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6일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하고 있는 윤석열 검찰총장. 사진=임준선 기자
#‘15%’의 법칙
‘신의 물방울’이라고 불리는 와인의 알코올 도수는 10도에서 15도 사이를 오르내린다. 이 정도 도수가 기분 좋은 상태의 적당한 취기를 형성한다는 실험적 결과에, 인류는 와인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왔다.
정치판에도 와인의 알코올 도수와 비슷한 경험칙으로 자리 잡은 룰이 있다. 여론조사 지지율 10%를 넘어 15%에 이르면 자연인들은 ‘참을 수 없는 용기’가 생긴다는 것이다. 15%가 넘으면 출마 희망자 본인도 그러하지만, 주변에서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무조건 됩니다”라는 진언이 쏟아져 들어온다고 전·현직 정치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현재 그런 상황을 맞고 있다. 윤 총장은 12월 9일 발표된 한길리서치(28.2%)와 리얼미터(25.8%) 여론조사에서 모두 여권 유력 대선주자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오차범위 이상 차이로 제치고 1위에 올라섰다. 윤 총장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의 갈등이 격화된 지난 10월부터 여론조사 지지율 15%를 넘어서면서, 수치상으로만 보면 확실한 대권주자 대열에 들어갔다(한길리서치와 리얼미터의 자세한 조사개요와 결과는 여론조사업체 홈페이지 및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고).
정치권에서는 15%를 넘어 30%에 육박하는 시점이면, 이미 본인은 물론 주변의 ‘인내 임계점’을 넘어선 것으로 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2007년 당내 경선부터, 이후 청와대에 입성할 때까지 큰 공을 세웠던 한 정치인의 얘기다.
“자신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15%를 넘어가면 스스로 대권 도전 유혹을 자제하기 힘들다. 자신도 그러하지만 그를 옹립하려는 세력이 모여들고 그 거점이 마련되면 국민과 시대의 부름에 응답하라는 지지자들의 요구도 쏟아진다. 이를 뿌리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윤 총장도 지금 바로 그런 지점에 서 있지 않는가.”
4선의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도 비슷한 해석을 내놨다. 검사 출신으로 윤 총장을 개인적으로 잘 안다는 권 의원은 “원래 정치할 성향은 아니지만 지지율이 급상승하는 구조가 윤 총장을 정계 입문으로 이끌 수 있다”며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놨다.
윤 총장은 추미애 장관을 넘어 이제는 문 대통령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모습이다. 정직 2개월 징계에 대해 12월 17일 제기한 정직 처분 취소소송은 자신의 임명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의 징계 재가에 대한 불복종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법조인들에 따르면 윤 총장의 행정소송 대상은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추미애 장관이다. 하지만 ‘법률 전문가들인’ 윤 총장 측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이 징계 처분을 재가한 만큼 대통령에 대한 소송으로 볼 수 있다는 정치적 설명을 내놨다. 윤 총장 측 이완규 변호사는 기자들에게 보낸 입장문에서 이번 소송과 문 대통령과의 관련성에 대해 “대통령의 처분에 대한 소송이니 대통령에 대한 소송이 맞다”고 발언, 문 대통령을 겨냥하면서 대통령을 끌어들이고 있다.
윤 총장이 대놓고 대통령과 겨루는 모습을 보이면서, 윤 총장의 지지율은 향후 오르면 올랐지 더 내려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여전히 많은 물음표
정치판에서는 윤 총장의 ‘결심’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설마 나서려고. 그럴 리 없다”라는 ‘설마론’도 여전하다.
먼저 윤 총장 본인이 절대 정치에 나서지 않을 성향이라는 얘기가 많이 나온다. 실제 윤 총장은 10월 29일 대전고검과 대전지검을 방문해 검사들과 직접 만난 자리에서 자신의 향후 거취를 털어놨다고 한다. “퇴임 후 2년 동안 변호사 개업도 못하는데 국정감사장에서 ‘백수가 돼 강아지 세 마리를 보면서 지낼 것’이란 이야기를 어떻게 하느냐”고 말했다는 것.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퇴임 후 우리 사회와 국민을 위해서 어떻게 봉사할지 그런 방법을 천천히 생각해 보겠다”는 발언에 대한 윤 총장의 솔직한 토로였다. 윤 총장은 애완견으로 비숑 두 마리와 장애를 가진 진돗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법시험을 늦은 나이에 합격해 출발이 늦었던 윤 총장으로서 정치할 마음이 있었으면 벌써 오래전에 했다는 주변 목소리도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첫해인 2013년 국정원 댓글 공작 의혹 사건의 수사팀장이었던 윤 총장은 국회에서 “상부의 수사 방해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가 정직 1개월 징계를 받고 박근혜 정부 내내 대구고검 대전고검으로 좌천성 인사를 당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이 윤 총장을 적극적으로 영입하려했지만, 윤 총장은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윤 총장은 정치에 뜻이 없는 사람이다. 대선 출마 가능성이 높다고 하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검찰을 사랑하고 아끼는 검찰주의자다. 국민을 위한, 국민의 안전을 위해 나쁜 사람을 잡아들이는 검찰에 대해 정권이 부당하게 간섭하면서 검찰의 정치적 중립과 수사의 독립을 무너뜨리자, 거기에 맞서면서 저항하는 것이다. 그를 곡해해서는 안 된다.” 윤 총장과 함께 근무했던 한 검사 출신은 이렇게 자신했다.
