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미남 스타로 시작해 이제 ‘배우’란 타이틀이 어색하지 않게 된 원빈. 연합뉴스 |
기무라 다쿠야를 벤치마킹한 꽃미남 원조 스타로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오른 원빈은 거듭되는 노력을 통해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자동차정비사를 꿈꾸던 강원도 산골 소년이 한국은 물론 일본 등 해외에서도 각광받는 월드스타로 성장한 것이다.
만약 자동차 정비사가 됐다면
강원도 정선 출신으로 춘천기계공고에 입학한 고교 1년생 김도진(원빈의 본명)의 꿈은 자동차 정비사였다. 카센터를 운영하면 수입이 좋고 시간도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다고. 그렇지만 막상 공고에 입학해 배우기 시작한 자동차 정비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김도진은 고교 2학년 때부터 방황기를 거치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담배를 배우고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다며 가족 전부가 체질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해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폐인 일보 직전까지 가게 됐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고백하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키가 작고 다소 통통했던 김도진은 키가 크면서 얼굴 살이 빠져 오늘날 원빈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연예인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지만 너무나 머나먼 꿈일 뿐이었다.
그에게 새로운 계기는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때 찾아온다. 친척 소개로 경기도 시흥에 위치한 자동차 정비 공장에 취직하게 된 것. 광명시의 누나 집에서 지내며 공장에 다니기 시작한 김도진은 케이블 방송인 제일방송 연기자 공채 시험에 응시해 합격하며 어렵게 연예인의 꿈을 이루게 된다. 이것이 원빈이 되기 전 김도진의 연예계 데뷔였다. 케이블 드라마에 잠깐잠깐 얼굴을 내비치며 연기자 활동을 시작한 것. 물론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 TV 공채 연기자였던 터라 연예인은 됐지만 스타의 자리는 너무 멀었다.
만약 당시 그가 무모해 보였지만 연예인이라는 꿈을 가슴에 품지 않았다면 지금쯤 그는 평범한 자동차 정비사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연예계와는 너무 먼 자동차 정비 공장을 다니면서도 그 꿈을 잃지 않고 지원서를 냈던 청년 김도진의 꿈을 향한 열정이 그가 연예계로 갈 수 있었던 티켓이 돼 준 셈이다.
▲ 관객 300만 명을 돌파한 영화 <아저씨>. |
더욱 눈길을 끄는 대목은 김도진이 연예계 입문을 위해 그보다 먼저 문을 두드린 곳이 있었다는 점이다. 연기자가 아닌 가수 지망생으로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본 것. 당시 SM엔터테인먼트는 한국 최초의 아이돌 그룹인 H.O.T 결성을 위해 오디션을 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연예계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데다 준비도 안 된 강원도 산골 청년에게 오디션 통과는 너무나 힘겨운 일이었다. 이 사실이 뒤늦게 기사화돼 눈길을 끌었는데 당시 SM엔터테인먼트 심사위원들은 당시의 김도진을 ‘뭔가 해내려는 의지가 남달랐다’고 평가했다. 끼와 재능이 엿보였지만 H.O.T의 콘셉트와 잘 맞지 않았다고.
만약 당시 김도진이 오디션을 통과했다면 H.O.T 내지는 신화의 멤버가 됐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기자 원빈이 아닌 가수 김도진을 알게 됐을 것이다. 가수가 됐을 경우 새로운 가명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높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김도진은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절망하지 않고 제일방송 연기자 공채에 도전해 비로소 합격 통보를 받은 것. 그렇지만 공중파도 아닌 케이블 방송 공채 연기자의 길은 너무나 힘겨웠다.
만약 앙드레김을 못 만났다면…
진흙 속에 있을수록 진주는 더욱 밝게 빛이 난다. 비록 케이블 TV 드라마에 단역으로 짧게 출연하고 있었지만 그가 눈부신 진주임을 알아본 이가 있었던 것. 그는 바로 얼마 전에 타계한 디자이너 고 앙드레 김이다. 케이블 방송에서 그를 본 고인이 PD에게 연락해 만남을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앙드레 김이라는 디자이너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인 연예인이 앙드레 김 쇼에 선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조차 알지 못한 채 무대에 올랐다.
