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안팎에서 ‘제3 후보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김경수 경남도지사의 대선 레이스 이탈 후 친문(친문재인) 후계자를 둘러싼 새판 짜기의 막이 오른 것이다. 특히 양강구도인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지지도가 박스권에 갇히자, 여권 인사들은 4∼5명의 유력한 제3 후보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제3 후보에 베팅하는 이들도 부쩍 늘었다. 이 국면은 여권 내부 권력구도뿐 아니라, 대선발 정계개편의 핵이다.
여권 안팎에서 차기 대선 ‘제3 후보론’이 거론되고 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11월 20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5주기 추모식에서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국회사진취재단
복수의 여권 관계자들이 꼽은 제3 후보는 정세균 국무총리를 비롯해 임종석 전 청와대 대통령 비서실장, 이인영 통일부 장관, 민주당 이광재·박용진 의원 등이다. 대통령 빼고 다 해본 정 총리(1950년 생)와 97(90년대 학번·70년대 생)세대 대표인 박 의원(1971년 생)을 제외하면 모두 86(80년대 학번·60년대 생)그룹이다. 지역적으로는 호남이 과반을 차지한다. 정 총리는 전북 진안, 박 의원은 전북 장수 출신이다. 임 전 실장은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나머지는 충청(이인영)과 강원(이광재)이 고향이다. 여권 대선 승리 방정식의 키인 PK(부산·울산·경남) 주자는 없는 셈이다. 여권 한 관계자는 PK 후보 부재론에 대해 “제3 후보 파괴력에 의문이 제기되는 지점”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른 관계자는 “어차피 이 대표(전남 영광)나 이 지사(경북 안동)도 PK 후보가 아닌 것은 매한가지”라고 말했다.
여권 제3 후보론에 가장 근접한 주자는 정 총리다. ‘경제형·통합형’ 총리를 표방한 그는 1년 내내 K방역의 최전선에 섰다. 12월 들어 코로나19 3차 대유행 확산세가 지속하자, ‘5인 이하 집합금지’라는 초강수도 띄웠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정 총리는 소리 없이 강한 남자”라며 “이 대표와 이 지사 지지도가 20% 안팎에서 고착된다면, ‘정세균 대망론’이 부상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당·청 관계자들이 꼽은 정 총리 강점은 △선거의 제왕 △친문계와의 화학적 결합 △안정감과 경제통 등이다. 1996년 제15대 총선 때 원내 입성한 정 총리는 20대 총선까지 내리 6선을 했다. 이 중 두 차례(19·20대)는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당선됐다. 낙선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특히 종로 대전에선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인 홍사덕 당시 새누리당 후보와 보수진영의 대권 잠룡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맞붙어 52.3%와 52.6%의 득표율로 승리했다. 정 총리가 ‘선거의 제왕’으로 불리는 이유다. 정 총리 측 관계자는 “정 총리 선거 전략의 핵심은 지역 곳곳을 도는 ‘그물망식 운동’”이라며 “오 전 시장 등을 꺾은 결정적 이유”라고 전했다.
정 총리의 계파 포지션도 대망론 점화에 유리할 수 있다. 정 총리가 노무현 정부 당시부터 형성했던 SK(정세균)계는 범친노(친노무현)계로 분류된다. SK계는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 등 친노 직계와 2002년 대선 당시 양대 산맥이었던 부산파와 금강파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민주당 한 보좌관은 “친문계와 가장 잘 어울리는 동맹자는 SK계”라고 전했다. SK계 세력화 상징인 ‘광화문 포럼’에 손을 내민 현역 의원도 40명 안팎에 달한다. 협치를 중시하는 정 총리는 야권 인사들과도 가깝다. 대권 불가론의 제1항목인 ‘비호감도가 낮다’는 점도 대망론을 띄우는 데 한몫한다. 기업인 출신(쌍용그룹 상무이사)이라는 점도 장점이다. 정 총리는 소득주도성장론의 원조 격인 분수경제론의 창시자다.
그러나 ‘정세균 불가론’도 만만치 않다. 정 총리는 당장 진보진영을 옭아맨 ‘호남 필패론(호남 출신 대선주자는 필패한다)’의 잔혹사부터 끊어내야 한다. 문제는 정 총리의 최대 아킬레스건인 인지도 대비 낮은 지지도가 호남 필패론을 한층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정 총리 선호도는 3∼5%에 불과하다. 정 총리가 장기간 한 자릿수 박스권에 갇힐 경우 당분간 ‘호남 구애’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정 총리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20주년을 맞은 12월 20일 “(DJ는) 저를 있게 한 정치적 탯줄이자 아버지”라고 치켜세우자, 당 내부에선 이낙연 대세론을 의식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전남지사 출신인 이낙연 대표는 ‘DJ 키즈’로 통한다. 기자 시절 동교동계를 출입했다. 정치권 입문을 권유한 이도 DJ였다.
