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씨는 금감원에서 피어올랐다. 윤석헌 금감원장이 최근 ‘독립선언’에 가까운 작심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개편 논의에 불이 붙는 모양새가 됐다. 윤 원장은 2018년 취임식에서부터 ‘독립’을 강조했다. 그는 취임사를 통해 과거의 금감원을 두고 “독립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데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과거 저축은행사태와 동양그룹 사태 등 대형 금융 사고는 금융 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불거졌는데, 그 원인은 금융위의 감독 정책과 금감원 감독 집행 사이에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사후 개선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짚었다. 이때 윤 원장이 해법으로 꺼내든 게 바로 ‘금감원 독립’이었다.
윤석헌 금감원장. 사진=박은숙 기자
이후 2년 사이 다른 대형 금융사고가 터졌다. 라임과 옵티머스 등 대형 사모펀드 사태가 불거지면서 금감원은 또 다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2020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도 금융사고를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금감원의 책임론이 중심이 됐다. 그런데 여기서 윤석헌 원장은 돌연 “금융위원회로부터 독립이 필요하다”고 작심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잇따른 대형 금융사고 발생과 부족한 대응의 원인이 ‘금융위에 예속된 구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이후 윤 원장은 2020년 12월 말 기자단 송년간담회, 2021년 1월 신년사 등에서 금감원 독립이 핵심인 금융감독체계 개편을 강조해왔다.
지금의 금융감독체계는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만들어졌다.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당시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금융 정책)과 금감위(감독 정책)를 합쳐 지금의 금융위원회를 신설했다. 과거엔 은행, 증권, 보험감독원이 따로 있었는데, 외환위기 당시 금융개혁을 통해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로 통합됐다. 이후 금감원은 1999년 금감위 산하 금융 감독 집행 기구로 출범했다.
표면적으로는 자연스러운 형태지만 뜯어보면 정체성이 모호한 지점들이 적지 않다. 금감원은 무자본 특수목적법인으로, 금융위 산하지만 민간 금융사의 분담금으로 조성되는 ‘반민반관’ 조직이다. 금융위설치법을 보면, 금융위는 금융정책과 금융회사 건전성 감독 등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고 금감원은 금융위 업무 중 검사·감독·행정제재 등의 업무와 권한을 위탁받는다. 일종의 감독기능 대행 역할이다. 금융위는 금감원 감독정책에 대한 자율권은 보장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금융위가 금융산업 육성에 초점을 두고, 금감원은 소비자 보호를 위한 감독에 무게를 싣다 보니 각종 사안과 목적에 따라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다는 점이다. 금감원이 스스로 계획을 세워 감독을 진행하지 못하는 만큼 시기를 놓쳐 금융사고가 터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금감원은 현재 감독 집행, 경비성 예산, 조직, 인력 등 구분 없이 금융위의 통제를 받는다.
최근 윤석헌 원장의 독립선언 배경에는 예산 운용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 금융권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실제 윤 원장은 앞서의 국정감사 등을 통해 “금감원은 금융위가 가진 금융정책 권한 아래의 집행을 담당해 예산, 조직, 인력이 다 예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권한이 없어 금감원 의지대로 감독 집행에 반영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한 금감원 관계자는 “라임과 옵티머스 등 사모펀드 사태 대응 과정에서도 예산과 인력과 관련해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일례로 사모펀드 전수조사 과정에서도 각 부서에서 인력을 충원 받았지만 나머지 인력을 보강하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며 “그밖에 소비자 보호를 위한 새 감독 사업 추진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 사진=최준필 기자
윤 원장은 학자 시절부터 금융위가 금융산업 정책과 감독 정책을 총괄하며 금감원을 지시·감독하는 체계는 문제가 있다고 줄곧 지적했다. 금융위의 금융산업 정책 업무를 기재부 국제금융국과 통합하고, 감독 정책 업무는 민간 공적 기구 형태의 감독기구로 통합하자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지금의 금감원을 금융 건전성 감독원과 금융시장 감독원으로 구분한 ‘쌍봉형 금융 감독체계’로 바꾸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금감원은 외부적으로 독립 추진과 관련해 “현재로서는 확정된 내용이 없어 특별히 드릴 말씀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내부적으로 독립을 위한 밑그림 그리기가 한창이다. 윤 원장이 적극적으로 독립을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금감원이 만들고 있는 금융감독 체계 개편안은 기획조정국이 전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기획조정국은 조직 업무 전반에 관한 조정과 계획 수립은 물론, 예산 관리와 국회 등을 상대로 대관활동을 하는 곳이다.
다만 ‘독립선언’ 전에 당장 넘어야 할 산이 있다. 2020년 11월부터 기재부가 추진하고 있는 공공기관 지정 절차다. 기재부는 사모펀드 환매 중단 사태 등으로 부실 감독 책임이 도마에 오르면서 금융감독체계 개편의 일환으로 금감원을 공공기관으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오는 1월 말 기재부 산하기관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지정 여부 결정을 앞두고 있다.
금감원은 2007년 공공기관에 지정됐지만 2009년 감독업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해제됐다. 2017년 감사원으로부터 ‘방만 경영’ 지적을 받은 뒤 금감원의 공공기관 재지정 여부가 논의됐고 금감원은 3급 이상 인력 감축 방안을 수용하면서 조건부 지정유예를 받아 공공기관 지정을 가까스로 피했다. 다시 공공기관으로 지정되면 정부의 철저한 관리 감독을 받고, 예산 집행 현황 등을 상세하게 공개해야 한다. 금융위로부터 벗어날 수는 있지만 더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되는 셈이다.
금감원은 독립하면서도 공공기관 지정을 피할 ‘모델’을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다. 금감원 안팎에선 한국은행식 예산 독립 방안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은행은 기재부로부터 예산 통제를 받지만 핵심 기능인 통화정책과 인건비·복리후생 등 경비성 예산을 따로 구분해 관리감독을 받는다. 독립성을 인정하는 취지에서 통화정책 예산의 전권은 한국은행에 맡기고 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윤 원장이 최근 예산과 관련한 문제제기를 집중적으로 했던 만큼 금감원이 만들 ‘독립선언문(금융감독체계 개편안)’에는 예산 독립성이 중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사안에서 깊은 이해관계를 가진 또 다른 당사자 금융위의 반응도 관심사다. 금융위는 금감원 독립은 물론, 기재부의 공공기관 지정에도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금감원 주장에는 누군가는 감독기관을 통제해야 한다는 취지로 반대해 왔고, 최근 기재부 계획에는 금감원 예산 등은 금융위 통제를 받고 있고 독립성 확보 차원에서도 공공기관 지정은 문제가 있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보냈다.
금융위 사정을 잘 아는 다른 관계자는 “금융위 입장에서 보면 기재부의 공공기관 지정, 금감원 독립 모두 실익이 없다”며 “공공기관 지정은 상급기관인 금융위가 반대한 만큼 강행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금감원 주장에 대해선 일부 조정에는 찬성할 수는 있겠지만, 큰 틀에서 현상 유지를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