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택 신임 KBO 총재가 지난 5일 취임식을 하고 임기를 시작했다. 사진=연합뉴스
#구단주 총회에서 만장일치 추대
KBO 총재는 각 구단 사장단이 모인 이사회에서 재적이사 4분의 3 이상 동의를 받아 추천하고, 구단주 총회에서 재적회원 4분의 3 이상 찬성을 얻어 선출한다. 정 총재는 지난 12월 초 KBO 구단주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야구 규약에는 총재의 직무에 대해 공식적으로 ‘KBO를 대표하고 이를 관리 및 통할한다’고 명시돼 있다.
정 총재는 취임사에서 “KBO리그가 예전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아직 고쳐 나가야 할 점이 많다.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주어진 숙제도 만만치 않다. 총재로서 지금의 위기를 기회로 바꿔, 팬과 함께 호흡하는 생명력 있는 리그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또 “리그와 10개 구단의 수익 개선, 철저한 코로나19 방역 관리와 대응, 우수 선수 육성을 통한 경기력 향상, 도쿄올림픽 우승 전략 수립 등의 과제를 먼저 실천하겠다”고 약속했다.
정 총재는 야구계 현안에 관한 취재진 질문에도 막힘없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최근 큰 논란을 일으킨 키움 히어로즈 구단 경영진의 부적절한 행위와 관련한 내용이 그 첫 번째다.
정 총재는 “KBO를 비롯한 10개 구단은 높은 도덕심을 바탕으로 스포츠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다만 그중 일부 문제가 생기는 경우 일벌백계, 신상필벌의 원칙을 집행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KBO 규약이 정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엄격한 제재를 가하며 지켜나가도록 하겠다”고 대답했다.
전임 총재가 큰 성과를 남기지 못한 ‘통합 마케팅’에 대해서도 소신을 밝혔다. 정 총재는 “통합 마케팅은 결국 리그 산업화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각 구단 이해관계가 달라 의견을 통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구단이 적극적으로 팀 운영과 팬 서비스 등 수익 개선 방법을 찾고, KBO가 이에 협조하면서 힘을 모으는 게 가장 빠른 길이라고 본다. KBO도 자체적으로 여러 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운찬 전임 총재는 임기 말 키움 구단에 대한 징계로 고민을 거듭하기도했다. 사진=임준선 기자
#총재의 공식적인 역할은?
KBO에서 총재의 권한은 막강하고 절대적이다. 프로야구에 가입된 회원(구단)에 대해서는 회원자격, 연고지역, 선수계약의 보유, 경기 참가에 관한 제반 권리의 박탈 또는 정지, 구단에 대한 제재금 부과, 경고처분 등을 결정할 수 있다. 또 선수와 구단 직원들을 비롯한 개인에 대해서 실격처분이나 직무정지, 참가활동정지, 제재금 부과, 경고처분 등을 심리한다.
총재의 지시, 재정, 재결은 최종적인 형태로 모든 리그 관계자에게 적용된다. 회원 및 회원 소속 리그 관계자들에게는 총재의 결정대로 이행해야 하는 책임도 있다. 최근 허민 키움 히어로즈 이사회 의장이 이른바 ‘야구놀이’ 사태에 대한 KBO 상벌위원회의 직무정지 징계에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가 야구계의 거센 비난에 부딪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만 이유다.
또 총재는 KBO 규약과 제반 규정, 이 조항들을 따르는 데 필요한 절차에 대해 해석상 이견이나 분쟁이 있을 때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할 수 있다. 전임 정운찬 총재는 상벌위원회가 “KBO 규약에는 허 의장에게 징계를 내릴 수 있는 근거 조항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자 총재 직권을 사용해 추가 중징계를 결정했다.
