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회에 입장한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오른쪽)과 주호영 원내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반문’을 기치로 내건 보수 성향 정당과 시민사회단체 대표들은 12월 10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문재인 정권 폭정 종식을 위한 정당·시민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투쟁기구인 ‘폭정종식 민주쟁취 비상시국연대(비상시국연대)’가 출범했다.
이날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등과 함께 비상시국연대의 공동대표에 이름을 올렸다. 주 원내대표는 “현실 인식과 처방에 대해서는 각각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문재인 정권을 조기에 퇴진하고 폭정을 종식해야 한다는 데는 다른 생각을 가진 분이 없는 것으로 안다”며 “많은 분들의 말씀을 듣고 국민의힘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최선을 다 하겠다”고 밝혔다.
정가에선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태극기 세력’과 다시 손을 잡는 것인지에 관심이 모였다. 실제 주호영 원내대표는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향해 연일 발언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주 원내대표는 12월 14일 ‘대북 전단 살포 금지법’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로 나서 정부와 여당을 향해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파괴한 세력, 법치주의를 파괴한 세력으로 기록될 것”이라며 “이 정부가 가고 있는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어 17일 국회에서 열린 비상대책위원회의에서는 사의를 표한 추미애 법무부 장관에 “축하한다. 망나니 역할을 아주 충실히 잘 수행했다”며 “문재인 대통령도 거룩하게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윤석열 총장을 잘 제압했다. 축하드린다”고 했다.
민주당 신영대 대변인은 “주호영 원내대표가 필리버스터 마지막 주자로 나와 26분간 정부와 여당에 막말을 넘어 저주를 퍼부었다”며 “얼마 전 ‘반문비상시국연대’의 공동대표가 되더니, 원내대표직은 버리고 극우 태극기부대의 대표가 된 것 같다”고 비판했다.
비상시국연대는 문재인 정부 조기 퇴진 투쟁에 힘을 모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보수진영이 다시 극우적 투쟁 활동을 재개할 경우 오히려 문재인 정부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범야권은 1년여 전에도 비슷한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국민의힘 전신인 자유한국당은 2019년 11월 여당의 공수처설치법, 공직선거법 등 강행 처리에 맞서기 위해 국회 밖으로 나갔다. 황교안 당시 대표는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 천막을 치고 8일간 단식투쟁을 벌이다 의식을 잃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다. 여당의 법안처리를 막진 못했지만, 이후에도 황교안 전 대표는 태극기 세력과 함께 광화문 등 거리로 나가 문재인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규탄대회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보수진영의 문재인 대통령 퇴진 주장은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무리한 삭발·단식투쟁, 극단적이고 대립으로 치닫는 모습에 국민들이 피로감을 느껴 여론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는 4·15 총선 참패로 이어졌다.
공교롭게 1년 만인 2021년 4월 서울과 부산시장을 뽑는 보궐선거가 예정돼있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지난 총선 악몽을 우려하며 극우세력과의 선긋기 목소리가 높다. 국민의힘 재선 의원의 토로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한 명의 의원이 아니라, 원내 의원들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국민들은 그의 발언과 행동을 국민의힘 의원 전체를 대표하는 입장으로 본다. 이미 총선의 참패 요인 중 하나가 1년 전 광화문 집회인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극우세력과 손을 잡으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이길 수 없다. 그런데 주 원내대표가 왜 태극기 세력이 주도한 회의에 참석해 공동대표까지 맡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국민의힘 초선 의원도 “코로나19 방역 실패와 추-윤 갈등으로 문재인 대통령 국정 지지도가 많이 떨어졌다. 그럼에도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 때처럼 탄핵에 이를 정도는 아니다”라며 “비상시국연대는 대뜸 조기 퇴진을 말하고 있다. 수위가 과격해지면 국민의 공감대를 얻기 힘들다. 그럼 보궐선거에서 어떻게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해 국민의힘 의원들이 12월 14일 국회 로텐더홀 계단 앞에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을 향해 규탄대회를 벌이고 있다. 사진=박은숙 기자
국민의힘 내부에선 비상시국연대와의 스탠스를 둘러싸고 당내 갈등이 증폭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벌써부터 당내 투톱인 김종인 비대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사이에 틈이 생기는 모양새다.
비상시국연대에 참여한 주 원내대표와 달리, 김종인 비대위원장은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법처리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김종인 위원장은 12월 15일 국회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국가를 잘 이끌어 가라는 공동 경영의 책임과 의무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게 된다. 대통령 잘못은 곧 집권당의 잘못이기도 하다”며 “박 전 대통령 탄핵으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두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된 문제와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간절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했다.
김종인 위원장 사과를 놓고 당내에선 반응이 엇갈린다. 4선 김기현 의원은 자신의 SNS에 “국민의힘이 수권정당으로서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걸음을 내디뎠다”며 “굴욕이 아니라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진심”이라고 평가했다. 과거 친박계로 분류됐던 권영세 의원도 “본격적으로 이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기 위해서라도 사과는 필요했다고 본다”며 “이제부터 중요한 건 사과문 중 국민들께 약속한 부분에 대한 실천”이라고 밝혔다.
반면 서병수 의원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특정 기업과 결탁해 부당 이익을 취했고, 경영승계 과정의 편의를 봐줬으며 권력을 농단했으니 하면서 재단해버리면 어쩌겠다는 것인가”라며 “비대위원장이 사과할 게 있다면 기업할 자유를 틀어막고 말할 권리를 억압하고 국민의 삶을 팽개친 입법 테러를 막아내지 못한 것에 국민을 뵐 면목이 없다는 통렬한 참회가 옳지 않았을까”라고 반문했다.
향후 태극기 세력과의 연대 강도에 따라 당내 갈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도 있다. 특히 김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쌓여온 과거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통렬히 반성하며 정당을 뿌리부터 다시 만드는 개조와 인적쇄신을 통해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4월 보궐선거를 앞두고 중도층 확장을 위해 당내 강경 보수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을 배제하고 개편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당 지도부 사이의 다른 입장이 갈등이 아니라 ‘투트랙 전략’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주호영 원내대표는 열혈 지지층을 잡고, 김종인 위원장은 중도로 지지층을 확산하는 역할 분담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황교안 대표 체제에서는 자유한국당 전체가 극우적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며 “당내 갈등이 있는 것처럼 비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집토끼와 산토끼를 동시에 공략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TK(대구·경북)를 지역구로 한 의원은 주호영 원내대표가 비상시국연대에 참석한 것에 대해 “주호영 원내대표 입장에서는 본인의 지역구인 대구 민심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며 “문재인 대통령 조기 퇴진을 위한 투쟁 방식도 과거와 같지 않을 거라고 본다. 지난 총선을 통해 대규모 집회와 규탄대회가 효과 없음이 증명됐다. 또한 코로나19 정국에서 어떻게 거리로 나가 대규모 시위를 열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