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극장가 성수기를 겨냥한 영화는 ‘원더우먼 1984’ 단 한 편이지만 독주체제조차 만들지 못했다. 흥행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 사진=영화 ‘원더우먼 1984’ 홍보 스틸 컷
#첫 단추 잘 끼웠나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포함된 12월은 극장가 성수기 중 하나로 분류된다. 하지만 2020년의 경우, 이 시기를 겨냥한 영화는 ‘원더우먼 1984’ 단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배우 공유, 박보검이 주연을 맡은 영화 ‘서복’이 개봉을 연기하면서 12월 23일 개봉된 ‘원더우먼 1984’가 외로이 극장가를 지켰다.
그런데 ‘원더우먼 1984’의 독주체제조차 없었다. 경쟁작이 만만치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흥행 규모가 크게 줄어들어 ‘독주’라는 수식어를 붙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원더우먼 1984’가 4일까지 동원한 관객은 46만 6919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기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각각 사흘 동안의 연휴였던 것을 고려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2017년 개봉됐던 ‘원더우먼’이 216만 관객을 모았었는데, 속편은 5분의 1 수준으로 흥행 규모가 줄었다.
‘원더우먼 1984’가 확보한 스크린 수는 1500개에 육박한다. 예년 같으면 ‘독과점 논란’을 꼬집을 만도 한데, 올해는 극장을 찾는 관객 자체가 적고 개봉 영화가 없으니 아무도 나무라지 않는다. 결국 수많은 극장에서 관객도 앉히지 않은 채 영화만 상영했다는 의미다.
같은 기간 박스오피스 2위는 2000년 개봉 후 20년 만에 재개봉한 영화 ‘화양연화’다. 관객 4만 8883명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 한류스타인 남주혁과 한지민이 출연한 영화 ‘조제’도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12월 10일 상영을 시작한 이 영화는 박스오피스 3위에 올랐지만, 이 기간 동안 모은 관객은 4만 7000명 남짓이고 누적 관객도 20만 명 정도다.
신작이 등장하지 않으니 11월 4일 개봉한 뒤 아직까지 극장에 걸려 있는 ‘도굴’이 4위(4만 4902명)다. 이 영화가 누적 관객 153만 명을 모아 극장 부활의 신호탄이 될 것이란 기대감을 끌어올리기도 했지만, 후속타가 없었다.
한 중견 영화제작사 대표는 “극장 업계의 부활을 위해서는 흐름이 필요하다. 코로나19 1차 대유행기였던 지난 2월 이후 ‘극장은 위험하고 볼 만한 영화도 없다’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 그런데 실제로 주목받을 만한 신작도 개봉되지 않으니 관객이 극장을 더 외면한다”며 “관객들이 극장에서 큰 스크린을 통해 보고 싶은 영화들이 꾸준히 개봉돼야 관객의 발길을 다시금 돌릴 수 있다”고 충고했다.
#결국 ‘신작’이 답
지난 20년 동안 충무로를 비약적으로 성장시킨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영화라는 콘텐츠가 가진 힘이다. 즉 완성도 높은 ‘볼만한 영화’가 등장한다면 다시 관객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는 코로나19 앞에서 주눅 들었던 충무로가 반격하는 한 해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2021년에는 우선 2020년 개봉을 발표했다가 연기한 영화들이 등판한다. ‘서복’이 개봉 시기를 엿보고 있고, 쌍천만 감독 시대를 연 윤제균 감독의 신작 ‘영웅’도 연내 관객과 만난다. 사진=영화 ‘서복’ 홍보 스틸 컷
일단 지난해 개봉을 발표했다가 연기한 영화들이 등판한다. ‘서복’이 개봉 시기를 엿보고 있고, ‘국제시장’과 ‘해운대’를 통해 쌍천만 감독 시대를 연 윤제균 감독의 신작인 ‘영웅’도 연내 관객과 만난다.
두 작품 외에도 ‘믿고 보는 감독’들의 신작들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명량’으로 역대 한국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보유한 김한민 감독의 신작 ‘한산:용의 출현’이 후반 작업에 한창이다. ‘베테랑’으로 유명한 류승완 감독의 240억 원 대작 ‘모가디슈’ 역시 대기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다.
이 외에도 8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던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후속편인 ‘해적: 도깨비 깃발’이 대기 중이다. 송강호, 이병헌, 전도연 등 충무로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뭉친 ‘비상선언’도 연내 개봉된다. ‘도둑들’과 ‘암살’ 등 1000만 영화 두 편을 보유한 최동훈 감독의 SF 영화 ‘외계인’도 연말께 관객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넷플릭스행 가속화되나
하지만 마냥 핑크빛 전망만 내놓을 수는 없다. 기대되는 신작이 파이를 키울 수는 있지만, 이미 극장가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냉정한 분석도 나오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콕’ 생활이 늘면서 넷플릭스를 선택한 대중이 그 편리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 또한 높다.
지난해 영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 공개를 택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영화계의 자존심 한 축이 무너지는 것과 다름없었다. 게다가 배우 송중기와 박신혜가 각각 출연한 영화 ‘승리호’와 ‘콜’도 넷플릭스행을 택했다.
새해에도 역시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코로나19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어 관객들이 극장가기를 꺼리고, 지난해 개봉을 못한 영화들이 올해 대거 몰리며 마땅한 개봉 시기를 잡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석 간 띄어 앉기를 시행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각 투자배급사들은 상영관 확보를 둘러싸고 출혈 경쟁을 필칠 공산이 높다. 이는 극장가를 위축시키고 넷플릭스 공개를 가속화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또 다른 영화 관계자는 “오히려 대작들의 개봉이 몰리는 것이 독이 될 수 있다. 앞다투어 개봉관을 확보하려 하다보면 상대적으로 ‘작은 영화’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결국 보다 안정적인 제작비 회수 및 상영 조건을 찾기 위해 넷플릭스와 손잡는 이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