얼마 전 고인의 빈소를 찾은 원빈은 “신인일 때 선생님 무대에 선 인연이 있다”며 “내 꿈을 이뤄가고 내 배우로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신 은인이셨다”고 고인을 회상했다. 톱스타만 무대에 세우기로 유명한 고 앙드레 김의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새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고 보면 원빈에겐 유독 좋은 사람들과의 인연이 많다. 또 거장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배우이기도 하다. 고 앙드레 김에게 발탁된 뒤 그를 공중파 드라마에 데뷔시킨 이는 윤석호 PD다. 드라마 <프러포즈>에서 주인공 김희선의 옆집에 사는 개를 키우는 남성으로 출연해 ‘원빈’이라는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 이 드라마에선 대사도 거의 없는 조단역이었지만 윤 PD는 3년 뒤 그를 계절 시리즈 첫 편인 <가을동화>에 주연급으로 캐스팅해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았다.
<프러포즈>를 통해 꽃미남 비주얼을 인정받았다면 연기력을 인정받게 된 작품은 <가을동화> 직전에 출연한 드라마 <꼭지>다. 이 드라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맙습니다> 등의 드라마로 유명한 이경희 작가가 대본을 썼다. 윤석호 PD의 드라마로 데뷔해 이경희 작가의 드라마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다시 윤석호 PD의 드라마로 스타덤에 오른 원빈의 데뷔 초기는 신인 배우라면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최고의 필모그래피다. 이후 영화계로 진출해선 <킬러들의 수다>(장진 감독)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 감독) <마더>(봉준호 감독) 등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 연이어 출연했다.
만약 원빈이 되지 못했다면…
김도진에게 원빈이란 예명을 지어준 이는 스타제이엔터테인먼트의 정영범 대표다. 앙드레 김 패션쇼에서 김도진을 발견한 정 대표는 주저 없이 같이 일할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김도진과 전속계약을 체결한 정 대표는 원빈이라는 예명을 지어준 것.
정 대표는 연예계에서 최고의 기획력에 최적화한 마케팅을 겸비한 최고의 스타 조련사로 유명하다. 원빈과 전속계약을 체결한 정 대표는 일본 최고의 스타 기무라 다쿠야를 벤치마킹해 원빈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지난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스타 시스템 대해부, 스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가졌을 당시 정 대표는 원빈의 사례를 그 예로 들었다. 기무라 다쿠야처럼 검은 피부를 갖고 있는 원빈에게 긴 머리를 더해 비록 닮진 않았지만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 외모뿐만 아니라 기무라 다쿠야의 작품을 보며 그의 연기 패턴도 일부 차용해왔다. 이런 까닭에 원빈은 데뷔 초기 늘 긴 머리를 고수했다. 드라마 <프러포즈> 방영 당시 일부 팬들이 그를 ‘한국의 기무라 다쿠야’라며 열광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빈이 연예계에서 꽃미남 스타의 원조로 손꼽히는 까닭 역시 정 대표의 기획력 때문이다. 미국 유학파인 정 대표가 당시 미국에서 남미 미소년이 백인 주부층에게 인기가 높다는 사실에 착안해 원빈을 원조 꽃미남 스타로 마케팅한 것. 이후 원빈은 기무라 다쿠야가 활동하는 일본에서도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한류스타로 거듭났다.
결국 정 대표와의 만남, 그리고 원빈이라는 예명과의 만남으로 인해 고 앙드레 김이 발굴한 원석 상태이던 김도진이 가장 눈부신 보석으로 변신하게 된 셈이다.
만약 ‘아저씨’가 안됐다면…
요즘 극장가에 영화 <아저씨> 열풍이 거세다. 3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여름 극장가 한국 영화의 뒷심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꽃미남 스타 출신인 데다 아직 미혼인 그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호칭인 ‘아저씨’를 타이틀로 달고 나온 영화로 흥행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이미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1000만 관객 신화를 기록한 그이지만 홀로 원톱으로 나선 영화를 통해 30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은 그가 확실한 흥행메이커라는 사실을 재입증해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원빈은 정영범 대표라고 하는 연예계 최고의 스타 조련사를 통해 ‘만들어진 스타’다. 그렇지만 만약 여기에 안주했다면 오늘날의 원빈이 있을 수 없다.
