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금융지주가 새로운 회장으로 내부 인사인 손병환 NH농협은행장을 내정했다. 역대 두 번째 내부 출신 인사로, 관행에 따라 경제 관료 또는 정치인 출신이 회장에 오를 것이란 금융권 예상을 뒤집었다. 손 회장은 2022년 12월 31일까지 2년간 지주를 이끌게 됐다.
서울 서대문구 농협중앙회 건물 입구. 사진=박은숙 기자
이번 회장 인선을 두고 농협금융지주 안팎에선 ‘의미 있는 변화’가 일어났다고 평가한다. 농협금융은 2012년 농협중앙회의 신용부문에서 독립(신경 분리)해 출범한 이후 초대 회장을 제외하곤 경제 관료 출신을 수장으로 선임해 왔다. 농협법에 따라 설립돼 정책금융을 주로 취급하는 등 공공적 성격이 강한 ‘조직의 특수성’이 그 배경으로 꼽혔지만 이에 따른 ‘관피아(관료+모피아)’ 논란도 따라붙었다.
이 논란은 최근 회장 내정자가 확정됐다는 발표가 나오기 전날까지도 어김없이 이어졌다. 특히 2020년 말 은행연합회,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등 주요 금융협회들이 일제히 전직 관료, 정치인 출신 회장을 새롭게 선임하면서, 농협금융도 관행대로 관 출신 인사를 발탁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관피아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고 농협금융 노조가 “관료 출신 낙하산 회장 선임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는 등 농협금융지주 안팎에서는 과거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됐다.
지주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번 회장 인선은 후보군을 추리는 과정부터 기존 관행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농협금융은 외부 후보자를 중심으로 후보군을 꾸려왔지만, 이번 지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는 수십 명에 달하는 후보자군(롱리스트)를 추릴 때부터 내부와 외부 후보자 비율을 최대한 비슷하게 맞췄다. 2명만 남긴 압축 후보군(숏리스트)에선 내부 출신과 외부 출신이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것으로 전해진다.
임추위는 손병환 회장 내정자의 업무 성과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손 회장은 1990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해 30년간 금융 분야에서 일해 왔다. 농협 내 기획·전략통으로 꼽힌다. 특히 ‘디지털금융 1세대’로 금융권 전반에서도 인정받는 화려한 이력을 갖고 있다. 2015년 농협은행 스마트금융부장 재직 시절 은행권 최초로 오픈API(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도입했다. 오픈 API는 하나의 스마트폰 앱으로 모든 은행 계좌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뱅킹의 기반으로, 지금은 국내 모든 은행들이 도입했다.
농협금융 관계자는 “지주 출범 10년차에 접어들면서 인재풀이 넓어졌고, 매년 내부 임원 평가 등을 통해 경영 능력을 검증하면서 회장 후보군을 관리해왔다”며 “그동안 외부 출신이 회장을 맡으면서 커져가는 조직 규모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M&A(인수합병)이나 경영 전략 전환 속도가 다소 늦다는 지적을 꾸준히 받아 왔고, 내부 출신이 줄곧 배제되면서 임직원들의 사기 문제도 거론돼 왔다. 다른 금융지주사와의 경쟁은 물론 지주의 향후 10년을 새로 그리는 차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는 인사”라고 평가했다.
반대로 농협금융지주의 이번 변화는 ‘반쪽’에 그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주 회장부터 다른 계열사 대표이사 및 핵심 임원들의 인사 전반을 뜯어보면, 어김없이 농협중앙회와 중앙회장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농협중앙회는 농협금융지주의 지분 100%를 갖고 있고, 다시 농협금융지주는 농협은행을 지배하고 있다. 임추위와 이사회 보고, 주주총회 등을 통해 인사가 결정돼 절차상 중앙회가 인사에 개입할 수 없는 구조다.
그러나 중앙회장이 바뀌면 경영진들이 대거 물갈이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2012년 신경분리 이후에도 중앙회 입김이 금융지주와 은행의 인사에 닿는 등 독립 경영을 보장 받지 못한다는 비판이 꾸준히 나왔다. 의전상 연간 1조 원의 수익을 내는 금융사 임원들보다 투표를 통해 선출되는 중앙회장과 그를 보좌하는 중앙회 주요 인사들이 앞서기도 한다.
