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정치권은 백드롭(배경 현수막) 정치의 전쟁터다. 각 당의 메시지를 단 한 줄로 각인하는 백드롭은 슬로건을 비롯한 ‘정치수사학’ 정점으로 꼽힌다. 백드롭 정치는 매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와 당사 등에서 펼쳐진다. 각 당 선거홍보 전문가들은 카메라에 잡히는 찰나를 위해 밤낮을 고민한다.
국민의힘이 여권 실언 ‘미러링’ 등 백드롭 정치를 적절히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드롭 정치를 주도하고 있는 김수민 국민의힘 홍보본부장. 사진=이종현 기자
백드롭 정치에서 먼저 치고 나간 쪽은 국민의힘이다. 핵심은 ‘정공법에서 벗어나기’다. 식상한 민주·통합 등의 단어 대신 여권의 실언 등을 가공하지 않은 채 ‘미러링(의도적인 모방을 통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처지를 역전시키는 행위)’하는 게 대표적이다. 프로레슬링의 백드롭(상대를 뒤로 넘기는 기술)과 닮은 이 작업을 김수민 홍보본부장이 맡았다.
국민의힘은 부동산 대란으로 민심이 들끓던 2020년 7월 20일,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과 주호영 원내대표 뒤로 ‘그렇게 해도 안 떨어져요, 집값’이란 파란색 백드롭을 걸었다. 앞서 친문(친문재인)계인 진성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7월 17일 ‘MBC 100분토론’ 후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발언한 문장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같은 달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가 서울을 지칭해 “천박한 도시”라고 폄훼하자, 국민의힘은 ‘아름다운 수도, 서울…의문의 1패’라는 백드롭을 내걸었다.
추(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윤(윤석열 검찰총장) 정국이 최고조에 달했던 2020년 11월 26일에는 문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채동욱 찍어내기 논란 당시 ‘결국… 끝내… 독하게 매듭을 짓는군요. 무섭습니다’라고 한 발언을 미러링했다.
파급력은 컸다. 여의도 안팎에선 “국민의힘이 백드롭 정치를 통해 야성을 회복했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다. 한 관계자는 “김수민 효과로 2020년 6월 이후 백드롭 정치의 시너지효과가 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대 최연소 국회의원인 김 본부장(1986년생)은 한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허니버터칩’의 표지 디자인을 맡았던 홍보 전문가다. 숙명여대 재학 땐 교내 디자인 동아리를 ‘브랜드호텔’이란 벤처기업으로 격상시켰다. 2016년 총선 때 국민의당에 입당한 김 본부장은 바른미래당을 거쳐 2020년 4월 총선 당시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에 합류했다.
그러나 김 본부장 고민도 깊다. 그간 국민의힘 백드롭 정치는 여권 실정에 반사이익을 취하는 전략에 그쳤다. 제1야당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는 얘기다. 국민의힘이 신축년 첫 비상대책회의에서 ‘일상의 회복을 넘어, 더 나은 내일로’라고 적은 백드롭을 선보인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한 당직자는 “코로나19를 극복하고 경제 위기를 극복하자는 것”이라고 전했다.
민주당은 새해 첫 최고위원회의에서 ‘2021 코로나 극복 원년, 함께 이겨냅시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여당은 상상력을 가미한 이색 전략보다는 정책 등을 홍보하는 정공법을 주로 쓴다. 미래소통국의 젊은 당직자들이 백드롭 정치의 아이디어를 주로 낸다.
이낙연 대표 취임 직후인 2020년 8월 30일에는 ‘우리 함께 이겨냅시다’를, 10월 19일에는 ‘위기에 강한 유능한 대한민국 민주당’을 각각 백드롭으로 사용했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책임감 있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2021년과 함께 재보선 정국의 막이 오름에 따라 여야의 백드롭 정치 수 싸움은 한층 치열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