던 한 인사는 “이 사건 이후 친노(친노무현)계와 비노(비노무현)계가 완전히 등을 돌렸다”고 말했다. 직후 치른 16대 대선에선 한나라당 후보로 나선 이명박(MB) 전 대통령(48.7%)은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26.1%)를 역대 최다인 560만 표 차이로 눌렀다.
문재인 대통령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맞붙었던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 당 대표 경선 때도 전당대회 엿새를 앞두고 바뀐 룰을 놓고 양측이 격렬히 대립했다. 당 전당대회준비위원회가 일반 당원과 국민 여론조사에서 ‘지지 후보 없다’고 한 응답을 유효 투표에서 배제하자, 박 원장은 “거취를 상의하겠다”며 탈당까지 언급했다.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이낙연호 출범 전 ‘대선 경선 규칙’ 작업에 착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민주당 한 의원은 “당의 운명까지 결정하는 경선 룰이 중요한 이유”라며 “본선 경쟁력을 넘어 경선 상처를 품을 수 있는 후보를 찾는 게 급선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 지지도 하락과 맞물려 재보선 위기론에 휩싸인 여당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처리를 끝으로 선거 체제로 전환했다. 첫 테이프는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 핵심인 우상호 의원이 끊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도전장을 낸 우 의원은 “차기 총선에 불출마할 것”이라며 배수진을 쳤다. 당 안팎에선 “우 의원이 서울시장 3파전(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박주민 의원)의 공을 쏘아 올렸다”고 평가했다. 민주당 재보선기획단은 12월 17일 회의를 열고 내년 설 연휴 직후인 ‘2말 3초’ 때 최종 후보를 선출키로 했다.
관전 포인트는 재보선 룰이 판세에 미치는 영향이다. 민주당은 수차례 논의 끝에 기존 경선 룰인 ‘권리당원 투표 50%+일반 국민 여론조사 50%’ 합산 방식을 유지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여성 후보 가점 25%(단 전·현직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 또는 지역위원장 여성 후보 10%)도 시행에 무게가 실린다. 당 서울시장 재보선 기획단장인 김민석 의원은 경선 룰과 관련해 “특별히 변경하자는 의견이 강하게 개진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다른 루트에서 흘러나온 내부 분위기는 판이했다. 당 선거기획단 한 관계자는 “국민여론조사 비율을 조정하자는 의견도 많았다”며 “다만 특정 후보가 문제제기를 할까 봐, 공론화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디션 방식의 파격 실험을 시도하지 않은 까닭도 특정 후보의 반발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간 여권 후보들이 추(추미애 법무부 장관)·윤(윤석열 검찰총장) 갈등에 숨죽이고 있었지만, 물밑에선 치열한 기 싸움을 펼친 셈이다.
당 복수의 관계자 말을 종합하면, 대중성에서 가장 앞선 후보는 박영선 장관이다. 최종 결단만 남은 박 장관이 여성 가점까지 부여받으면, 당내 경선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반 국민 여론조사 비율이 50%에 그쳤다는 점에서 박 장관이 얻을 수 있는 최상의 룰은 아니다.
박 장관과는 달리, 우상호 의원은 현역 의원과 원외 지역위원장 사이에서 지지세가 높다. 민주당 한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보궐선거 경선에서 우 의원을 뽑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다른 당직자도 “당 지역위원장 다수가 86그룹”이라고 전했다. 권리당원 다수를 점하는 친문(친문재인)계 사이에선 박주민 의원에 대한 지지세가 높다. 권리당원 투표가 50%에서 하향 조정되지 않은 점도 박 의원에게 유리할 것으로 전망된다.
결선투표제 도입 여부도 ‘3파전의 변수’로 꼽힌다. 결선투표제 도입은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종종 승부를 뒤집는 깜짝 이벤트 역할을 했다. 2016년 5월 4일 열린 민주당 원내대표 1차 투표에서 우원식(40표) 의원에게 밀린 우상호(36표) 의원은 결선 투표에서 7표 차로 신승, 대역전의 드라마를 썼다. 당 내부에선 결선투표제 도입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친문계 한 관계자는 “박 장관이나 우 의원이나 과거 경선 때 결선투표제 도입을 주장했었다”라고 말했다. 다만 복수의 의원들은 “결선투표 효과는 2∼3위 후보군의 연대 시너지”라며 “그런데 세 후보의 지지층은 다소 이질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우상호·박주민 의원 중 한 명이 결선에 갈 경우 표심이 한데 묶일지는 미지수”라고 부연했다. 결선투표제 도입의 파괴력이 미미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 경우 민주당 재보선 후보는 친문계 표심과 여론조사 우위 여부에 따라 갈릴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가 12월 17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당 비상대책위원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국민의힘은 여당과는 달리, 일찌감치 서울·부산 보궐선거 룰을 정하고 선거 체제에 돌입했다. 핵심은 민심 경선안이다. 예비경선에서는 공천심사위원회가 아닌 ‘100% 일반시민 여론조사’를 통해 4명의 후보군을 추린다. 특히 본선 진출자 4명 중 1명은 반드시 정치 신인으로 하는 ‘신인 트랙’도 도입하기로 했다. 이후 본경선에서는 ‘미스터트롯’처럼 전문가 패널과 시민평가단이 후보를 검증한다. 이후 ‘책임당원 투표 20%·일반시민 여론조사 80%’로 최종 후보를 가린다. 이에 따라 선호도 높은 후보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민의힘에서 서울시장 공식 출마를 선언한 인사는 물꼬를 튼 김선동 전 사무총장을 비롯해 이종구·이혜훈 전 의원, 조은희 서초구청장, 박춘희 전 송파구청장 등이다. 여기에 나경원 전 의원과 윤희숙 의원, 김근식 당협위원장(서울 송파병) 등도 후보군으로 거론된다. 현재 공식 출마 선언한 이들 중 판을 흔들 만한 후보는 없다는 게 중론이다.
당 내부에선 “외곽에 있는 후보가 판들 흔들어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나 전 의원의 장점은 높은 인지도다. 현재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여권 후보인 박 장관과 함께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 국민의힘 예비경선 룰(100% 일반시민 여론조사)에 따라 나 전 의원이 출마 결심만 한다면, 본경선 진출이 유력할 전망이다.
하지만 비호감도는 약점으로 꼽힌다. 여당 내부에선 나 전 의원의 높은 비호감도를 이유로 “나경원이 나오면 땡큐”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최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부터 출마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김근식 위원장은 “이달 중 거취를 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한 중진 의원은 “김 위원장의 덕담이 와전된 것”이라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이 때문에 국민의힘 내부에선 ‘안오유(안철수·오세훈·유승민)’의 출격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이 중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흥행 카드이자 야권 통합 마중물로 꼽힌다. 다만 국민의힘 다수 인사들은 안 대표를 향해 “당 안으로 들어오라”고 압박한다. 한 원로 인사는 “안 대표가 범야권 단일후보가 되고 싶다면, 국민의힘 경선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최종 후보자와 안 대표 간 후보 단일화 논의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셈이다.
안 대표를 비롯한 국민의당은 제3지대 연합을 원할 가능성이 큰 만큼, 양측의 갈등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유승민 전 의원은 서울시장 출마에 선을 긋고 연일 대권 행보 중이다. 이에 따라 김 위원장은 당분간 여러 후보를 만나면서 서울시장 판 키우기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