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이 사건’ 1차 공판기일인 1월 13일 서울남부지방법원 앞에서 대한아동학대방지협회 회원들과 시민들이 정인이 양부모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박정훈 기자
먼저 정인이법 이야기다. 1월 2일 SBS 시사프로그램 ‘그것이 알고싶다’는 양부모에 학대받다 세상을 떠난 정인이 사건 내막을 보도했다. 정인이 사건은 국민적인 공분을 샀다. 실시간 검색어에 ‘정인이 사건’, ‘정인아 미안해’ 등 관련 키워드가 등장할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다. 정인이 양부모에 대한 비난 여론도 퍼졌다. 아동학대에 대한 적극적 수사를 진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 경찰도 비판 여론을 피해갈 수 없었다.
정인이 사건이 국민적 이슈로 부상하면서 국회는 바빠졌다. 1월 5일부터 8일까지 무려 15건에 달하는 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법률안이 접수됐다. 이른바 정인이법이라 불리는 테두리 안에 들어간 법안들이었다. 대표발의한 의원 수만 12명이었다. 정인이법을 대표발의한 더불어민주당 소속 의원은 6명이었다. 김민석 의원이 3개 법안을 발의했고 노웅래 임오경 강선우 강훈식 이원욱 의원이 각각 하나씩을 발의했다.
국민의힘에선 5명이 정인이법 대표발의에 참가했다. 김병욱 의원이 2개 법안을 발의했다. 김재정 김성원 김용판 이주환 의원이 법안 하나씩을 냈다. 범여권으로 분류되는 이용호 무소속 의원도 법안을 발의했다.
여야는 1월 8일 본회의를 열고 아동학대 재발 방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과 아동학대범죄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 개정안 등 일명 ‘정인이법’을 처리했다. 정인이법은 재적 266명 중 264명이 찬성하는 압도적 득표율로 통과됐다. 나머지 두 표는 기권이었다. 국민 공분을 산 정인이 사건엔 여야가 따로 없었던 셈이다.
정인이법 핵심 내용은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되는 즉시 수사기관이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의무 수사’ 조항이다. 정인이 사건에서 불거진 경찰의 늑장 대응 논란을 법적으로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조항을 두고 경찰 내에선 걱정의 목소리도 들린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정인이 사건을 계기로 아동학대 신고량은 대폭 증가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한 경찰 관계자는 “신고받은 모든 건에 대해 수사 착수가 이뤄지게 되면 경찰 행정 효율이 떨어지는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며 “실질적으로 수사해야 하는 사건을 수사하는 것엔 이견이 없지만, 허위 신고가 증가할 수 있는 여지도 남아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경찰 관계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과 국정원 대공수사권 이전 등 경찰의 신규 업무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아동학대 사건에 대한 의무 수사가 법으로 제정됐다”면서 “경찰의 어깨가 무거워지는 형국”이라고 했다.
정인이법에 아동학대범죄 가해자 처벌 강화 내용이 빠진 점도 지적받고 있다. 현행법에 따르면 아동학대치사죄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아동학대중상해죄는 3년 이상 징역에 처한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소위는 정인이법 심사 과정에서 법정형이 높아질 경우 오히려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게 돼 아동학대 범죄가 은폐될 가능성이 있으며 검찰이 기소할 때도 입증 부담이 커져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신중한 방식으로 접근했다. 수사 접근성은 높아졌지만, 양형기준이 그대로인 부분에 대한 우려 목소리가 불거지고 있다.
1월 5일 중대재해법 등 민생법안 처리에 대한 여야 합의를 마친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와 김태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법조계 관계자는 “그래도 이번 정인이법 통과 과정을 살펴보면 여야가 토론 끝에 ‘최악 졸속 법안’은 피하는 방식으로 일처리를 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는 “처음 무더기로 발의된 법안들엔 아동학대 가해자와 피해아동을 즉시 분리하지 않을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내용 등 몇몇 독소조항들이 숨어 있었다”면서 “법안의 퀄리티가 높다고 볼 수는 없지만 부작용을 양산할 수 있는 내용 몇 가지가 빠진 점은 그래도 안도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그는 “오히려 정인이법과 같은 날 통과된 중대재해법에 더 많은 독소조항이 묻어 있다”고 주장했다.
1월 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안(중대재해법)은 기업에서 사망사고 등 중대 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긴 법안이다. 이 법에 따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는 위험방지 의무가 생겼다. 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사업주와 경영책임자가 형사처벌을 받고 법인엔 벌금이 부과된다.
정인이법이 여야 ‘만장일치’ 수준 합의로 통과된 데 반해 중대재해법은 이견이 적지 않다. 중대재해법은 재적의원 266명 가운데 164명이 찬성해 통과됐다. 반대한 의원은 44명이었고, 기권에 표를 던진 의원이 58명이었다. 국민의힘과 정의당에선 이번 법안에 허점이 많다는 지적을 이어가고 있다.
중대재해법 표결에서 기권 표를 던진 의원 중엔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도 있다. 강 원내대표는 21대 국회에서 가장 먼저 중대재해법을 발의한 의원이기도 하다. 이 법안은 정의당 당론 법안이었다.