기무라 다쿠야를 벤치마킹한 원조 꽃미남 스타 원빈은 이런 인위적인 장점을 모두 버림으로써 연기파 배우로 성장할 수 있게 됐다. 드라마 <꼭지> <가을동화> 등에서부터 엿보이기 시작한 그의 반항기 어린 이미지는 여성스러운 꽃미남 이미지와 겉도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서서히 그에게 녹아들었다. 장동건과 함께 한 <태극기 휘날리며>에선 ‘나약한 동생’부터 강렬한 남성상까지를 동시에 보여주며 각광받았고 <마더>에선 모자란 농촌 총각 역할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정영범 대표와 전속계약이 끝난 뒤 1인 기획사를 설립해 독립한 원빈은 보다 ‘탈 꽃미남화’를 가속한다. 이런 그의 노력이 이번 영화 <아저씨>를 통해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냈다. 스스로 꽃미남이기를 거부하고 아저씨가 된 원빈, 그러기에 그가 지금 정상의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부모님께 집 지어드린 죄?
원빈은 지난 2008년 고향인 강원도 정선에 부모님을 위해 3층짜리 루트하우스(사진)를 지었다. 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싶은 마음에 좋은 집을 지어 선물한 것. 이 집은 한국건축문화대상 일반거주부문 본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화려한 외관이 돋보인다. 다만 원빈의 집으로 알려져 관광객이 몰리자 원빈은 조용히 살기 원하는 부모님이 관광객들로 불편해 하셔 오히려 불효가 된 것 같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한편 원빈의 매형이 시의원에 당선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빈이 의병 전역한 직후인 2006년 5·31 지방선거에서 매형 손인암 씨가 경기도 광명시 시의원에 당선된 것. 광명시 철산동에서 오랫동안 ‘손찬 미용실’을 운영해 온 손 씨는 당시 원빈이 설립한 소속사 드림이스트온 대표이사이기도 했지만 당선 직후 사임했다. 손 씨는 지난 4월 광명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 선정한 의정 활동 우수의원에 뽑히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6·2 지방선거에선 낙선하고 말았다.
손 씨는 원빈의 셋째 누나 김남경 씨의 남편이다. 원빈이 고교 3학년 때 공장에 취업이 돼 광명시에서 지낼 당시에도 누나 김 씨가 큰 힘이 돼줬다. 원빈이 제일방송 연기자 공채 시험을 볼 당시 제출한 사진도 김 씨가 촬영한 것이었다. 다른 지원자들과 달리 원빈은 동네 빨간 벽돌 담장을 배경으로 한 사진을 제출해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의병 전역’ 특혜 의혹
군 복무보다 긴 재활 ‘이래도?’
원빈의 연예계 활동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기는 단연 현역 입대 이후 의병으로 전역한 것이었다. 지난 2005년 현역 입대한 원빈은 군 입대 7개월 만인 2006년 4월 무릎십자인대 파열로 의병 전역했다. 국군 춘천병원 의무심사위원회에서 의병 전역이 가능한 5급부상 진단을 받은 것.
네티즌들은 강하게 의혹을 제기했다. 꾀병을 부려 의병 전역한 것이라는 얘기부터 특혜라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이로 인해 국국 춘천병원 의무사령부가 직접 “의병 전역 판정에 의혹은 없으며 특혜도 없었다”고 해명했을 정도다.
그렇지만 원빈은 이런 의혹이나 비난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재활에 힘썼다. 1년 반가량 재활 치료에 전념해 겨우 무릎십자인대 파열을 극복한 원빈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차기작을 골라 영화 <마더>로 컴백했다. 빠른 연예계 복귀를 위해 의병 전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있었지만 군 복무 기간보다 더 긴 재활 치료 기간을 보내면서 이런 의혹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최근 영화 <아저씨> 개봉에 맞춰 <일간스포츠>와 가진 인터뷰에서 원빈은 “의병 전역 조치를 받고 가장 괴로웠던 것은 나였다”며 “군 생활에 욕심이 있었고 팬들과 약속도 한 마당에 의병전역 조치를 받고 허탈한 상태였는데 의혹과 억측을 견뎌내는 것이 많이 힘들었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