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이 12월 1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사진=임준선 기자
“예상하지 못했다. (법원에) 배신감까지 느낀다. 충격적이다.”
법원의 윤 총장 징계 집행정지 인용 결정 다음날인 12월 25일 연락이 닿은 청와대 관계자 말이다. 사실 윤 총장 직무배제 집행정지 신청은 인용(12월 1일)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추 장관이 서두르다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식 절차를 거친 징계 처분을, 대통령이 최종 재가한 일련의 과정이 제동 걸리진 않을 것으로 점쳤다.
법조인 출신 문재인 대통령은 여러 차례 절차적 정당성과 공정성을 강조하며 신중을 기했다. 정치적 리스크를 줄이려는 동시에 윤 총장이 제기할 법적 소송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법원은 윤 총장 손을 들어줬다. 앞서의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민주적인 인사권 통제를 법원이 인정하지 않았다. 결정이 난 이상, 우리 쪽에서 마땅히 대응할 방법은 없다”고 했다.
그동안 문재인 대통령은 1년 가까이 계속된 ‘추-윤 전쟁’과는 거리를 둬왔지만 침묵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자 이번 징계에선 목소리를 냈다. 절차 정당성을 확보하라고 가이드라인을 줬고, 추 장관 징계 청구를 재가했다. 청와대는 윤 총장의 소송 직후 ‘피고는 법무부 장관’이라는 입장을 내놨지만 윤 총장 측은 상대가 문 대통령임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번 법원 결정에 따른 정치적 책임은 문 대통령이 지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충격에 빠진 여권이 강한 성토를 쏟아내는 것도 윤 총장 복귀가 문 대통령 레임덕 신호탄이 될 것이란 우려에서 비롯된다. 최인호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행정부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징계 결정한 엄중한 비위행위에 대해 이번에 내린 사법부의 판단은 그 심각성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으로 깊은 유감”이라면서 “행정부의 안정성을 훼손하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져 국론 분열을 심화시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했다.
윤 총장 건 전날인 12월 23일 조국 전 장관 부인 정경심 씨가 징역 4년 선고를 받았다는 것과 맞물리며 여권에선 향후 검찰개혁 동력이 상실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조국 전 장관 일가 수사로 시작된 윤 총장과의 갈등, 그리고 이어진 ‘추-윤 전쟁’에 대해 여권에선 검찰개혁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틀 사이 나온 법원의 결정으로 ‘살아 있는 권력을 겨누자 윤 총장을 찍어내는 것’이라는 프레임에 무게가 실리게 됐다.
앞서 문 대통령은 윤 총장 징계 재가 후 “검찰총장 징계를 둘러싼 혼란을 일단락 짓고, 법무부와 검찰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한다”고 말했었다. 윤 총장 징계를 마무리 짓고 새 출발을 하겠다는 의미였지만 이는 무산됐다. 다시 윤 총장과의 싸움이 불가피해졌다. 오히려 기사회생한 윤 총장이 주도권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당장, 월성원전 1호기 등 정권 실세들 연루 의혹 수사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재판부 결정을 하루 앞두고 있던 12월 23일 한 친문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부동산 문제에 코로나 백신까지, 악재가 넘쳐난다. 문 대통령 지지율 하락 추세도 심상치 않다. 이런 상황에서 윤 총장이 직무로 복귀해 정권을 겨누면 공룡 여당이 맞서 싸운다 해도 이기기 어렵다. 당장, 윤 총장 찍어내기에 대한 문 대통령 책임론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다시 윤 총장과 전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윤 총장 칼춤을 지켜봐야만 하는 처지다. 법원의 인용은 여권과 문 대통령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다.”
