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욱 NC 다이노스 감독은 무명 선수 출신이라는 설움을 딛고 ‘우승 감독’으로 거듭났다. 사진=이영미 기자
투수 중에는 SK 와이번스와 넥센(키움) 히어로즈에서 방출당하고 입단 테스트를 거친 끝에 NC의 중심 투수로 성장한 김진성과 2015년 대장암 판정을 받았지만 이를 기적적으로 극복해낸 인간승리의 표본 원종현이 대표적이다. 타자 중에는 창단팀 입단 9년 만에 주전 1루수로 도약한 강진성이 있다. 고교 시절 특급 유망주였지만 프로 입단 후 포수, 외야수 등을 전전하다 올해 마지막이란 각오로 1루수로 전향했고, 부상 중인 모창민의 빈자리를 메우다 주전으로 일어섰다.
#“이동욱이 누구야?”
선수들뿐만이 아니다. NC 사령탑을 맡은 지 2년 만에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쥔 이동욱 감독도 사연 다이노스의 리더답게 다양한 스토리를 자랑한다.
이동욱 감독의 선수생활은 짧고 가늘었다. 동아대 졸업 후 1997년 2차 2라운드 전체 13순위로 롯데의 지명을 받은 그는 6시즌을 보내고 방출됐다. 통산 출전 경기 수가 143경기. 2003년 현역 은퇴한 그는 2004년 29세의 나이에 롯데 2군 수비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LG 트윈스를 거쳐 창단팀 NC까지 줄곧 수비코치를 맡았다.
수비코치는 투수코치나 타격코치와 달리 미디어의 노출이 거의 없는 편이다. 2018년 10월 NC 구단이 2대 사령탑으로 이동욱 감독 선임을 발표했을 때 일부 팬들은 “이동욱이 누구야?” 하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 감독은 최근 인터뷰 자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감독 선임 발표 후 식당에 갔는데 TV에서 ‘NC 2대 감독으로 이동욱 코치가 선임됐다’는 내용이 방송됐다. 그때 바로 뒤에 앉아 계시는 아저씨 한 분이 그걸 보고 “이동욱 갖고 되겠나, 김 감독도 안 됐는데 우짜려고 그라노”라며 화를 내시더라. 감독 되자마자 바로 민심을 알게 된 것이다. 감독이란 자리가 노력만 해선 안 되겠구나, 노력에다 뭔가를 더 얹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동욱 감독은 선수 시절 코치들로부터 “넌 왜 그것밖에 못하지?”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뼈아픈 경험은 지도자 생활에 큰 교훈으로 작용했다.
“젊을 때는 선수 생활을 실패했다는 게 창피했다. 가장 어린 나이에 코치 생활을 시작한 것도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때의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절감하고 있다. 선수는 실패했지만 내가 도움을 준 선수들이 성장하는 걸 보면서 갖는 희열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더라. 프로에 왔다는 건 어느 정도 재능이 있다는 의미다. 단점을 고치기보다 선수 개개인의 개성과 장점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게 중요했다. 즉 선수보다는 코치의 길이 나한테 맞는 자리였다.”
감독은 무명 선수 출신이지만 코치진은 화려하다. 강인권 수석코치를 비롯해 롯데 시절 MVP를 수상한 에이스 손민한 투수코치, 현대 시절 다승왕을 이룬 김수경 불펜코치, 통산 337개의 홈런을 친 이호준 타격코치 등이 이 감독과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 감독은 평소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인터뷰도 코치들을 내세우고 자신은 뒤에 머무르려 한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말을 많이 하다 보면 본의 아니게 선수들에게 상처를 입힐 때가 있다. 나도 선수 시절 그 말로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터라 가급적이면 인터뷰를 통해 선수들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대신 직접 대화하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대화할 때도 심각한 이야기보다 박수도 쳐주고, 등도 한 번 두드려 주면서 동기부여가 되게끔 이끌어가려고 한다.”
이동욱 감독의 커리어에는 한 시즌(2006년) 동안 롯데 전력분석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는 “수비코치에서 잘리고 오갈 데 없는 상황이었는데 친구인 손민한 코치(당시 롯데 선수)가 롯데 단장한테 자리를 부탁해서 들어간 게 전력분석원이었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친구가 지금은 이 감독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맡고 있다.
원종현은 대장암을 극복하고 선수로 복귀해 ‘인간승리의 표본’으로 불린다. 사진=이영미 기자
# 항암치료 이겨낸 ‘155’ 원종현
두산 베어스와의 한국시리즈 6차전이 종료되면서 NC의 우승이 확정됐을 때 포수 양의지는 포효하며 마운드에 있던 원종현한테 달려갔고, 원종현과 양의지는 서로 얼싸 안으며 기쁨을 만끽했다. 원종현은 “지금까지 야구하면서 그때가 가장 멋진 순간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한국시리즈 1·3·5·6차전에 등판 2세이브를 수확한 원종현의 평균자책점은 ‘0’이었다. 굴곡진 야구 인생을 보낸 그로선 한국시리즈 우승이 확정된 순간에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06년 LG 트윈스에 입단한 원종현은 1군 경기에 단 한 차례도 등판하지 못하고 방출됐다. 자비로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재활훈련을 이어갔다. 그 무렵 창단팀 NC가 선수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공개 테스트를 받기 위해 NC 선수들이 모여 훈련하고 있는 전남 강진으로 향했다.
