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직격탄을 맞은 정유업계가 끝 모를 위기에 체질 바꾸기에 나서고 있다. 현대오일뱅크 충남 대산공장의 제2차 고도화 분해시설 전경. 사진=연합뉴스
#끝 모를 위기에 놓인 정유업계
2020년 코로나19 여파로 국제유가가 폭락하자 정유사들의 재고 평가손실로 이어졌다. 2020년 5월물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계약만기를 하루 앞둔 4월 20일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유가(배럴당 –37달러)를 기록하기도 했다. 웃돈을 얹어서 생산·판매해야 하는 이례적인 현상인 생긴 셈이다. 2020년 평균 정제마진은 배럴당 0.36달러 수준에 그쳤다. 정제마진은 석유 제품 가격에서 원가, 수송비 등을 뺀 가격으로 통상 배럴당 손익분기점을 4~5달러로 본다. 원유 수요도 언제 회복할 수 있을지는 현재까지도 미지수다.
정유업계는 비용 절감을 위해 공장 가동률을 낮추거나 멈추는 방법까지 택했다. 팔리지 않으니 저장할 공간까지 부족해져 원유를 덤핑해서 판매해야 되는 처지에 놓였다. 실제 국내 정유 4사의 공장 가동률은 2020년 1월 83.8%에서 10월 71.6%까지 떨어졌다. 한국석유공사에 따르면 2020년 9월 한 달간 국내에서 사용된 정제처리 원유는 7661만 6000배럴로 집계됐다. 산유국 간 ‘저유가 전쟁’으로 국제유가가 폭락한 2014년 9월의 7512만 5000배럴 이후 최저치다.
결국 정유업계의 2020년 누적 적자가 5조 원에 육박할 것으로 전망된다.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과 현대오일뱅크 등 국내 정유 4사의 올 3분기 누적 적자는 4조 8074억 원에 달한다. SK이노베이션이 2조 2439억 원으로 적자가 가장 컸고, 에쓰오일 1조 1808억 원, GS칼텍스 8680억 원, 현대오일뱅크 5147억 원 등이다.
2021년 새해 상황도 낙관하기 어렵다. 최근 국제유가가 상승세를 타고 있으나 정제마진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지난 12월 29일 기준 세계 3대 유종은 브렌트유 51.23달러, WTI 48달러, 두바이유 50.56달러를 기록했다. 두바이유는 한 달 만에 40% 상승했다. 지난 9월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약 7개월 만에 1달러 이상을 기록한 이후 1달러대에서 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에도 정제마진이 낮은 것은 이례적이다. 국제유가가 오른다는 것은 원유 수요 증가로 인해 석유제품 가격이 올라 정제마진도 개선된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백신 접종에 따른 기대감으로 국제유가가 선제적으로 상승한 것 같다”며 “수요가 증가한다고 하더라도 2020년 누적 재고가 많이 남은 상태라 정제마진 회복세가 더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유업계는 특히 세계 각국 정부가 친환경 정책을 펼치며 ‘탄소중립’을 외치고 있어 새로운 전략을 통해 탈출구를 모색해야 한다. 2019년 2월 미국에선 ‘재생에너지 100%’를 담은 그린뉴딜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했다. 지난 12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청사진 ‘그린 딜’을 발표했다.
