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사 이래 최대 위기 두산그룹’ 박정원
124년 역사를 가진 국내 최고(最古) 기업 두산그룹은 2020년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빠졌다. (주)두산을 정점으로 구성된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 연결고리 역할을 했던 두산중공업이 유동성 문제를 겪으면서 그룹 전체가 흔들렸고, 결국 정부에 손을 내밀했다. 두산그룹은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등 채권단으로부터 3조 6000억 원을 수혈 받는 대신 자산 매각, 비용 축소 등 자구노력을 통해 3조 원을 확보하고 조기 경영 정상화를 이끌어내겠다고 약속했다.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이 2016년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최근 두산중공업은 계열사인 두산인프라코어 최종 인수 후보로 현대중공업 컨소시엄을 선정했다. 자구안 이행의 마지막 퍼즐로 통했던 인프라코어 매각이 완료되면 2020년 3월부터 두산그룹이 진행해 온 구조조정은 사실상 마무리된다. 금융투자업계에선 단기간 내 자구안을 이행한 만큼 모범적인 구조조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약속한 목표를 초과 달성한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에게도 합격점을 주고 있다. 박 회장은 채권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 받을 당시 “올해(2020년) 안으로 최소 1조 원을 상환하겠다”고 밝혔다.
자구안이 마무리되면서 박 회장은 그룹 경영 정상화에 속도를 낼 것으로 관측된다. 핵심 역할을 담당할 두산중공업을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회사로 전환할 방침이다. 현재 두산중공업은 수력, 풍력, 가스터빈, 수소 등 전방위적으로 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추진 중이다. 두산그룹의 첫 4세 오너로서, 신사업 추진이 안착할 경우 경영 측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이번 구조조정 과정에서 ‘차, 포’를 떼어낸 만큼 박 회장의 새 도전이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두산인프라코어, 두산솔루스 등 매각된 계열사들은 그동안 그룹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다. 신사업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당장 손실을 메워 줄 대안이 없다. 친환경 에너지 사업은 경쟁이 치열해 두산중공업이 빠르게 성과를 내긴 어려운 구조라는 점이 이 지적에 힘을 싣는다.
#‘항공업 회생, 아시아나 통합 작업 숙제’ 조원태 회장
2019년 선대 회장의 별세로 총수에 올라선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은 지난 2년 사이 예기치 못한 고초를 겪었다. ‘남매의 난’으로 불리는 경영권 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코로나19 여파로 핵심 계열사 대한항공이 직격탄을 맞았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으로부터 1조 2000억 원을 수혈 받으면서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나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자산을 매각하고 자본을 확충해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사진=박정훈 기자
그러나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2020년 대한항공은 3분기 76억 원 흑자를 냈다. 직전분기 영업이익 1485억 원과 비교하면 이익폭이 대폭 줄어들었지만 전세계 항공사가 코로나19로 적자를 내는 가운데 드물게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이 같은 성과는 조 회장의 결단이 작지 않은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된다. 기단을 재편해 화물수송 등에 집중했고 이것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조 회장이 “여객기를 화물기로 활용해보자”고 제안한 점이 알려지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최근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대한항공 기내식, 기내판매사업부 매각 과정에서도 조원태 회장이 직접 인수 후보자들과 미팅을 가지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거래가 빠르게 마무리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2020년 말 아시아나항공 ‘깜짝’ 인수 결정은 초대형 국적 항공사 출범에 따른 조 회장 체제에 더욱 힘을 실어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다만 2021년 풀어야 할 숙제가 만만치 않다. 이제 막 통합 작업이 시작된 아시아나항공 인수부터 해결해야 한다. 시장 독과점이라는 비판이 크고, 대규모 구조조정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는 만큼 대내외 설득 작업이 중요하다. 여기에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살리기에 국책은행이 직접 나서 무리한 ‘지원’을 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특히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조원태 회장의 그룹 내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국책은행이 우군으로 나선 모양새다. 사실상 조 회장이 경영 성과를 통해 입지를 강화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숙제라는 것이 재계 분석이다.
