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인물을 소재로 한 팬픽션을 뜻하는 ‘알페스’(RPS) 이용자들을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11일 오후 기준 8만 명의 동의를 이끌어냈다. 사진=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캡처
지난 10일 한 청원인이 이와 같은 알페스에 대해 “미성년 남자 아이돌을 성적 노리개로 삼는 알페스 이용자들을 강력히 처벌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렸다. 이 청원인은 “차마 입에 담기도 적나라한 표현을 통해 변태스러운 성관계나 강간을 묘사하는 성범죄 문화”라고 지적하며 “‘알페스’ 이용자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이 범죄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들이 계속 아이돌을 소비해주기에 아이돌 시장이 유지되는 거다. 그러니 소속사도 우리를 고소하지 못할 것’과 같은 후안무치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면서 분노를 표했다.
청원인은 “피해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권력을 가졌든 가지지 못했든 그 누구라도 성범죄 문화에 있어서는 성역이 될 수 없다”며 강력 처벌을 촉구하기도 했다. 이 청원은 11일 오후 현재 8만 여 명이 동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번 ‘알페스 논란’은 래퍼 손 심바가 지난 9일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알페스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불이 붙었다. 손 심바는 트위터 등 SNS에 퍼진 알페스 글, 그림 등을 공개하며 “아이돌, 음악 시장이 팬덤과 수익을 잃을 것을 우려해 (알페스를) 묵과하는 것을 인지하고 이도저도 못하는 이 상황을 이용하며 실존 인물에 대한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라며 “알페스는 잔인한 성범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자신 역시 알페스의 피해자라고도 주장했다.
손 심바가 문제 삼고 있는 국내 알페스는 1990년대 1세대 아이돌로 분류되는 H.O.T.와 젝스키스 등을 시발점으로 한다. 당시에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알음알음 퍼진 ‘음지 문화’였으나 일부 ‘작가 팬’들은 출판사를 통해 정식으로 알페스 팬픽을 출판하면서 일반 대중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를 통해 알페스가 자연스럽게 팬 문화의 하나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아이돌 그룹을 주로 배출해 낸 연예기획사도 이 같은 팬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등 2세대 아이돌은 활동 기간 동안 소속사가 직접 팬들을 상대로 ‘팬픽 공모전’을 열 정도였다. 팬덤 내 알페스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지 않은 것은 2.5세대~3세대 이후의 아이돌 소속사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11일 얼반웍스는 공개된 커뮤니티에 소속 연예인에 대한 성희롱 글을 지속적으로 올려온 이용자 6명에 대해 법적 조치를 취했다고 밝혔다. 사진=얼반웍스 제공
한 연예기획사 홍보팀장은 이 같은 알페스가 ‘그레이 존(Gray Zone)’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레이 존이란 어느 영역에 속하는지 불분명한 중간지대를 뜻하는 말로 상업적인 분야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 사이에 있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는 “아이돌을 토대로 만든 인형을 공구하거나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일도 초상권 같은 측면에서 접근하면 당연히 저희가 법적으로 제재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팬 문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용인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 부분에 팬픽도 포함돼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만일 정말 스토리도 뭐도 없이 야설 수준으로 심하거나 음란한 그림, 영상 등으로 합성해서 소비하고 있다면 당연히 저희도 조치를 취할 것이지만 그런 게 아닌 이상 굳이 제재하거나 그러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연예인들에게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성희롱, 모욕 악플을 취합해 법적 조치를 취하는 게 더 도움 되는 일”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최근 대다수의 연예기획사에서는 소속 연예인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악질적인 성희롱 악플을 취합해 강경한 법적조치를 진행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걸그룹 아이즈원의 멤버 김민주의 소속사 얼반웍스가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일베 등지에서 성희롱 글을 지속 게시하던 이용자 6명에 대해 법적 절차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피소된 6명은 피해 여성 연예인들을 대상으로 성적인 모욕 글을 누구나 접속할 수 있는 공개된 게시판에서 수개월간 게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이 글을 올리는 동안 게시판 이용자와 관리자 누구도 제재하거나 신고하지 않으면서 결국 팬들이 증거자료를 취합해 소속사 측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선 연예기획사 홍보팀장은 “결국은 피해 연예인에게 실질적으로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가의 문제”라며 “이번 논란에 대해 엔터업계 관계자들이나 남녀 불문 연예인 당사자들이 생각만큼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로 파악된다. 수위 높은 팬픽을 쓰는 팬과 허위사실을 포함한 성희롱 글을 지속 게시하는 네티즌이 있다면 후자가 훨씬 더 뚜렷한 위협이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다만 일부 소속사에서는 팬픽과는 별개로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 선정적이고 음란한 글 또는 그림을 SNS에 게시해 사실상 ‘성희롱 악플러’에 가까운 팬들에 대해 1차 경고 후 시정되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 의사도 있다고 밝혔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