“김경문 감독님이 보시는 자리에서 테스트를 받았고, 합격 여부를 나중에 알려준다고 해서 다시 강진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는 강진에서 훈련받고 있는 선수들이 정말 부러웠다. 나도 그들 틈에서 같이 훈련받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마침내 합격 통보를 받은 원종현은 부모님이 계시는 군산에서 짐을 챙겨 다시 강진을 찾았다. 2년간 2, 3군을 오가며 최일언 투수코치의 지도 아래 투구폼을 바꾸면서 시속 155km까지 구속을 끌어 올렸고, 이후 NC 불펜의 한 축을 담당하며 1군에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15년 28세의 나이에 대장암 2기 진단을 받은 것이다.
“그때의 목표는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1군에 올라 공 1개라도 던지면 여한이 없겠다는 마음으로 버텼다. 무엇보다 감독님, 코칭스태프 선수들이 나를 상징하는 ‘155’라는 숫자를 모자에 적어 넣고 시즌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그걸 알고 나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155’라는 숫자는 2014시즌 준플레이오프 당시 원종현이 던졌던 최고 구속(155km/h)을 의미한다. 2015년 스프링캠프에서 조기 귀국 후 대장암과 사투를 벌인 원종현은 수술과 12차례의 항암치료 끝에 성공적으로 투병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머리카락은 빠졌고, 체중이 줄면서 몸은 점점 말라갔지만 마침내 그는 2015년 10월 18일 플레이오프 1차전에 선수가 아닌 시구자로 마운드에 서면서 팬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때 마운드로 걸어가면서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팬들에게 원종현이 건재하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구단에서도 중요한 경기에 나를 시구자로 선택하면서 엄청난 동기부여를 해줬다. 그 시구를 마치고 더 열심히 훈련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원종현은 2016년 5월 31일 1군 엔트리에 등록했고, 1군 복귀한 날 9회 두산전에 등판, 오재원 민병헌 오재일을 모두 삼진으로 잡았는데 이때 최고 구속이 무려 시속 152km였다. 원종현의 인간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진성은 무명 시절 두 번의 방출 시련을 겪었다. 사진=이영미 기자
#기나 긴 무명 탈출 김진성
한국시리즈 6차전 동안 전 경기에 등판한 선수가 있다. NC의 ‘믿을맨’ 김진성이다. 한국시리즈 6경기에 모두 나서 6.2이닝 동안 무실점으로 호투를 펼친 그는 우승 후 딱 하루 쉬고 그 다음날부터 야구장으로 출근, 회복 훈련을 했다.
김진성은 두 차례 방출을 경험했고, 두 차례 입단 테스트를 거치면서 프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11년 NC 공개테스트는 그가 잡은 마지막 희망의 끈이었다. NC 소속 선수로 뛰면서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2013년 NC가 처음으로 1군 경기에 출전하면서 김진성도 1군 무대에 설 수 있었는데 그는 당시 자신은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진 무명 선수에 불과했다고 회상한다.
“많이 위축됐다. TV로만 봤던 유명한 선수들을 상대하는데 너무 떨리고 긴장돼 공을 제대로 던질 수 없었다. 야구장 외야에서 몸 풀다가 상대팀 유명 선수와 마주치면 내가 먼저 피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인사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공을 던졌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나.”
2014년 김진성은 프로 데뷔 10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생애 첫 올스타전에 마음이 들떴지만 타 팀 선수들 중 아는 이가 없다는 사실에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그때 함께 올스타전에 출전한 이종욱 코치한테 선수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 좀 데리고 다녀달라고 부탁했다. 종욱이 형이 나를 챙겨주셨고, 덕분에 동갑내기인 나지완, 장원준을 소개받았다. 두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는데 마치 연예인한테 전화번호 받은 것처럼 엄청 설렜던 기억이 있다.”
김진성은 부모의 이혼으로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자랐다. 그런데 지난 4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임종도 못 지켰다는 자책감이 그를 괴롭혔다.
“한국시리즈 우승하니까 할아버지 생각이 더 나더라. 이 모습을 직접 보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싶어 마음이 아팠다.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나오면 반지 들고 할아버지한테 인사드리러 갈 예정이다. 우승했다고, 우승 반지 갖고 왔다고, 손자 잘하고 있으니 하늘에서 편히 계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