문재인 대통령. 사진=청와대 제공
여권 일각에선 ‘추미애 책임론’이 나오기도 한다. 거칠고 부실한 조치로 대통령에게로까지 불똥이 튀게 했다는 이유다. 한 친문 핵심 관계자는 12월 초 사석에서 “추 장관이 청와대와 충분한 논의 없이 무리수를 둬 일을 그르쳤다. 국민들에겐 윤 총장과의 감정싸움으로 비쳤다. 문 대통령이 여기에 휘말린 셈”이라고 안타까워한 바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든 징계 처분 과정에서 윤 총장 상대는 문 대통령으로 격상했고, 문 대통령 역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문 대통령은 사의를 표명한 추 장관 후임 발탁을 놓고 고민에 빠질 듯하다. 추 장관 ‘바통’을 이어받을 강경파 장관을 임명하기엔 부담이 따른다. 그렇다고 윤 총장을 내버려둘 수도 없는 상황이다. 문 대통령으로선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앞서의 친문 의원은 “조국, 추미애를 봤는데 누가 오려고 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검경 수사권 조정, 1월 출범하는 공수처 등으로 또 따른 (윤 총장) 견제 수단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이 위기감에 휩싸인 것과는 달리, 윤 총장은 숨통이 트이게 됐다. 우선, 일련의 징계 과정에서 검찰 내 우호 세력이 형성됐다는 게 천군만마다. ‘특수통’ 위주의 인사로 내부 불만을 샀던 윤 총장이었지만 이젠 그를 지지하는 검사들 수가 크게 늘었다. ‘윤석열 한동훈만 검사가 아니다. 검찰엔 검사가 많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돈다. 이른바 ‘윤석열 사단’만 잘라내면 될 것이라던 여권의 전략에도 차질이 생겼다. 이는 윤 총장이 이끄는 검찰의 수사가 지금까지완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음을 추론케 하는 대목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윤 총장 정치적 위상이 한 단계 상승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대선 출마 가능성도 높아졌다는 반응이 뒤를 이었다.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여권에서 전투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추미애와 싸우며 맷집을 키웠다. 그리고 이번 징계 땐 문재인 대통령과 맞붙으며 체급을 올렸다”면서 “보수 야권 후보 중 윤 총장만한 사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신기루가 아니다. 무조건 윤 총장을 끌어들여야 한다”고 설명했다.
관건은 윤 총장 의지다. 통상 대권 도전 전제 조건으로 본인의 권력 의지가 꼽히는데, 과연 윤 총장이 출마할 생각이 있느냐를 두고는 추측만 무성하다. 윤 총장이 아직 명확한 뜻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직 검찰총장으로서 정치권 입문 여부를 밝히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기도 하다. 2020년 10월 22일 대검찰청 국정감사 때 “(퇴임 후) 국민에게 봉사할 방법을 찾겠다”라고 말한 것을 두고 출마에 뜻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있지만 윤 총장 주변에선 불출마에 방점을 찍는다.
윤 총장과 가까운 한 변호사는 “정확한 속내야 알 수 없지만, 일단 본인은 안 한다고 여러 번 강조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치 전문가들은 윤 총장이 결국 대선 판에 나올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본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의원들은 “윤석열이 국민이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고 말한다. 2011년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높은 지지율로 서울시장과 대선 후보로까지 거론됐던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사례와도 자주 비교된다.
앞서의 국민의힘 중진 의원은 “갑자기 나타난 대선 후보들이 중도에 그만둔 것은 정치판의 냉혹한 현실과 검증 때문이었다. 윤 총장이 임기를 다한다면, 7월 이후에나 대선판에 뛰어들 것이다. 2022년 3월 대선까진 불과 6개월만 버티면 된다는 얘기”라면서 “더군다나 윤 총장은 지난 1년간 여권으로부터 엄청난 공세와 검증을 당한 경험이 있다. 정치 경력이 부족한 윤 총장을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이제 엄연한 대선판 상수가 됐다”고 했다.
특히 2021년 4월 재보선은 윤 총장을 둘러싼 야권 셈법에 큰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1야당 국민의힘이 패할 경우 보수 진영은 ‘헤쳐모여’ 식의 정계개편이 유력하다. 대선을 앞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유력 차기 주자가 그 중심에 설 것으로 보인다. 마땅한 후보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서 여러 정파들 간 ‘윤석열 모셔가기’ 경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전제는 윤 총장 지지율이 현 수준 또는 그 이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정가에선 윤 총장이 대선 출마를 결심하더라도 국민의힘엔 입당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문재인 정부와 싸우며 내세웠던 명분이 훼손돼 대선 기간 내내 공격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신당 입당이 유력하다. ‘윤석열 신당’이 2021년 대선 레이스의 핵이 될 것이란 말도 이런 배경에서다. 실제 일부 국민의힘 중진, 유력 보수 인사들 간엔 윤 총장 영입 논의가 이뤄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