현직에 있는 한 검찰 간부 역시 “퇴임 후 국민 봉사 발언이 무슨 정치하겠다는 말인가. 그것은 우리나라 풍습으로 따지면 인사치레로 ‘식사하셨습니까’라고 말을 건네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상투적인 언사인데 그 말을 물고 늘어지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것이다. 윤 총장이 정치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전화통화를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복잡해진 제1야당
제1야당 국민의힘은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다. 경량급 강타자쯤으로 봤던 윤 총장이 1년간 이어진 추미애 장관과의 대결을 통해 중량급 돌주먹으로 올라서더니, 이제 문 대통령과 직접 겨루면서 헤비급 핵주먹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공수처법 개정안 등에서 민주당에 판판이 밀리며 당해온 국민의힘은 일단 윤 총장의 힘을 최대한 이용하려는 자세다. 대여 투쟁력 강화를 위해 윤 총장을 지렛대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때문에 윤 총장 보호를 위한 후방 지원 사격에 총력전을 펴는 양상이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윤석열 총장을 향한 여권의 비난에 대해 “민주당 의원들이 ‘찌질하다’ ‘뻔뻔하다’ ‘자멸할 것이다’ ‘대통령과 싸우자는 것’ 이런 온갖 비방으로 윤 총장을 끌어내리려 하고 있다. 민주당의 이런 작태야말로 찌질하고 뻔뻔하고 자멸을 자초하는 태도”라고 공격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족보 따지지 말고 물 흐르는 대로 가보자’는 의견도 많다. 윤 총장이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하는 데 큰 역할을 했지만, 그런 것 따질 여유가 없는 형편이라는 ‘현실론’이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의 윤 총장에 대한 의중을 떠봤다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김 위원장도 비슷한 견해라고 전했다. 한 초선 의원의 전언이다.
“김 위원장은 윤 총장이 잘 버티면 베어낼 수 없는 큰 나무로 성장한다는 예견을 해왔다. 윤 총장은 추 장관과의 1년 동안 전투에서 큰 상처 없이 지금까지 왔으며 여론조자 지지율도 상승세다. 오히려 집권세력이 이제는 추 장관을 정리하려는 상황으로까지 흘러왔다. 김 위원장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이제는 국민의힘도 윤 총장을 마음대로 제어하기는 힘들어진 것 아닌가. 지금 벌어지는 현상을 전략적으로 잘 이용해야할 때가 왔다.”
윤 총장의 임기가 2021년 여름까지인 것을 감안하면 최소 상반기까지는 윤 총장에 대한 주목도가 떨어질 가능성은 없다. 더욱이 국민의힘이 윤 총장의 지지도를 봄에 치러지는 보궐선거 때도 업고 가야 하는 그림이 나올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힘은 차기 대선 정국에서 윤 총장을 ‘모시는 처지’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대체적 관측이다. 윤 총장에 대한 주목도가 커지면 커질수록 국민의힘 토종 후보에 대한 주목도가 사라지는 ‘큰 나무 그늘 효과’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내 분란이다. 윤 총장과는 절대 함께 갈 수 없다는 ‘역사주의자들’이 여전히 많다. 정당은 뿌리가 있는 법인데 정당의 뿌리를 흔들어놨던 윤 총장을 받는다면 당이 쪼개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남의 한 국민의힘 의원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던 반짝 인기 후보들의 이름을 윤 총장에 빗대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내놓은 대통령을 적폐세력으로 몰아 구속수사를 지휘했던 사람이 어떻게 우리 당 대통령 후보가 되나. 그렇게 되면 영원히 근본 없는 당이 된다. 지지율은 언제든지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이다. 윤 총장이 퇴임하고 대선 투표일까지 6개월 이상이 남는다. 그 기간에 신기루는 사라진다. 당의 분란까지 만들어질 텐데 분란의 씨앗을 키울 수 있나. 윤 총장은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뛰도록 놔두고 공당의 대선 준비는 따로 진행하는 것이 맞다.”
강민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