2020년 초 이성희 중앙회장 취임 직후에도 농협은행을 비롯한 농협금융지주 산하 주요 계열사 대표이사들이 대거 퇴진했다. 전임 중앙회장 측근으로 분류됐던 이들이 ‘새 중앙회장의 인사권을 존중하는 차원’이라며 사표를 냈고, 대부분 수리됐다. 당시 농협금융은 ‘임기 만료에 따른 교체’라고 밝혔으나 금융권에선 농협중앙회-농협금융에서 ‘구태가 반복 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성희 농협중앙회장. 사진=연합뉴스
이 과정에서 새로 교체된 농협은행장이 손병환 농협금융지주 회장 내정자다. 중앙회 진용이 새로 꾸려지면서 중용을 받아 은행장이 됐고, 이후 10개월 만에 다시 농협금융지주 차기 회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셈이다. 손 회장 내정자는 영남권 출신이다. 이성희 중앙회장은 선거 과정에서 대구·경북지역 대의원 등으로부터 지지를 받아 당선됐다. 이 때문에 농협금융 안팎에선 손 회장 내정자 선임 배경에는 업무 성과 등과 함께 ‘조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 역시 고려됐을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앙회장 또는 중앙회와 연관된 인사들이 핵심 요직에 발탁되는 모습은 농협금융 회장 선임 전 이사회와 지주 인사에서도 나타났다. 농협금융 이사회는 2020년 12월 11일 임원후보추천위원회를 거쳐 이종백 김앤장법률사무소 변호사를 새 사외이사로 선임했다. 이 이사는 이성희 중앙회장과 2010년부터 6년 동안 중앙회 감사위원을 맡았고, 연임도 함께하는 등 인연이 깊다. 새로 선임된 이종백 사외이사는 임기가 2021년부터 시작이라 이번 회장 선임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향후 지주를 감시, 견제하고 주요 의사결정을 하는 이사회에서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종백 이사를 추천한 인사는 현 중앙회 측근으로 통하는 정재영 비상임이사로 알려졌다. 농협금융 비상임이사는 대체로 중앙회와 이사회의 중간 가교 역할을 한다는 것이 회사 내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농협생명 대표로 이동한 김인태 농협금융지주 부사장의 후임으로는 배부열 농협은행 대구영업본부장이 선임됐다. 배 신임 부사장은 대구 출신으로 대표적인 영남권 인사로 분류된다. 1995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한 뒤 대구지역본부 상호금융보험팀장, 종합기획부 재무기획팀장, 성당지점장 등을 거쳐 2019년 NH농협은행 대구영업본부장에 올랐다.
주요 금융지주의 승진 코스는 지점장(팀·부장), 본부장(부행보), 은행 부행장, 지주 부사장 순이다. 배 본부장은 부행장을 거치지 않고 지주 부사장으로 직행했다. 농협 직급 체계상 본부장급은 임원 승진 대상이라 요건은 갖췄다. 그러나 금융권에선 이례적인 초고속 승진으로 통한다. 그는 특히 부사장 가운데 경영기획 부문(사내이사)을 맡았다. 농협금융에는 4명의 부사장이 있는데, 경영기획 파트 부사장은 지주의 컨트롤타워를 총괄하는 핵심 요직으로 꼽힌다.
농협은행장을 맡고 있던 손병환 농협금융지주 회장 내정자의 후임으로는 권준학 농협중앙회 기획조정본부 본부장(상무)가 낙점됐다. 권 신임 행장은 이성희 회장의 출신지역인 경기 출신이다. 이성희 회장의 최측근 인사로 꼽힌다. 1989년 농협에 입사한 이후 경기지역에서 영업본부 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중앙회 핵심 보직 중 하나인 기획조정본부장 역시 이 회장 취임 후 맡았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성희 중앙회 회장 취임 직후엔 선거 과정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호남 출신 인사는 물론 강원·충청 등 인사까지 대거 자회사 대표나 중앙회 임원으로 승진하면서 중앙회가 ‘탕평인사’를 한다는 해석이 나왔었다”며 “그러나 금융지주 이사회, 회장, 주요 임원, 농협은행장 등 핵심 보직에는 중앙회장과 가깝거나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발탁됐거나 될 가능성이 높아 구태는 여전하다는 지적이 다시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농협중앙회와 농협금융지주는 원칙에 맞게 인사를 진행했다는 입장이다. 농협중앙회 관계자는 “인사는 금융지주에서 엄격한 검증을 거쳐 절차대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농협금융 관계자 역시 “지금까지 농협금융이 뿌리를 내리는 시기였다면 앞으로는 본격적으로 지주의 내실 있는 성장과 신사업 확대 등이 이어지게 될 것”이라며 “임추위가 새 농협금융을 이끌어갈 적임자들을 추천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