최근 ‘총리 파세요’ 등 과도한 홍보로 뭇매를 맞았던 것도 뜨지 않는 지지도로 인한 조급함이라는 지적이 많다. 여의도 한 분석가는 “결정적인 한 방이 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 총리가 양강 체제를 흔들지 못할 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서울시장 차출론이 부상할 수도 있다. 친문계가 정세균 대망론을 옹립할지도 미지수다. 친문계가 대거 합류한 ‘민주주의4.0 연구원’ 출범 이후 여권 안팎에선 “차기 대선이 다자 구도로 흐른다는 신호탄”이라는 분석이 흘러나왔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20년 1월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모습. 사진=박정훈 기자
사실상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임종석 전 실장이 대선 한복판으로 소환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문재인 정부 들어 신 친문으로 부상한 임 전 실장은 86그룹 핵심이다. 임종석 대안론이 부상하면 친문 직계와 86그룹,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 등이 단일대오를 형성, 상당한 파괴력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임 전 실장은 김경수 경남지사의 유죄 선고 이후 당 안팎에서 차기 대선 출마 요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임 전 실장이 고심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변수는 2021년 4·7 재보궐 선거와 포스트 이낙연호다. 86그룹에선 이미 우상호 민주당 의원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우 의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된다면, 86그룹 역할론이 재조명받을 것으로 보인다. 86그룹인 송영길 의원은 재보선 이후 예정된 민주당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시장 우상호·민주당 대표 송영길’ 등이 현실화된다면, 장고 중인 임 전 실장이 출마로 선회할 수 있다는 얘기다.
운동권 그룹에선 임 전 실장 이외에도 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사실상 몸풀기에 나섰다. 이 장관은 “할 일이 있다면 정권 재창출에 몸 던지겠다”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정 총리와 마찬가지로, 낮은 지지도 등은 임 전 실장과 이 장관 등 86그룹이 넘어야 할 산이다.
제3 후보론의 다크호스로는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꼽힌다. 9년 만에 여의도에 입성한 이 의원은 원조 친노다. 노무현 정부 시절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함께 ‘좌희정·우광재’로 불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다. 2020년 4·15 총선 당시 그를 영입한 이도 친노계 좌장이자 킹메이커인 이해찬 전 대표였다. 이 의원은 선거 땐 공동선거대책위원장, 당선 이후엔 당 미래전환 K-뉴딜위원회 총괄본부장을 각각 맡았다. 21대 국회 들어서도 뉴딜 펀드 등 포스트 코로나 정책 등을 주도하고 있다.
2020년 7월 30일 박용진 민주당 의원의 일요신문 인터뷰 모습. 사진=최준필 기자
최근 현역 의원들 사이에서도 이광재 대안론을 언급하는 이들이 차츰 늘고 있다고 한다. 친문 직계인 홍영표 민주당 의원도 이 의원을 정 총리·임 전 실장과 함께 제3 후보로 콕 집었다. 한 당직자는 “정책 보좌관들이 눈여겨보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라고 귀띔했다. 이 의원은 대선 출마와 관련해 “나는 부족한 사람”, “원래 김경수 지사를 도우려고 했다”며 손사래를 치지만, 제3 후보 찾기에 나선 친문계가 인물난에 허덕일 경우 중대 결단을 요구받을 수도 있다.
이 의원은 최근 ‘노무현이 옳았다’란 제목의 책을 출간한 뒤 부산과 강원 등 전국을 오가며 스킨십을 늘리고 있다. 문 대통령도 이 지사의 새로운 아이디어 등 정책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지사 출마 여부에 따라 친문 직계와 원조 친노 등이 함께하는 ‘범친노 연합군’이 대선판을 흔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97세대 간판인 박용진 민주당 의원도 주목할 대상이다.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각오가 돼 있다”며 대권 도전 의지를 드러냈다. 86그룹과 마찬가지로, 서울시장 후보군인 같은 당 박주민 의원의 선전 여부에 따라 박용진 의원을 중심으로 한 세대교체의 파괴력도 결정될 전망이다. 박주민·박용진 의원은 ‘97세대 쌍두마차’로 불린다.
이 밖에 김두관 민주당 의원, 최문순 강원도지사, 양승조 충남도지사 등도 대권 도전을 저울질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여권 인사들은 일제히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모양새”라고 말했다. 바야흐로 친문 적자 경쟁을 둘러싼 대혈투의 막이 오른 셈이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