#4대 그룹도 숙제 산적
재계를 대표하는 4대그룹 총수들도 각자의 숙제를 안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별세로 본격적인 경영 능력 평가 시험대에 오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코로나19와 미-중 무역갈등, 반도체 산업 지형 변화 등 불확실성에 대응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도 현장경영을 이어가며 2020년 1~3분기 높은 실적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지만 상황을 낙관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경쟁사 SK하이닉스가 최근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을 인수했고, 해외 경쟁사들도 대규모 M&A를 통해 기술개발 및 사세 확장을 하고 있어 2021년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격변이 일어날 것이란 관측이 나오고 있다.
‘사법리스크’는 위험 요인이다. 국정농단 뇌물사건 파기환송심, 불법 경영 승계 재판 2건이 2021년에도 이어진다. 이건희 회장 재산 상속 과정도 변수다. 워낙 규모가 큰 데다 주식 상속이 대부분이라 지분 변동이 불가피하다. 어떤 방법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배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지난 12월 22일 이 회장의 주식분 상속세가 11조 400억 원으로 확정됐다. 주식 외에 용인 에버랜드 땅과 한남동 주택 등 부동산에 대한 상속세까지 내야 한다.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해 나눠 낼 것으로 관측되지만, 매년 2조 원이 넘는 규모라 이건희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또는 이 부회장이 가진 삼성SDS 지분을 매각하는 방안 등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오른쪽부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사진=연합뉴스
20년 만에 현대차그룹의 새 총수가 된 정의선 회장도 2021년 본격적인 경영 능력 평가를 받게 된다. 미래 모빌리티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며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정 회장은 최근 미국 로봇전문업체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1조 원 규모에 인수하기로 하면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정 회장은 현대차의 미래를 자동차 50%, 개인항공기 30%, 로보틱스 20%로 그리고 있다. 전기, 수소차로 자동차 산업 경쟁력을 확보하고 미래 모빌리티 사업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잡음 없이 이뤄진 경영권 승계와 달리 아직도 제자리걸음인 순환출자 고리 해소 등 지배구조 개편 손질 작업은 숙제다.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현대모비스와 현대차, 기아차에 대한 정 회장의 지분이 미미해 그를 정점으로 두려면 막대한 자금이 동원돼야 한다는 점이 최대 걸림돌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에 승부수를 던진다. 최 회장은 최근 전 산업계 ‘트렌드’로 자리 잡은 ESG 중심 경영을 수년 전 일찌감치 도입해 밑그림을 그려왔다. 2021년 본격적으로 구체화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최근 정기인사를 통해 이 경영 방침을 이끌 임원들에게 힘을 싣고 조직을 정비했다. 재계는 ESG 경영이 세계적으로 주류로 자리잡고 있는 만큼 국내에서 가장 발빠르게 움직이면서 이목과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최 회장의 어깨가 무거울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취임 4년 차에 접어든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본격적으로 홀로서기에 나선다. 그동안 구 회장 체제 안착 과정에서 든든한 뒷받침을 해왔던 삼촌 구본준 LG그룹 고문이 ‘장자 승계’ 전통에 따라 계열분리해 독립한다. 구본준 고문이 계열분리하는 LG신설지주(가칭)는 2021년 5월 1일 출범한다. 이 작업을 통해 LG그룹 3세대 계열분리가 마무리되면서 4세대인 본격적인 구 회장의 ‘뉴LG’가 시작된다.
구광모 회장이 낙점한 LG그룹의 새 성장동력은 인공지능과 로봇 사업이다. 두 사업은 구 회장이 취임 초기부터 강조해온 디지털 전환에서도 핵심 역할을 한다. 최근 관련 사업에서 인재들을 대거 발탁하고 조직을 개편했다. 기업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최고전략책임자(CSO)에 힘을 싣는 점도 관심을 받고 있다. 향후 AI(인공지능)와 로봇 관련 대형 M&A 가능성이 점쳐진다. 재계에선 2021년이 구 회장의 색깔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해가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