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름을 너무 세게 짓지 않았나 싶어요. 아들이 저랑 생일이 같아요. 제 생일에 태어났거든요. 너무 좋아서 집안 어른한테 묻지도 않고 이름을 제가 지었어요. 어디든지 정상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지은 이름인데, 오히려 얘한테 크면서 너무 부담이 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처럼 되고자 했던 최고봉 소위는 항상 열정이 넘쳤다. 어디서든 높이 올라가고 싶어 했다. 그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보면 그는 “교내외 활동에 솔선수범하고 통솔력과 포용력으로 친구들의 신망이 두터운 것은 물론 예체능에도 두각을 나타내는” 학생이었다. 사람을 잘 이끌었던 최 소위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 군 장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대학에 진학해 ROTC(육군학생군사학교)에 지원했다.
고 최고봉 소위와 그의 가족. 사진=아버지 최창희 씨 제공
“면에서 흔치 않게 ROTC 장교가 나왔으니 제 친구들도 좋아하고, 아들 잘 키웠다고 다들 말하고 참 자랑스러운 아들이었어요. 공부도 잘했어요. 서울에 좋은 대학 붙었는데, 집안 형편이 그러니까 자기가 국립대로 가더라고요. 속 한번 안 썩이는 그런 애였는데 군에 가서 이렇게 될 줄은 누가 알았어요. 참 잘난 놈이었는데.”
대학 졸업과 동시에 ROTC 47기로 소위 임관한 뒤 전라남도 장성 보병학교 초등군사반(OBC·초군반)을 수료한 최 소위는 2009년 6월 25일 한 동원사단에 전입한다. 그리곤 곧바로 중대장 보직을 맡았다. 이제 막 전입한 소위가 중대장 직책을 맡은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 최 소위는 OAC(Officer Advanced Course, 중위로 진급한 뒤 입소해 주로 중대장 임무에 필요한 교육을 받는 과정·고군반) 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최 소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중위였던 전임 중대장이 전방으로 전출 가면서 생긴 빈자리를 메워야 했다. 연대장의 명령이 내려왔으니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최 소위는 부대 최초의 ‘소위 중대장’이 됐다. 최 소위는 선배 장교들에게 대대 ‘에이스’로 불릴 만큼 열정이 넘쳤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마치 신생아가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것과 같았다. 중대장이지만 중대 사정은커녕 군대 생활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었다. 주특기 교육을 할 때도 그 내용을 자신 중대 병장들에게 물어야 했다. 아예 병장에게 대신 교육을 부탁할 정도였다. 우습지만 당연한 상황이었다. 중대 간부들은 물론 병사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일은 예견된 일이었다. 최 소위는 중대장이자 장교였지만 고작 우리 나이로 24세에 이제 막 군 생활 시작한 햇병아리였다.
업무는 넘쳐났다. 일주일 단위 관심병사 문서 작성, 인성검사, 인터넷중독 방기 관리, 운영비 처리, 전술토의, 연대 전술훈련 평가, 중대 전술 훈련, 복무계획 보고, 당직사관, 사단 5분 대기조 등 중대장으로서 병력을 관리하면서 군인으로서 당직 근무나 주특기 공부를 해야 했다. 특히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동원 사단 특성상 행정 업무가 상당했다.
몸이 한 개인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최 소위는 간부들이 출근하는 아침 7시 30분보다 항상 일찍 숙소를 나섰다. 함께 방을 쓰던 최 아무개 중위는 “최 소위의 얼굴을 본 게 몇 번 되지 않았다. 숙소에 보이지 않으면 또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퇴근도 나보다 늦었다”고 설명했다. 최 소위는 밤낮 없이 일하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외출이나 외박은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최 소위는 부대 생활 2개월 동안 말 그대로 일만 하며 지냈다.
고 최고봉 소위 임관 당시 모습. 사진=아버지 최창희 씨 제공
“힘든 걸 절대 부모에게 내색하는 아들이 아니었는데, 엄마한텐 연락 와서 울기도 하고 그랬나 보더라고요. 이제 막 군에 들어간 소위는 소대장 업무를 맡아야 하는데 중대장 업무를 맡았으니 얼마나 과중한 업무예요? 두 달여 동안 얼마나 힘들었겠느냐는 거야. 불이 나면 불을 낸 사람이 잘못이지 뜨거운 데서 뛰어내리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
중대장 업무도 버거웠지만 최 소위를 불구덩이 속으로 깊숙이 처박은 건 대대장의 질책이었다. 대대장은 부대에서도 유명했다. 병사들 앞에서도 큰소리로 장교를 야단쳤다. 당시 부대 장교들의 말에 따르면 “했던 말을 반복하고 듣기에 짜증스러운 말투”를 가진 대대장이었다. 대대장은 최 소위를 ‘소위 중대장’이라고 부르며 유독 심하게 몰아세웠다.
