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비밀경호국장인 존 마고가 말한 것처럼 지난 1월 6일(현지시간) 워싱턴 DC에서 벌어진 초유의 사태에 미국은 물론이요, 전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시위대들이 순식간에 의회를 점령하면서 벌어진 이번 사태를 가리켜 일부 언론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수백 명이 한꺼번에 의회의사당에 난입하자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최루탄과 총이 발사됐고, 급기야 네 명이 총상을 입고 사망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이번 소요 사태를 일으킨 시위대는 트럼프의 극성 지지자들로, 그동안 부정선거를 주장해온 트럼프와 마찬가지로 내내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에 일부에서는 이번 사태의 책임을 트럼프에게 돌리기도 하다. 트럼프가 시위대의 의회 점령을 부추겼고, 소요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이를 말리기는커녕 방관 혹은 독려했다는 것이다. 그간 민주주의 모범국을 자부해왔던 미국이 한순간에 무너지자 아연실색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미국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6일 워싱턴 DC의 의회의사당에 운집한 트럼프 지지 시위대. 이 중 수백 명이 의사당에 난입했다. 사진=AP/연합뉴스
“50년 동안 법을 집행해온 내 경험에서 봤을 때 이번 사태는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는 마고의 말처럼 이번 소요 사태는 충격 그 자체였다. 네 시간가량 이어진 의회의사당 점령 사태는 결국 네 명이 사망하고 52명이 체포되면서 마무리됐고, 비록 시위는 진압됐지만 워싱턴 전역은 여전히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시위를 일으키고 의회의사당에 난입한 이들은 트럼프 지지자들이었다. 같은 날 오후 미 의회에서는 조 바이든 당선인의 당선을 확정짓는 선거인단 투표수 집계가 진행될 예정이었고, 이를 의식한 듯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 의회의사당 근처에 있는 ‘내셔널 몰’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이 자리에서도 부정선거를 재차 강조한 트럼프는 “우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선거 결과에 불복한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다. 그러면서 또한 운집한 지지자들에게 이번 선거가 ‘급진적 민주당원들’과 ‘가짜 뉴스를 보도하는 언론’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하면서 ‘무기력한 공화당원’들에게는 바이든의 승리를 뒤집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집회에 참가한 지지자들을 자극하는 문제의 발언은 그 다음에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그곳을 향해 행진합시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함께 의회의사당으로 걸어갑시다. 그리고 우리의 용감한 상원의원들과 여성 의원들을 응원합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지지자들은 대부분 차분한 상태였다. 하지만 트럼프가 연설을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의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하던 수백 명의 시위대가 갑자기 돌변하더니 바리케이드를 넘어 의사당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경찰이 저지하려고 해도 속수무책이었다.
경찰과 의회 경비원들을 뚫고 의사당 안으로 난입하는 시위대의 모습은 TV 생중계로 고스란히 미 전역에 전달됐다. 일부 시위대는 의사당 건물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으며, 성조기와 트럼프 지지 깃발을 휘두르면서 승리를 외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의사당 내부로 진입한 일부 시위대의 경우에는 더욱 자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우리가 이겼다”며 고함을 치면서 몰려다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상원 회의장까지 침입해 상원의장석까지 점거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펠로시 하원의장의 사무실에 들어가 책상 위에 발을 올리고 앉아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노예제 옹호를 상징하는 남부연합기를 휘두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당시 선거인단 개표를 진행하고 있던 상하원 합동 회의는 즉각 중단됐고,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등 의사당에 모여 있던 의원들은 경호인력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의원들이 폭도들을 피해 의사당을 빠져나올 때 몇몇 원내 직원들은 의원들이 집계하고 있던 선거인단 증명서가 담긴 상자들을 꼭 움켜잡고 피신하기도 했다. 폭도들의 목표가 선거를 무효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행여 발생하지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에 대해 타미 덕워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CBSN에 “의회의사당 내 안전한 곳에 투표용지를 보관해두었다”고 말했으며, 제프 머클리 오리건주 상원의원은 ‘믿음직한 원내 직원들’의 신속한 조치가 없었다면 선거인단 투표용지는 “폭도들에 의해 불타버렸을 것”이라며 안도하기도 했다.
의사당 내부로 진입한 시위대가 성조기를 휘두르며 몰려다니고 있다. 사진=EPA/연합뉴스
의회 경찰과 대치하던 시위대는 총을 맞아 여성 한 명이 쓰러지자 잠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격분한 이들은 이내 ‘살인자들!’이라고 외치면서 흥분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경찰도 부상을 당하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
오후 1시 무렵 시작된 시위는 오후 5시 30분쯤 진압됐고, 의사당에서 쫓겨난 시위대는 여전히 해산하지 않은 채 주변에 머물면서 계속해서 시위를 이어나갔다. 뒤늦게 출동한 주방위군과 경찰은 의회의사당 주변에서 이들과 대치했고, 결국 오후 6시부터는 통행금지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여섯 시간 중단됐던 상하원 합동 회의는 7일 새벽 다시 열렸으며, 각주 선거인단 투표 결과 집계를 마치고 바이든 당선인을 차기 대통령으로 확정했다. 트럼프 역시 의회 승인 직후 공식 성명을 통해 마지못한 듯 “선거 결과에 동의하지는 못하지만, 1월 20일에는 질서 있게 정권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이번 소요 사태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이 트럼프가 이번 폭력 시위를 방관하거나 부추겼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든 당선인은 이번 의회의사당 난입 사건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하면서 “그들을 시위자라고 부르지 마라. 그들은 폭도, 반란자, 국내 테러리스트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또한 “지난 4년간 우리에게는 민주주의, 헌법, 법치주의를 경멸하는 대통령이 있었다. 이 모든 일은 트럼프가 벌인 게 분명하다”고 비난했다.