지난 12월 27일 한국 정부도 2050 탄소중립을 이행하기 위한 녹색금융 및 배출권거래 활성화 등을 담은 ‘2021년 경제정책방향’을 확정해 발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2050 탄소중립을 선언한 이후 약 두 달 만이다. 국회에서는 2050 탄소중립을 법제화하기 위한 근거법이 발의됐다. 이달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유업계는 코로나19도 문제지만 전 세계 ‘탄소중립’ 움직임이 더 큰 위기”라며 “생존을 위한 근본적 변화의 시기가 코로나 사태로 앞당겨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월 28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그린뉴딜에 대한 계획을 밝혔다. 사진=청와대 제공
#정유사들마다 사뭇 다른 사업 다각화
정유업계는 각사마다 사업 포트폴리오 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현대오일뱅크는 본업인 정유업과 석유화학에 집중한다는 전략을 유지할 전망이다. 2020년 2·3분기 연속 흑자를 낸 배경으로 초중질원유 생산 확대가 꼽힌다. 중동산 원유 대비 가격이 저렴한 남미산 초중질원유의 투입 비중을 경쟁사 평균보다 5배가량 확대해 원가를 절감했다. 초중질원유는 저렴해도 황 같은 불순물이 많아 정제하기 까다롭다. 하지만 현대오일뱅크의 정제설비 고도화율은 41.1%로 업계 최고 수준이다. 오래전부터 설비에 투자한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석유화학 사업은 ‘HPC(중질유분해설비) 프로젝트’를 2021년 마무리한다. HPC는 정유 과정에서 나오는 정제부산물을 원료로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설비를 갖춘 공장이다. 이를 통해 연간 폴리에틸렌 75만 톤, 폴리프로필렌 40만 톤을 생산할 계획이다. HPC 완공으로 연간 3조 8000억 원대 매출과 6000억 원대 영업이익을 창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석유화학 사업 확대로 비정유부문 영업이익 비중도 30%대에서 45% 이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완성을 목표로 2021년 조직개편을 단행했다고 밝혔다. ‘그린밸런스2030’의 강한 실행을 통해 미래 핵심사업인 배터리사업과 소재사업 성장을 가속화하면서 ESG경영을 완성하겠다는 전략이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사업 자회사인 SK에너지는 에너지산업의 패러다임 전환에 따라 기존 산업의 지속적인 발전 및 친환경 방향의 신규사업 발굴을 위해 CIC(Company in Company) 체계를 도입했다.
이번 조직개편의 핵심은 미래사업인 배터리 및 소재 부문 성장을 가속하기 위한 행보다. 2017년 1.4GWh에 불과했던 배터리 생산 규모는 2020년 말 기준 약 28GWh까지 확대됐다. SK이노베이션은 2021년 상반기 미국 조지아주 1공장에서 전기차 배터리 공장 시험 생산에 나선다. 미국 시장에서 SK이노베이션은 연간 20만 대 규모 전기차에 탑재될 배터리 1·2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헝가리, 중국 등에 건설 중인 공장도 가동하게 된다면 2025년까지 배터리 생산 규모는 100GWh에 달할 전망이다.
김준 SK이노베이션 총괄사장은 “이번 조직개편은 SK이노베이션이 달성해야 하는 그린밸런스와 ESG경영을 중심으로 하는 파이낸셜 스토리에 기반하여 단행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2월 20일 에쓰오일은 에너지 전환과 탄소중립 등 급변하는 글로벌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한 장기 성장전략 체계인 ‘비전 2030’을 발표했다. 전략목표 중 하나로 정부의 탄소중립에 발맞춰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최소화하는 투자 로드맵을 수립했다. 석유화학 사업부는 현재보다 2배 이상 확대할 계획이다. 2018년 5조 원을 들여 완공한 정유 석유화학 복합시설에 이어 7조 원을 투자해 ‘샤힌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해 석유화학 비중을 현재 12%에서 25% 수준까지 확대할 방침이다. 동시 수소와 연료전지, 리사이클링 등 신사업 분야에도 진출하겠다는 성장 전략을 제시했다.
GS칼텍스는 2021년 상반기 완공 예정인 올레핀 생산시설(MFC)을 통해 석유화학 부문을 확대할 전망이다. 올레핀은 플라스틱·합성고무·합성섬유 등 석유화학 제품의 필수적인 기초 원료 물질이다. 연간 에틸렌 70만 톤, 폴리에틸렌 50만 톤을 생산하는 시설로 2021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내세웠다. MFC를 통해 연간 4000억 원 이상의 추가 영업이익을 기대하고 있다. 친환경 제품 판매로 ESG 경영을 강화하고도 있다. 토양이나 산림 등에 존재하는 미생물을 활용해 생산되는 ‘2,3-부탄다이올’ 등의 친환경 제품 판매에 나섰다. 이는 9년간의 연구를 통해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성과물이다.
모빌리티 사업도 강화하고 있다. 2020년 11월 GS칼텍스는 미래 환경변화에 걸맞은 주유소 브랜드 ‘에너지플러스’를 론칭했다. 기존의 주유와 세차뿐만 아니라 전기·수소차 충전, 카셰어링 등 모빌리티(운송수단) 인프라와 드론 배송, 편의점, 식품·음료 등 생활 편의 시설을 결합한 공간이다. 앞서 2018년 GS칼텍스는 350억 원을 투자해 롯데렌탈 지분 10%를 인수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허일권 기자 oneboo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