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KBS 다큐 3일
유진맨숀은 1970년에 지어진 최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로 오래도록 서대문의 랜드마크였다. 올해로 만 50살이 된 ‘유진맨숀’의 곳곳엔 도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유진맨숀’이 지어지던 1970년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로 건물 자체가 방어기지 역할을 하도록 설계되었다. 1층 가로변에 세워진 기둥들은 간격이 넓어 전차가 몸을 숨길 수도 있고 유사시 기둥을 부수면 아파트가 넘어지면서 일종의 바리케이트가 되는 것이다.
1992년에는 도시의 속도를 높이기 위한 내부순환도로의 건설로 B동의 4층, 5층이 잘려나갔다. “마치 시루떡 자르듯 건물이 잘려나갔다”라는 이곳 주민의 말은 쉼 없이 빠르게 달려온 대한민국의 어제를 대변하는 듯하다.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유진상가는 50년 동안 수많은 철거 위기에 놓이기도 했지만, 1층 상가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랜 시간 한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 2020년 ‘다큐멘터리 3일’은 50년의 세월을 견뎌낸 유진상가 사람들의 72시간을 기록했다.
이불 가게 사장님 장정웅 씨는 1970년 8월 15일의 상가 입주부터 50년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 유진상가의 산증인이다. 대한민국의 경제 황금기를 거치며 화려했던 시절을 기억하며 50년을 보내온 사람들.
25년 전만 해도 상가에 입주하기 위해선 권리금만 1억을 내야 했지만 지금은 월세만 내고 장사할 사람 구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도매시장들이 생겨나기 이전 유진상가의 새벽은 아주 바빴다. 과일 트럭들이 200여 미터의 중앙통로를 빠져나가는 데만 1시간이 걸렸을 정도라고 한다. 전성기 42개에 달했던 과일 가게들은 하나둘 문을 닫고 지금은 26개만 남았다.
2020년은 유난히도 잔인한 해였다. 코로나 19로 유진상가의 매출액이 전년 대비 50% 정도 감소했다. 내부 상가도 올해 초부터 빈자리가 늘었다. 지금도 올해를 기점으로 폐업을 앞둔 가게들이 3개나 있다.
40년 넘게 이곳에서 남성복을 판매했던 점포도 그중 하나이다. 동고동락하며 몇십 년을 함께 장사해 온 가게들이 폐업하는 모습을 보는 이곳 상인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유진상가, 이곳에서 50년을 보낸 상인들에게 건물의 의미는 남다르다. 마치 건물도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는 유진상가 상인 남상화 씨. 함께 나이를 먹으며 불안의 세월을 보내온 상인들에게 유진상가는 가족과 다름없다.
다큐멘터리 3일 제작진은 50년 동안 켜켜이 쌓여온 유진상가 상인들의 이야기 기록했다.
이민재 기자 ily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