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아메리칸 드림을 쫓아 미국 아칸소의 한 농장으로 건너간 한인 가족의 이야기 ‘미나리’는 2020년 미국 최고 화제작으로 인정받으며 ‘기생충’을 이어갈 영화로 주목받고 있다. 사진=영화 ‘미나리’ 홍보 스틸 컷
과장된 평가가 아니다. ‘미나리’는 2020년 2월 열린 제36회 선댄스영화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과 미국영화부문 관객상을 수상하면서 일찌감치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후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호평을 이어가고 있다. 가족이 겪은 자전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재미동포 정이삭 감독을 향한 관심도 뜨겁다. 2020년 12월 21일(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 비평가협회 시상식 각본상을 받았고, 주연 배우인 윤여정은 미국 선셋필름서클어워즈, 보스턴·로스앤젤레스비평가협회 선정 여우조연상까지 휩쓸었다. 또 미국 연예매체 인디와이어가 선정한 ‘2020년 최고 여배우 베스트13’에도 꼽혔다.
동시에 지금 할리우드에서는 ‘미나리’를 둘러싼 논쟁이 한창이다. 아카데미 시상식과 더불어 미국 양대 영화상으로 꼽히는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이 아닌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보도가 현지 주요 매체를 통해 공개되면서다. 이에 할리우드 아시아계 영화인들을 비롯해 평론가들도 일제히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엄연한 미국 영화인데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분류됐다’는 지적과 함께 앞서 제3의 언어를 사용한 미국 영화들 가운데 골든 글로브 작품상을 받은 사례를 들면서 ‘아시아계 이야기에 대한 차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미나리’보다 더 미국적인 영화를 보지 못했다”
‘미나리’는 정이삭 감독의 경험을 녹여낸 영화다. 농장에서 일하는 한인 가정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고단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삶을 담아냈다. 역시 한인 이민가정에서 태어난 한국계 배우 스티븐 연이 주연과 프로듀서를 맡았고, 윤여정과 한예리를 비롯해 한국 배우들도 여러 명 출연했다.
주인공이 한인 이민자들인 만큼 한국어 비중이 높고, 한국의 정서도 녹아있지만 ‘미나리’는 엄연히 미국 영화다. 제작은 배우 브래드 피트가 이끄는 영화사 플랜B가 맡았다. 앞서 ‘노예 12년’ ‘문라이트’ 등 영화로 아카데미 작품상 등 성과를 거둔 유력 영화사이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는 ‘미나리’에 총괄 프로듀서로도 이름을 올렸다.
호평 받는 영화를 향한 뜻밖의 논쟁은 골든 글로브 측에서 ‘미나리’를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출품 심사를 진행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한국어 대사가 주를 이룬다는 이유 때문이다. 미국 유력 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골든 글로브를 주관하는 할리우드외신기자협회는 ‘미나리’에 대해 외국어영화상 부분 출품 심사를 진행했다. 골든 글로브는 영화 한 편의 대화 가운데 50% 이상이 영어가 아니면 외국어영화로 분류한다는 규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어영화상 후보가 되면 작품상 등 주요 부문 후보에는 오르지 못한다.
골든 글로브의 이런 방침이 알려지자 ‘미나리’에 대한 ‘인종차별’이라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미국 영화사가 제작한 미국 영화이고,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이 주인공인 작품을 두고 한국어 대사가 많다는 이유로 외국어영화로 구분 짓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이다. 기존 영화들과의 형평성과도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바벨’,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등 영화 역시 극 중 비영어 대사 비중이 높은데도, 외국어영화상이 아닌 작품상 후보에 오른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비판의 목소리를 먼저 낸 이들은 할리우드에서 활약하는 아시아계 감독과 배우들이다. 지난해 뉴욕에 정착한 중국 이민자들의 이야기로 호평 받은 영화 ‘페어웰’의 룰루 왕 감독은 “2020년에 ‘미나리’보다 더 미국적인 영화는 보지 못했다”며 “영어 사용 여부로 미국적인 특징을 규정하는 관습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 시리즈로 친숙한 한국계 배우 대니얼 대 김 역시 “미국이 고국임에도 불구하고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은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
만약 윤여정과 한예리가 아카데미 배우 부문 후보에 오른다면 한국 배우 최초의 기록도 쓰게 된다. 사진=영화 ‘미나리’ 홍보 스틸 컷
#골든 글로브에서 아카데미까지 ‘수상 낭보’ 울릴까
논쟁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곧 그만큼 화제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논쟁의 한쪽에선 과연 ‘미나리’가 2021년 2월 28일 열리는 제78회 골든 글로브를 넘어 4월 25일 제93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어떤 결과를 얻을지 주목하고 있다. 선댄스영화제 최고상인 심사위원대상과 미국 영화 관객상 수상으로 2020년 화제작으로 등극한 이후 미들버그영화제 배우조합상, 하트랜드영화제 관객상, 덴버영화제 관객상과 최우수연기상까지 수상 릴레이를 벌였다. 윤여정의 수상 낭보도 이어진다.
이는 지난해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미국 주요 지역 영화상을 휩쓴 ‘오스카 레이스’와도 겹친다. 기대를 반영하듯 버라이어티는 3월 15일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발표에서 ‘미나리’가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등 주요 부문에 오를 것으로 예측했다. 만약 윤여정과 한예리가 배우 부문 후보에 오른다면 한국 배우 최초의 기록도 쓰게 된다.
‘기생충’으로 먼저 오스카 레이스를 경험한 봉준호 감독은 누구보다 정이삭 감독을 응원하고 있다. 봉 감독은 최근 ‘버라이어티’를 통해 진행한 정 감독과의 온라인 대담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러면서도 ‘미나리’가 향수에 갇히지 않은 것이 무엇보다 좋았다”고 평했다.
‘미나리’가 한국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대목은 또 있다. 미국 영화인데도 친숙한 식물 이름의 한국어를 제목으로 고집한 이유다. 이와 관련해 정이삭 감독은 “영화를 시작할 때부터 제목은 ‘미나리’로 지었다”며 “실제로 우리 할머니가 미국에 이민을 올 때 미나리 씨앗을 가져와 가족에게 먹이려고 심었고, 그때 심은 식물 가운데 가장 잘 자랐다”고 밝혔다. “할머니의 사랑이 잘 녹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도 덧붙였다.
이호연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