강 원내대표가 낸 법안은 8일 통과된 법안에 일부 반영됐다. 그럼에도 강 의원은 법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강 의원을 비롯한 정의당 의원들도 기권 표를 던졌다. 강 의원은 1월 8일 중대재해법 반대 토론에서 “양당 합의라는 미명하에 부족하고 허점투성이인 법인이 제출된 것을 상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이 법안엔 경영 책임자들이 면책될 수 있는 조항이 있고, 산업재해가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적용되지 않는 등 또 다른 차별들이 기정사실이 됐다”고 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반대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이 (5인 미만 사업장 제외를) 받아들여 합의가 이뤄졌다”면서 “사업장 규모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고 목숨값을 달리하는 대안에 찬성할 수 없다”고 했다.
양대 노총 위원장이 1월 6일 중대재해법 제정 촉구 단식농성 현장을 방문한 모습. 사진=박은숙 기자
노동계와 시민사회단체가 중대재해법에 반발하는 이유는 정의당 논조와 비슷하다. 노동계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은 국내 전체 사업장의 80%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법 적용 기간이 유예되고, 5인 미만 사업장은 아예 법 사각지대로 밀려났다”면서 “다니는 직장에 따라 노동자 인권이 다르게 대우받을 수 있는 반쪽짜리 법안이 졸속으로 통과됐다”고 주장했다.
지역 노동계 관계자들은 1월 8일 이후 중대재해법에 대한 규탄 목소리를 지속해서 내고 있다. 민주노총은 1월 12일 논평을 통해 “여전히 ‘솜방망이 처벌’이 가능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중대재해법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했다.
국민의힘도 중대재해법 보완 입법 의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1월 11일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경제단체장들을 만난 자리에서 “(중대재해법 보완 법안을 발의하는 것은) 당장 계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을 그은 바 있다. 그랬던 주 원내대표가 이튿날인 1월 12일 말을 바꿨다.
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입법들이 민주당 안에서 계속 반복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면서 “민주당이 숫자만 갖고 무식하게 밀어붙인 법 허점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미 입법된 법에 부작용이나 문제가 있으면 진솔하게 사과하고 보완작업을 해야 한다. 다양한 현장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겠다”고 주 원내대표는 말했다. 중대재해법에 대한 보완 입법 의사를 나타낸 셈이었다.
회의가 끝난 뒤 주 원내대표는 “(중대재해법을) 졸속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다양한 현장에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면서 “시행이 1년 정도 유예됐기 때문에 현장에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보겠다”고 덧붙였다.
1월 12일 브리핑하는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사진=박은숙 기자
국민의힘이 보완 입법 카드를 꺼낸 속내는 정의당과 다르다. 국민의힘의 보완 입법 계획엔 중대재해법 완화에 힘이 실려 있다. 경영계를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중대재해법이 산업안전보건법과 더불어 기업에 대한 이중처벌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중소기업 경영자는 “중대재해법엔 근로자 안전 확보에 대한 경영자 의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채 처벌 기준만 명시돼 있다”면서 “이렇게 되면 일자리 시장이 더욱 위축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영자는 “법 통과로 50인 이상 중소기업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국민의힘이 중대재해법 입법 보완을 언급하자 정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비판 목소리를 냈다. 박성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변인은 “(중대재해법은) 법사위 회의에서도 이의 없이 가결됐고 본회의 표결에서도 국민의힘 찬성표가 있었다”면서 “합의 처리 사흘 만에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꿨다”고 국민의힘을 저격했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후퇴를 거듭한 끝에 통과된 법을 아예 무용지물로 만들겠다는 속내를 (국민의힘이) 드러낸 것”이라면서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고 했다.
정인이법에서 갈등을 피했던 원내정당들이 중대재해법을 사이에 두고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권에선 ‘법안 통과 이후 불거지는 논쟁 또한 너무 급하게 달린 졸속 입법의 부작용’이라는 비판론도 부상하고 있다.
1월 8일 국회 본회의가 끝난 뒤 불거진 ‘졸속 입법 논란’에 대해 정치평론가 신율 명지대 교수는 “국회가 법안을 통과시키는 우선순위 기준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사실 정인이법과 중대재해법 같은 경우는 성격이 조금 다르긴 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인이법 같은 경우엔 유사 법안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이슈가 터지니 부랴부랴 신속하게 입법 절차에 돌입했다. 중대재해법 같은 경우엔 오랜 논의 끝에 합의가 됐다고 하지만, 결국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상태에서 법안이 통과가 됐다. 급한 입법 절차를 거치다 보면 찬반양론 중 반대 의사에 대해 설득하거나 불만을 완화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신율 교수는 “정인이법 같은 경우엔 이견의 여지가 없이 통과된 상황에서 부작용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고, 중대재해법 같은 경우엔 노동계와 경영계 양쪽 모두로부터 욕을 먹고 있지 않느냐”면서 “국회가 이슈에 대한 빠른 조치를 하려는 의지가 확고했지만, 그 과정에서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한 점이 아쉬운 대목”이라고 짚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