대대장은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최 소위가 5분 대기조 근무를 설 때 모기향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질책을 하거나 군용이 아닌 시제품 모기향과 스프레이를 가지고 있었단 이유로 “초군반에서 그렇게 배웠냐?”고 면박을 줬다. 최 소위가 야간 투시경을 분실하자 “생각이 있는 거냐?”고 거들었다. 부대원들에 따르면 부대에 전입했을 때만 해도 잘 웃던 최 소위는 점점 근심 가득한 얼굴로 바뀌어갔다. 혼자서 담배를 태우는 시간도 늘어만 갔다.
사건 당일, 대대장은 최 소위의 마지막 남은 힘을 짓뭉갰다. 2009년 8월 25일 저녁, 최고봉 소위는 집에 가지 못하고 당직 근무를 서고 있었다. 그날 오전 제초 작업에 서툴다는 이유로 이미 대대장에게 면박을 받았던 그였다. 대대장은 저녁 10시쯤 지휘통제실(지통실)을 찾았다.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족구대회가 끝난 뒤 장교 전체 회식을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1차 회식은 저녁 8시쯤 끝났고, 2차 회식까지 마친 대대장이었다. 최 소위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통실에 온 대대장은 최 소위에게 중대장 브리핑을 지시했다. 최 소위는 상황판을 보며 현재 부대의 상황을 핵심만 요약해서 전달해야 했다. 숙달되지 않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긴장한 최 소위는 지휘봉을 제대로 잡지도 못했다. 더듬거리는 최 소위를 향해 욕설과 고함이 날아들었다. 함께 당직 근무를 서던 박 아무개 병장이 자리를 슬쩍 비켜줄 정도였다. 한바탕 소동이 지난 뒤 최 소위는 박 병장과 함께 담배를 피웠다. 중대장은 중대원에게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털어놨다. 이미 중대장의 권위는 벗겨져 있었다.
최 소위는 몇 시간 뒤인 새벽 2시 20분쯤 “순찰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지통실을 떠났다. 그는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자신의 선택이 실패했을 때 감당해야 할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 최 소위는 자신의 양손을 포승줄로 결박한 상태였다.
“장례식장에 대대장이 왔는데, 아무 소리도 안 했는데 알겠더라고요. ‘네가 우리 아들 죽였다’는 걸요. 그때 이후로 앉아 있질 못하고 무슨 일이든 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요. 다른 곳에 생각을 돌려서 되도록 꿈에라도 안 나타나도록 하려고요. 10년이 지났는데 잊히겠습니까. 20년, 30년 지나도 항상 그렇겠지요. 말썽이라도 좀 피웠던 아들이라면 뭐라고 하기라도 할 텐데 모든 게 모범적이었던 아들이라 더 그렇네요.”
2018년 2월 학군단(ROTC) 임관식 장면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없다. 사진=연합뉴스
OAC 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소대장 임무를 수행한 적도 없고, 부대에 막 전입한 소위에게 중대장 직책을 맡기는 건 명백한 위규 보직에 해당했다. 육군본부 110 장교인사 관리 규정 32조에 따르면 초임장교의 보직은 해당 병과 최하위급 보직을 원칙으로 한다. 같은 규정 33조에 따르면 중대장을 맡기 위해선 소대장을 역임하고 고군반(OAC)을 이수해야 한다.
당시 대대장은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에서 “최 소위가 책임감이 투철한 장교로 생각했다. 중대장이 과중한 업무이지만 최 소위라면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내 생각이 짧았고 내 불찰이고 거듭 죄송하다. 부모님께도 용서를 구한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하지만 심한 질책을 한 것을 두고선 대대장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큰소리로 질책했다. 병사들 앞에서 욕한 건 잘못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며 “병사들 앞에서 욕먹는 간부라면 당연히 자괴감을 가졌을 거로 생각하지만 친근감을 표현하려는 것뿐이었다. 잘못된 점을 바로 고쳐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서 지적한 거다. 악의는 없었다”고 변명했다.
아버지 최창희 씨는 “그래도 위원회가 우리 아들의 죽음이 그냥 ‘자살’이 아니란 걸 밝혀내 줘서 확실히 위로가 된다. 이런 계기로 군에 간 아들들이 생활을 잘할 수 있도록 국가가 잘 배려해주길 바란다. 다른 아들들이 이런 피해를 안 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끝내 훌쩍이는 목소리를 감추지 못했다.
최고봉 소위 사건을 담당한 신헌주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은 “최고봉 소위는 병사들 앞에서 대대장에게 심한 질책을 받아 왔고 그로 인해 자괴감과 불안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며 “주변 상황을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문제 해결이 어려운 ‘터널시야 현상’이 활성화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상급자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 것이 자해사망의 원인이 됐다. 순직으로 사망 구분하는 게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1950년 군 창설 이래 비순직 처리된 사망군인은 3만 9000여 명에 달한다. ‘개인적 사유’에 의한 자해 사망인 경우가 상당하다. 이들은 국립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대통령 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이인람)는 2018년부터 이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부대 내 구조적 원인을 찾아내 순직 처리로 이끄는 작업을 해오고 있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는 2019년 9월 13건의 의문사를 진상규명한 뒤 매월 성과를 내고 있다. 일요신문에서 진상규명된 사연을 연재한다. |
박현광 기자 mua123@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