실제 트럼프는 의사당 점령 사태가 벌어진 후에도 트위터를 통해 “나는 의회의사당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란다. 폭력은 안된다! 우리는 법과 질서의 당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나는 법을 수호하는 위대한 국민들을 존중한다”고 말할 뿐 시위대 해산을 촉구하는 발언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오후 4시 17분에야 다시 트위터에 1분 7초 분량의 동영상을 올려 “지금 귀가하라”라고 당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다만 이번에도 시위대를 엄단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 채 “여러분을 사랑한다. 여러분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거나 “여러분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안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시위대를 두둔하는 듯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이 동영상은 곧 유튜브, 트위터, 페이스북 등에서 삭제됐다. 심지어 트위터는 트럼프가 선거에 대한 근거 없는 음모론을 트위터를 통해 계속 주장하고 폭력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트럼프의 계정을 열두 시간 동안 차단하는 전례 없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방조뿐만 아니라 실제 시위를 부추긴 면도 없지 않았다. 2주 전부터 트럼프는 “2020년 선거의 최종 인준에 항의하기 위해 곧 워싱턴 DC에서 집회가 열릴 것”이라고 떠들었으며, 트위터에서는 “1월 6일 워싱턴에서 큰 시위가 벌어진다” “함께 하자. 거침없이 나가자”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이에 대해 ‘뉴욕매거진’은 “폭력은 트럼프가 줄곧 언급해 온 것으로, 그는 지지자들을 자극하기 위해 공기 중으로 피냄새를 풍기고 있다. 트럼프는 자신과 지지자들이 언론과 자신에게 저항하는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고 공격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고 썼다.
트럼프가 계속해서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모습도 일부 극단적인 지지자들에게는 폭력 시위를 부추기는 요인이 됐다. 트럼프는 분명히 자신이 패배한 선거를 부정하기 위해 수십 건의 소송을 제기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왔다. 의원들과 주공무원들에게 선거 결과를 거부하라며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6일 시위대를 향해 “그곳을 향해 행진합시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 함께 의회의사당으로 걸어갑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EPA/연합뉴스
워싱턴 정가에서는 여야 할 것 없이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수요일 성명에서 “역사는 합법적 선거 결과에 대해 근거 없이 거짓말을 계속해온 현직 대통령에 의해 선동된 오늘의 폭력 사태를 미국의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펠로시 하원의장은 하원의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의 폭력은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수치스런 공격”이라고 맹비난했다.
이런 비난은 공화당 인사들 사이에서도 쏟아지고 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은 수요일 시위를 가리켜 ‘반란’이라고 규정하면서 “이것은 역겹고 가슴 아픈 광경이다”라고 비통해했다. 그러면서 또한 부시 전 대통령은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모습은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의 모습이 아니라 바나나 공화국(해외 원조로 살아가는 빈국)에서 벌어지는 모습이다”라면서 “나는 선거 이후 일부 정치 지도자들의 무모한 행동과 우리의 제도, 전통, 그리고 우리의 법 집행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에 경악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와 대척점에 서있는 미트 롬니 유타주 상원의원 역시 트럼프에 대한 공격을 이어나갔다. 그는 의회의사당에서 벌어진 혼란이 “이기주의적인 남자의 자존심과 지난 두 달 동안 의도적으로 거짓 정보를 흘려가면서 선동한 지지자들의 분노로 벌어졌다”고 비난하면서 “진실은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이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졌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의회에서는 다시 트럼프 탄핵안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비록 임기는 2주가 채 남지 않았지만 국가 원수로서 폭력과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사실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야나 프레슬리 공화당원은 “트럼프는 하원에 의해 즉시 탄핵되어야 하고, 의회가 다시 소집되는 대로 대통령직에서 해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트럼프와 가장 앙숙이었던 일한 오마르 의원은 트위터를 통해 탄핵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오마르 의원은 그러면서 “우리는 그의 유임을 허용할 수 없다. 그것은 우리의 공화국을 보존하는 문제이며 우리는 우리의 맹세를 이행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복잡한 절차 때문에 사실 며칠 안에 탄핵안을 통과시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만일 탄핵된다면 트럼프는 2024년 대선에 출마할 수 없게 된다. 탄핵을 당할 경우에는 미국 수정헌법에 따라 공직에서 물러나는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국가적 차원에서의 신임을 얻거나 이익을 보유 및 향유하지 못하도록 규정돼 있기 때문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