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권력기관 개혁 관련 3개 기관 합동 언론브리핑에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발표하고 있다. 사진=최준필 기자
콘크리트 같았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하락 추세로 접어들자 친문 진영 고민은 깊어졌다. ‘추-윤 공방’의 피로감이 쌓일수록 문 대통령 국정 운영에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란 지적이 쏟아졌다. 내년 4월 재보궐 선거 전망이 어두워지자 문 대통령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도 뒤를 이었다. 야당 반발에도 공수처법 개정안을 밀어붙인 것도 이탈하는 지지층을 잡기 위해서였다(관련기사 여권 공수처에 사활 건 속사정 ‘윤석열, 1호가 될 수 있어’).
동반퇴진론 기류가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동반퇴진론 골자는 윤 총장이 물러난 뒤 추 장관을 교체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윤 총장은 사퇴하지 않고 버텼다. 추 장관 거취의 전제조건이었던 윤 총장 사퇴가 물 건너가자 여권은 또 다른 해법 마련에 나섰다. 법무부 징계를 문 대통령이 재가한 뒤 추 장관이 사의를 표명하는 방안이었다. 한 친문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는 처지가 됐다. 어떻게든 올해 안에 해결을 해야 했다. 그렇다고 윤 총장을 억지로 끌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공수처 입법과 징계안 확정이 마무리되면 추 장관부터 교체하는 시나리오가 급부상했다. 윤 총장으로 인해 두 명의 법무부 장관이 바뀌는 셈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검찰개혁의 속도를 더욱 내게 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여기에도 변수는 있었다. 추 장관은 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상 경질로 비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추 장관 측 관계자는 “(추 장관도) 여권의 우려를 잘 알고 있었다. 세간의 비난쯤은 얼마든지 감수하겠다고 했다. 5선에, 당 대표까지 했는데 무슨 욕심이 더 있겠느냐. 문재인 정부 검찰개혁 선봉에서 성과를 냈다는 데 자긍심을 갖고 있다”면서 “그런데 마치 윤 총장에게 밀려서 쫓겨나는 듯한 모양새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다. 여권 일각에서 동반퇴진론이 제기됐을 때도 불쾌해했다”고 귀띔했다.
이에 문 대통령과 친문 실세들이 추 장관을 상대로 설득 작업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공수처법 개정안 통과와 윤 총장 징계가 마무리된 지금이 출구전략을 모색해야 할 때라는 데에 추 장관도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박수칠 때 떠나라’에 추 장관이 응답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추 장관 사의 표명 직후 “추 장관의 추진력과 결단이 아니었다면 공수처와 수사권 개혁을 비롯한 권력기관 개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대가 부여한 임무를 충실히 완수한 데 특별히 감사하다”며 높게 평가한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또 문 대통령은 윤 총장 징계에 대해 “임명권자로서 무겁게 받아들인다. 국민들께 매우 송구하다”며 “검찰이 바로 서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검찰총장에 대한 혼란을 일단락 짓고 검찰과 법무부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고 했다.
여권에서도 추 장관을 향한 칭찬이 쏟아졌다. 김태년 원내대표는 “추 장관의 결단에 경의를 표한다”고 했고, 홍익표 민주연구원장은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는, 여당 대표를 지낸 정치인다운 결정”이라고 했다. 청와대 민정비서관 출신 김영배 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당신을 기억할 것”이라면서 “철(鐵)의 장관 추미애, 정말 고생했다”고 했다.
겉으론 호평 일색이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복잡한 기류가 감지된다. 민주당 한 재선 의원은 “솔직히 지지율 다 까먹은 것 아니냐”고 말을 꺼낸 뒤 “결과만 놓고 보면 윤 총장을 자르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 추 장관이 서울시장 또는 대선에 나온다거나 하면 골치가 아플 수 있다. ‘돈키호테’ 추 장관이 토사구팽 당했다고 생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여권에서 끊임없이 제기됐던 이른바 ‘추미애 리스크’를 우려하는 발언이었다(관련기사 여권 흔드는 ‘추미애 리스크’ 막후).