KBO 총재는 전통적으로 ‘명예직’이었다. 두산그룹 회장을 지낸 고 박용오 총재 시절부터 많은 총재가 돈을 받지 않고 무보수로 일했다. 후임 신상우 총재 때 연봉 1억 8000만 원과 업무추진비 1000만 원이 지급됐지만, 명지학원 이사장이었던 후임 유영구 총재 때 다시 무보수로 돌아갔다. LG그룹 총수 일가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도 총재 임기 6년 내내 무보수로 일했다. 그러나 기업인이 아닌 정운찬 전임 총재가 취임하면서 다시 총재 연봉과 업무추진비를 KBO 예산에 포함시켰다. “총재도 연봉을 받으면서 일하고, 성과가 좋으면 인센티브도 받는 게 프로야구 산업화의 첫 걸음이라고 생각한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메이저리그 커미셔너인 롭 맨프레드는 스타플레이어들에 맞먹는 연봉 2500만 달러를 받는다. 전 세계 프로스포츠 커미셔너 가운데 최고 연봉자로 추정되는 인물은 미국프로풋볼(NFL)의 로저 구델이다. 2013년 연봉이 무려 3500만 달러에 달했다. 2014년부터는 연봉을 공개하지 않았는데, 2024년까지 이미 장기 계약을 끝낸 상태다. 구델은 자신뿐 아니라 NFL 구단들에도 막대한 수입을 안긴 커미셔너로 유명하다.
#정치권 인사가 줄을 선 초창기 총재들
정지택 총재에 앞서 여러 인물이 KBO를 이끌었다. 프로야구 제1~2대 총재인 서종철 총재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최종 후보 3명 가운데 직접 선택한 인물이었다. 대통령이 사석에서 “나의 영원한 스승”이라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서 총재는 특히 육군참모총장 시절 육군야구단 단장을 맡았을 정도로 야구에 애정이 많았던 인물로 알려졌다. 정치적 평가와 별개로, 초창기 프로야구의 인프라를 다지는 데 공을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서 총재는 취임 이후 광주와 대구, 부산 구덕구장의 관중석을 최소 1만 석 이상 규모로 증축해 프로야구가 열릴 수 있을 만한 야구장으로 탈바꿈시켰다. 또 부산시와 롯데의 회의적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부산에도 3만 석 규모의 야구장을 지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려 사직구장을 건설하는 데 앞장섰다. 서 총재 재임 시절에 미국, 일본 프로야구와 교류 협정도 맺었다.
서 총재는 임기 만료를 5개월 앞둔 1987년 10월 사임했다. 총재 역할을 맡은 지 2299일 만이었다. 프로야구 이사회가 “총재로 재추대하고 싶다”며 사임을 만류했지만, 프로야구 창립일인 12월 11일에 퇴진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 일흔을 훌쩍 넘긴 2001년 올스타전에서 시구를 맡는 등 KBO와 연을 끊지 않았다. 2010년 11월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사실 프로야구는 사회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출발했다. 초대 총재는 물론이고, 이후 KBO 총재를 거친 인물들도 대부분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3~4대 총재는 문화공보부 장관 출신인 이웅희 총재다. 1988년 3월 28일에 취임해 1992년 5월 27일까지 총 1634일 동안 총재를 역임하다 임기 도중 김영삼 대통령후보 추대위원회에 참여하기 위해 KBO를 떠났다. 5대 이상훈 총재도 국방부 장관 출신으로 1992년 5월 28일부터 이듬해 9월 16일까지 477일간 총재 자리를 지키다 비리 혐의로 구속되면서 퇴진했다.
6대 오명 총재는 1993년 11월 26일부터 12월 21일까지 불과 26일 동안만 KBO에 머물렀다. 채 한 달도 못 채운 역대 최단기 총재다. 체신부 장관으로 입각한 게 사퇴 이유였다. 그 뒤를 이어 받은 권영해 총재는 1994년 3월 21일에 7대 총재로 부임한 뒤 278일 만인 그해 12월 23일 안기부장 자리를 꿰차고 물러났다. 8대 김기춘 총재도 1995년 2월 8일부터 1996년 6월 8일까지 487일간 총재 자리에 앉았다가 국회로 진출하면서 야구계를 떠났다. 권 총재는 국방부 장관, 김 총재는 법무부 장관 출신이었다.
이 외에도 경제기획원 장관 출신인 9~10대 홍재형 총재(1996년 7월 4일~1998년 5월 26일)는 사회 문제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국회의원이었던 11대 정대철 총재(1998년 5월 27일~9월 15일) 역시 112일 만에 비리 문제로 구속돼 물러났다. 이렇게 계속되는 낙하산 인사 속에 KBO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야구계가 ‘정치적으로 힘이 센 총재’보다 ‘프로스포츠의 특성을 이해하는 총재’를 원하기 시작한 이유다.
#프로야구 운영 기틀 다진 박용오 총재
고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여러 모로 기억할 만한 총재다. 사상 처음으로 구단주 회의에서 직접 선출한 민선 총재였고, 역대 최장수 연임 총재였다. 1998년 12월 8일부터 2005년 12월 11일까지 12~14대 총재를 맡으면서 무려 2561일 동안 KBO를 이끌었다.
