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SK그룹 2인자는 조대식 SK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다. 최 회장의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한 조 의장은 2013년부터 지주회사 SK(주) 대표이사를 맡은 데 이어 2017년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깜짝 발탁됐다. 수펙스추구협의회는 SK그룹의 컨트롤타워로 SK텔레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주력 계열사를 평가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조 의장은 지난해 말까지 내리 3연임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조대식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 사진=최준필 기자
그러나 SK그룹 내의 ICT(정보통신기술) 부문 계열사들을 이끄는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겸 SK하이닉스 부회장도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태원 회장의 장남 인근 씨가 입사한 SK E&S를 맡고 있는 유정준 부회장이나 현 SK 대표이사 장동현 사장도 차기 2인자 후보군에서 빼놓을 수 없다.
2인자 라인업에 관심이 쏠리는 또 다른 이유는 최 회장이 상의 회장 임기가 끝나더라도 SK그룹 경영자로 복귀하기보다는 재계 구루(Guru)로 계속 활동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나 박용만 상의 회장이 경제단체로 옮긴 후 그룹 회장직을 내놓은 전례도 있다. 즉 2인자 경쟁에서 승리한다면 아직 20대인 인근 씨나 인근 씨의 누나인 윤정 씨, 민정 씨가 경영진에 올라설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 동안 SK그룹을 이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세대교체 압력을 받겠지만 그래도 재계 2, 3위를 오르내리는 SK그룹에서 장기 집권을 기대해볼 만한 상황이 펼쳐진다. 최태원 회장의 부친인 고 최종현 회장이 1998년 별세하자 회장직에 올라 2004년까지 6년간 SK를 이끌었던 손길승 명예회장과 같은 역할을 맡는 셈이다. 평사원 출신인 손 회장은 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으로 재직하며 1980년과 1994년 각각 대한석유공사(현 SK이노베이션),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 인수를 주도해 고 최종현 회장의 신임을 얻었다.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겸 SK하이닉스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일단 박정호 부회장은 꾸준히 언론에 이름을 올리며 많은 성과를 내놓고 있다. 2011년 SK텔레콤 사업개발실장으로 하이닉스 인수를 주도했던 그는 2017년 도시바 메모리 반도체 부문 인수에 이어 지난해엔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 부문 인수를 성사시켰다.
이 외에도 눈에 띄는 딜이 하나 있었다. 바로 11번가와 아마존의 제휴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마존의 11번가 지분 참여 약정이 사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오픈마켓 시장의 과열 경쟁으로 자금 지원에 부담을 느껴 한때 11번가 매각을 검토해야 했던 SK텔레콤으로서는 최상의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다. 아울러 정보보안업체 SK인포섹과 ADT캡스의 합병, SK브로드밴드와 티브로드 합병, 모빌리티 분사 등에 박정호 부회장이 관여했다.
SK그룹 사정을 잘 아는 재계 관계자는 “박 부회장은 한때 밀려나는 수순인가 싶었는데, 지난해 연이은 빅딜과 부회장 승진으로 다시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면서 “SK텔레콤의 중간지주회사 전환 작업과 하이닉스의 인텔 인수 시너지 효과 창출, 그리고 추가 M&A 등에서도 성과가 나오면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될 수도 있다고 본다”고 전망했다.
박정호 부회장과 함께 부회장으로 승진한 유정준 SK E&S 부회장도 유력 주자 중 한 명이다. 컨설팅회사 맥킨지 출신인 유 부회장은 2003년 SK그룹이 글로벌 헤지펀드 소버린의 공격을 받을 당시 지배구조 개편을 주도했다. 조대식 의장과 박정호 부회장이 구축한 2강에선 다소 밀려나 있는 듯한 분위기지만, 언제든 다시 주목받을 수 있는 위치라는 평가다. 장남 인근 씨가 다른 주력 계열사가 아닌 SK E&S에 입사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현재 SK 대표이사인 장동현 사장을 주목해야 한다는 분석도 있다. 조대식 의장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으로 선임된 2017년 당시에도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영태 부회장 등이 있었지만 SK 대표이사 사장이었던 조 의장이 선택됐기 때문이다. 지주회사 업무를 맡던 인물이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어울린다고 최태원 회장이 평가하고 있을 수 있는데 이 경우엔 장 사장이 가장 유리하다.
재계 다른 관계자는 “조대식 의장은 이번 연임으로 2년 더 의장직을 맡게 되는데, 그 후로도 4연임, 5연임을 할 것이라고 낙관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면서 “어찌 보면 조 의장 입장에서는 (2인자 자리를) 너무 오래 하고 있다는 것이 단점이다. 1인자가 없을 때 2인자를 하는 것이 좋은데 이미 장기집권에 성공했다는 점이 본인으로서는 아쉬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배터리 소송전이 변수 될 수도
변수로는 SK이노베이션 소송전이 꼽힌다.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과 수조 원대 영업비밀 침해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2월 최종 결론을 도출할 예정이다. SK이노베이션은 지난해 2월 14일엔 증거인멸 혐의가 명백하다며 조기패소 결정을 받은 바 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영업비밀 침해가 없다며 강하게 반박하고 있는데, 패소할 경우 미국에서의 배터리 사업이 좌초될 수 있다. 만약 패소하게 되면 김준 SK이노베이션 사장은 물론, 조대식 의장에게까지 타격이 이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SK그룹은 크게 ICT 부문은 박정호 라인, 비(非) ICT 부문은 조대식 의장 라인으로 분류한다”면서 “조 의장 본인은 이런 해석을 싫어할 수 있지만, 만약 패소하게 되면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다”고 내다봤다. 그는 “중간에 합의하라는 여론이 많았음에도 양사 모두 극단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이라며 “어느 쪽이든 지는 쪽은 큰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반대로 승소, 혹은 패소이지만 미국 내 영업은 지속할 수 있는 ‘사실상 승소’ 결정이 나오게 되면 김준 대표와 조대식 의장의 판단력이 출중했다는 평가가 나올 수 있다. 합의금을 물지 않고 최선의 결과를 이끌어내게 되면 그만큼 장기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민영훈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