윤석열 검찰총장이 12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여권 인사들은 추 장관 사의 표명으로 문 대통령 부담이 한층 줄었다고 본다. 우선, 윤 총장만 징계할 경우 예상되는 역풍을 최소화할 수 있게 됐다는 판단이다. 추 장관이 물러나면 윤 총장도 그만둬 이번 사태가 정리돼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는 점도 감안했다고 한다. 추 장관뿐 아니라 윤 총장에게도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의미다. 설령 윤 총장이 버티더라도 명분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징계를 받고, 대통령으로부터 불신임까지 받은 검찰총장이 무슨 명분으로 직을 지킬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윤 총장은 ‘정직 2개월’에 대해 집행정지 신청 및 취소소송을 냈다. 청와대는 소송 피고가 법무부 장관이기 때문에 입장을 내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했지만 윤 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는 “대통령 처분에 대한 소송이니깐 대통령에 대한 소송이 맞다”고 했다. 이제 문 대통령과 윤 총장 간 싸움이 시작된 셈이다. 강기정 전 정무수석도 12월 17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 “본인이 억울하면 따져보는 수단이기 때문에 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과 싸움이라는 걸 잊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윤 총장 측은 정직 기간 검찰 인사 및 수사 등이 정권에 휘둘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야권에서도 내년 1월 검찰 인사에서 정부 입맛에 맞는 검사들이 요직에 기용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낸다. 또 검찰에서 진행하고 있는 몇몇 수사가 흐지부지되거나 서둘러 종결될 수 있다는 얘기도 뒤를 잇는다. 특히 윤 총장이 각별히 챙겼던 월성1호기 원전수사에 관심이 모아진다. 윤 총장은 추 장관 직무배제 조치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을 법원이 인용해 업무에 복귀, 가장 먼저 월성1호기 건을 보고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치권에선 ‘추-윤’ 갈등의 분수령을 11월 5일로 꼽는다. 윤 총장 측근 이두봉 검사장이 이끄는 대전지검이 월성1호기 수사를 위해 산자부를 압수수색한 날이다. 이전까진 추 장관 ‘개인기’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날 이후 여권, 특히 친문 진영에선 그야말로 총공세에 나섰다. 원전 수사가 문 대통령을 겨누고 있다고 봤기 때문이었다. 윤 총장과 가까웠던 특수통 출신 한 변호사도 “월성1호기 수사가 역린이었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한 핵심 친문 의원은 “(월성1호기는) 수사가 아닌, 정치였다. 감사원 의뢰 건 등이 아니라 별건을 알아보고 다녔다. 대표적인 것이 백운규 전 산자부 장관의 임명 배경이었다. 백 전 장관을 천거해준 친문 실세가 누구인지를 파악하려 했다. 도대체 그것이 감사원 감사 방해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원전수사를 시작으로 정권을 들쑤시겠다는 게 윤 총장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런 내용을 듣고 나뿐 아니라 많은 동료들이 분개했다”고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도 이와 비슷한 얘기들이 흘러나왔다. 윤 총장이 ‘특수통’ 시절 수사 방식을 적용하다 정권과 등을 졌다는 게 골자다. 한 검사는 “윤 총장을 비롯한 특수부 검사들은 큰 그림을 그린 뒤 수사를 시작한다. 개별적인 수사를 진행하고, 이를 합해 퍼즐을 맞추는 것”이라면서 “이번 원전 수사도 마찬가지였다고 들었다. 윤 총장이 청와대 고위직 출신 정치권 인사를 최종 타깃으로 정했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왔다”고 전했다.
이는 친문 진영이 정치적 후폭풍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찍어내기’를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맞물릴 가능성이 높다. 윤 총장이 원전수사를 계기로 정권을 향한 반격을 도모했고, 이를 인지한 여권이 징계수순까지 밟았다는 얘기다.
앞서의 친문 핵심 의원은 “윤 총장이 검찰권을 남용한 것이다. 과거 이런 식으로 검찰이 정치적 수사를 했고, 그 부작용이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그래서 돌아가셨다”고 비판했다. 반면, 윤 총장 측 특수통 출신 변호사는 “핑계일 뿐이다. 윤 총장 팔다리를 다 잘라 놓고 무슨 수사를 했다고 그러느냐”면서 “윤 총장이 업무에 복귀해도 아마 지금처럼 식물총장이 될 것이다. 이를 알면서도 징계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소송을 결심한 것”이라고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