가시적인 성과도 많다. 박 총재는 프로야구 정규시즌 타이틀 스폰서를 처음으로 유치하고 방송 중계권료를 대폭 인상해 KBO가 안정적인 수입을 확보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 쌍방울 레이더스와 해태 타이거즈를 각각 SK와 KIA에 매각시키는 데 성공했다. 프리에이전트(FA) 제도 도입, 경찰청 야구단 창단, 도시 연고제 정착 등을 성공시켜 현재 프로야구 운영의 틀을 마련했다. KBO와 대한야구협회의 행정적 통합, 아마야구 지원 확대 등을 일구기도 했다.
무엇보다 기업가이자 프로야구 구단주(두산의 전신 OB) 출신답게 최초로 프로야구단 흑자 전환을 지향점으로 삼은 총재이기도 했다. 그룹 경영권 문제를 둘러싼 일신상의 이유로 7년 만에 총재 자리에서 물러난 박 총재는 사퇴의 변으로 “일흔 넘게 살아오면서 KBO에서 지낸 7년은 내 인생 10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2009년 11월 박 총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야구계 전체가 충격 속에 애도한 표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 총재 이후에는 국회부의장 출신인 신상우 총재(2006년 1월 10일~2008년 12월 16일)가 15~16대, 명지학원 이사장 출신인 유영구 총재(2009년 2월 24일~2010년 5월 2일)가 17~18대 총재를 역임했다. 두 총재 모두 개인사로 두 번째 임기를 채우지 못했다.
#사재 들여 리틀야구장 고친 구본능 총재
구본능 총재는 2011년 8월 제19대 총재로 추대돼 유영구 전임 총재의 잔여 임기를 모두 마쳤고, 그해 12월 20대 총재로 재추대됐다. 2014년 12월에는 만장일치로 다시 21대 총재를 맡았다. 2017년 12월 31일까지 총 2324일간 KBO의 지휘봉을 잡으면서 박 전 총재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오래 재임한 총재로 기록됐다.
구 총재가 부임하기 전까지만 해도 야구계 일각에서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구 총재의 동생은 LG 트윈스 구단주인 구본준 LG 고문이다. 특정 구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 KBO의 수장이 되면 오해를 살 일이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그러나 그 이전에 구 총재는 이미 각별한 야구 사랑으로 유명했다. 총재가 되기 전인 2005년에 개인적으로 소장한 야구 사진들을 모아 ‘한국야구 100주년’ 사진전을 열었고, 개인 재산을 들여 장충 리틀야구장을 보수했을 정도다.
구 총재는 실제로 KBO 지휘봉을 잡은 뒤 리그 발전에 큰 힘을 보탰다. 가장 큰 공은 단연 10개 구단 제체를 확립한 것이다. 제9구단 NC 다이노스와 제10구단 kt 위즈의 창단을 차례로 이끌어냈다. 광주와 대구를 비롯한 야구장 신축과 리모델링을 유도했고, 구장 관리 지침도 만들었다. 또 야구발전기금 300억 원을 조성해 초등학교 야구팀 창단 시 3000만 원, 중학교 야구팀 창단 시 1억 5000만 원, 고등학교 야구팀 창단 시 4억 원을 지원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2011년 161개에 불과했던 전국의 야구장 수가 구 총재 재임 기간 동안 3배 가까이 늘었다. 한국 프로야구의 르네상스를 함께 한 총재로 기억될 만하다.
반면 후임 정운찬 총재는 오랜 기간 KBO 총재 후보로 거론됐던 인물이다. 경제학 전문가인 그는 2002년 역대 최연소 서울대 총장으로 취임했고, 2009년 9월부터 2010년 8월까지 국무총리를 역임했다. 두산을 프로야구 원년부터 좋아한 열성 야구팬으로 이름을 날린 데다 ‘야구 예찬’이라는 제목의 자서전도 출간했다. 야구계는 당시 정운찬 총재의 부임 소식에 일제히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정작 재임 기간의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는 평가다. 선동열 초대 국가대표 감독이 일부 정치인의 포퓰리즘 희생양이 돼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 출석하는 촌극이 벌어졌을 때는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기도 했다. KBO 총재 자격으로 증인으로 출석했다가 “선 감독의 불찰이었다는 데 동의한다”는 발언을 해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